철학이야기I,II | 05 과학과 종교 사이-근대 철학과 계몽사상


세상의 모든 철학 - 10점
로버트 솔로몬 외 지음, 박창호 옮김/이론과실천



강유원: 철학이야기I,II | 2008

일시: 철학이야기I: 2008년 04월 07일 ~ 07월 28일, 철학이야기II: 2008년 09월 22일 ~ 12월 29일

교재 : 로버트 솔로몬 외(지음), 《세상의 모든 철학》, 이론과실천


강의 내용을 필사하지는 않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책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여 올린다.


철학이야기 II

18강 10/06 데카르트와 근대철학

19강 10/13 데카르트_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뉴턴

20강 10/20 스피노자, 뉴턴

21강 10/27 볼테르, 루소, 그리고 프랑스혁명

22강 11/03 로크, 흄, 경험론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스티븐 툴민, 《코스모폴리스》

데카르트, 《방법서설》

데카르트, 《성찰》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스피노자, 《에티카》

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장 자크 루소,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장 자크 루소, 《에밀》

존 로크, 《인간오성론》

조지 레이코프 ,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애덤 스미스, 《국부론》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앨버트 O. 허시먼 , 《열정과 이해관계》



18강 10/06 데카르트와 근대철학

과학, 종교, 그리고 근대성의 의미 

313 현대는 투쟁의 시작, 약간의 오만함, 저항의 외침, 과거의 것에 대한 거부의 몸짓 등을 의미했다. 알키비아데스 세대의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길을 막고 있는 (좀더 민주적이었던) 구세대 정치인들에 반대하여 서슴없이 자신들을 '현대인'으로 불렀다. 중세의 아랍인들도 자신들을 고대인들과 구별하여 '현대인'으로 선언하였다. 르네상스 시대 동안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을 재발견했던 사람들은 중세에 고착되어 있던 사람들에 대하여 자신들을 '현대인'으로 불렀다. 스콜라 철학 시대 말기에 오컴의 윌리엄은 초기의 스콜라 철학을 반박한 까닭에 '현대인'으로 불렸으며, 18세기의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의 혁명적인 활동 때문에 '현대인'으로 불렸다. 젊은 낭만주의자들은 여전히 고전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자신들이 '현대인'이라고 강조하여 선언하였다.


314 순전히 단순화를 위하여 그리고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출판사들의 편의를 위하여, 근대는 보통 서기 1500년에서 10년을 전후한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는 이해될 만한 시기 구분이다. 이 멋대로 정해진 시기보다 10년 조금 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세계'로 알려지게 된 땅에 도착하여 세계의 지리뿐만 아니라 세계의 정치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그 후 10년 만에, 마르틴 루터는 그의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 위에 내붙여 종교개혁을 주창하였다.


314 종교개혁과 더불어 중세철학이 거부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확립되고 근대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


314 근대 서양철학은 종종 고대 그리스 철학과 마찬가지로 낡은 우주론의 몰락과 새로운 의미의 과학의 발흥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이야기 되곤 한다.


315 우리가 개략적으로 묘사하였던 변화는 중세 후기부터 시작하여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316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과학적 진보가 근대 초기의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316 그 중에는 화폐의 광범위한 사용도 있었고, 사색을 자극하는 이론적인 매개물도 있었다. 두려움과 혐오 역시 철학의 강력한 동기였다.


316 16세기와 17세기는 가장 피비린내나고 잔인한 시대였다. 그 중에서도 최악의 경우는 이른바 30년 전쟁으로 불리는 것으로서, 이 전쟁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계속되어 그 피해자의 수가 14세기에 흑사병이 돌았을 때의 사망자 수와 비교할 만한 것이었다.


316 근대 철학이 어떠했으며 또 어떤 일을 했든 그리고 과학과 무슨 관련이 있었든, 근대 철학은 우선 당시의 혹독한 세계 상태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종교적 반목과 불관용 및 과도한 상호비난 등에 대해 무언가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317 근대 철학에 대한 전통적인 역사가들의 교묘한 겉발림에도 불구하고, 근대 철학은 전체적으로 보아 썩 기분 좋은 철학은 아니다.


몽테뉴-최초의 근대 철학자?

318 르네 데카르트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범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


318 데카르트는 객관성에 대한 자신의 방법을 논증하기 위해서 주관성과 논리의 사용, 즉 '수학적 방법'으로서의 동시적 전환을 가장 극적으로 주장한 철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방법에 대해 숙고하였고, 이성의 규칙을 고안하며, 명백한 것을 의심한 다음에 입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319 몽테뉴는 모랄리스트였으며, 과학자나 수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방법론적인 논문이 아닌 『수상록』을 썼다.


320 몽테뉴는 데카르트와 아주 사이가 나빴다. 데카르트는 오직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진리만을 찾았으며, 그런 진리는 장소나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없었다. 몽테뉴는 인간의 차이, 즉 인간의 믿음과 행위의 우연성에 매혹되었다. 데카르트는 필연성, 영원성, 즉 다른 말로 하면 비인간적인 것을 추구하였다.


320 몽테뉴는 삶의 철학을 발전시킨 고대의 기술을 추구하였다. 불행히도 철학의 시대 정신이 나아가는 방향은 그쪽이 아니었다. 그는 영어권 철학사 속에 들어가지 않고 프랑스 문화 연보 속에 문단의 거성으로 남아 있었다.



19강 10/13 데카르트_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뉴턴

데카르트와 새로운 과학

321 데카르트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저작을 저술했던 당시 상황의 세 가지 양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그는 종교 교육을 받았으며 가톨릭 교회의 권위적인 특성이 여전했다는 점이 있었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혁명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이 혁명은 종교적 권위의 풍토 안에서 이루어졌다. 둘째로는 새로운 과학이 발흥하고 있었다.


322 데카르트가 처해 있던 상황의 세번째 양상은 종종 무시되었다. 그의 저작들은 침착하고 방법론적이지만 데카르트는 유럽에서 진행 중이던 종교전쟁에 격심한 혼란을 겪었다. 몽테뉴는 관용을 권하였고, 데카르트는 이성을 권하였다. 이성에 대한 차분하고 확신에 찬 증명들은 나라를 분열시키고 있던 피비린내나는 종교적 논쟁과 전쟁 당사자들에게 환영할 만한 대안을 제공하였다.


322 데카르트의 철학은 우리 각자에게 우리가 믿는 것의 진실성을 우리 스스로 확립할 것을 요구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은 수학을 활용하여 확실히 진리를 세우라는 뜻이다. 그는 이런 목적을 위하여 근본적인 방법을 창안하였다. 그것은 방법적 회의로서, 그는 이런 회의 속에서 자신이 믿는 모든 것을 의심하며, 그것이 정당하다고 증명될 때까지 고대의 회의주의자들이 말하는 에포케(판단 중지) 속에 유보 시켜 놓는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자주 다른 사람들에게 속거나 혹은 잘못된 정보를 얻게 되므로, 다른 이들의 권위에 대한 믿음을 유보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이 때로 자신의 감각에 의해 속았음을 깨닫는다.


323 비록 방식은 몽테뉴로부터 빌려왔지만, 데카르트는 정반대의 의도를 가지고 극적으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 자신의 무지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런 무지에 대해 인간적으로 겸손해지기 위하여, 몽테뉴는 우리에게 그를 하나의 거울로 삼아 우리 자신을 검토할 것을 제안한다.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회의를 극한까지, 어리석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까지 밀고 나가서 그것들이 반동을 일으켜 우리에게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가져다 주도록 할 것을 주장한다.


324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확실한 것을 제시한다. 꿈속에서도, 분명한 것들이 있다. 특히 산술과 기하학이 그러하다. 둘에 둘을 더하면 넷과 같다는 사실은 꿈에서나 깨어 있을때나 확실히 옳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것은 아니다.


324 이러한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데카르트의 증명은 수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연역의 방법으로서, 이에 따르면 모든 원리는 다른 원리나 전제를 기초로 이미 확립된 그에 앞서는 원리로부터 이끌어 내지고 '추론'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원리들은 일련의 근본적인 정의들과 공리들로부터 유도되어야 한다. 


324 데카르트의 원대한 연역의 핵심은 전제로 사용될 의심할 수 없는 공리일 것이다. 그 공리는 바로 그의 그의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 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이 명제는 하나의 논증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 것은 실로 하나의 드러냄, 즉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내가 모를 수 없다는 자기확인의 구현이다.


325 그는 이성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의심하지 않았거나 혹은 의심했더라도 이성의 확실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성의 확실성을 가정하였다. 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순환적 오류'이다.


327 그가 사용한 수학적 방법은 그 다음 200년 동안 일어났던 많은 주요한 철학적 움직임에 기초를 제공하였다.


327 주관성은 철학에서 너무도 자주 아주 다른 많은 방식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것은 통찰이라기보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이것이 데카르트에게 적용될 때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 있는 특징들을 포함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첫째, 이것은 내면성, 즉 ①자기 반성에 우선적 가치를 두는 것으로서. 곧 정신은 사유를 담고 있는 내적 영역이라는 점이다.


328 주관성은 또한 단순한 의견, 객관적인 지식보다는 사적인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졌다. 


328 셋째, 주관성은 또한 어떤 전망과 그 한계를 내포하는 개인적 경험을 가리킬 수도 있다.


328 넷째, 그리고 순수하게 주관성은 단지 하나의 특정한 시점, 즉 문학에서 말하는 '일인칭 시점'을 가리킨다.


328 그것은 ⑤감정적이고 정서적인, 그러므로 선입견에 의해 편향된 것으로서의 주관성 개념이다.


329 데카르트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한 개인은 정신과 육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의 결합이라는 의문스러운 명제로써 답하였다. 


329 사유는 물질적 대상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파스칼, 뉴턴

331 스피노자에 따르면, 실체는 그 자체의 본성상 완전히 자기충족적이기 때문에, 단 하나의 실체만이 있을 수 있다. 그 실체는 바로 신이다. 그러므로 신은 우주와 하나이며, 창조자와 창조물, 즉 '신'과 '자연' 사이의 구별은 착각일 뿐이다. (이런 입장이 곧 범신론이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개인은 사실 오직 하나인 실체의 변형들이다.


331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실체는 그 자체의 본성상 완전히 자기충족적이라는 그와 같은 전제는 세계가 무수히 많은 단순한 실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단순한 실체들은 모나드(monad)로 불리는데, 각각의 모나드는 자기충족적이며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독립적이다.


332 분명히 터무니없는 세계의 모습에 대한 만화 같은 캐리커처를 상상하지 않고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이러한 형이상학적 이미지들을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334 스피노자는 유대인으로 자유사상가였는데, 그의 회의주의는 정통 교회의 교우들에게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는 파문 당하여 마침내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하였다. 불행한 생애 대부분 동안 은둔하여 살았는데, 렌즈를 갈아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하였다.


335 스피노자의 주된 저작은 『윤리학』이다. 이 제목은 종종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삶의 철학을 기대하면서 책을 펼치지만, 그 대신에 공리, 정리, 'Q.E.D'로 가득 찬 철저한 기하학 논문처럼 꾸며진 신랄한 문장들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335 스피노자는 개인적인 고뇌를 숨긴 채, 그가 제안하는 철학적 해결책을 가장 형식적이고 만만찮은 연역적 방식으로 가장하였다.


335 스피노자의 기하학적 수학적 방법은 확실히 데카르트적인 방법을 수행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윤리학』의 (5권 중에서) 처음 2권에서는 실로 무한히 많은 속성을 지닌 실체가 단 하나이며 단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단 하나의 결론을 확립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335 이들 중 첫번째는 스피노자의 전망에 따르면 서로 다른 개별자들 사이에는 어떤 궁극적인 차이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동일한 실체의 부분인데, 그 실제란 또한 신이기도 하다.


336 이러한 교화적인 전망은 19세기로 전환되는 시기에 하나의 강력한 이미지가 되었다. 당시는 그리스도교 철학자들도 사람들 사이의 이른바 '소외'와, 우리 '너머'에 있는 초월적 신에 대한 인간 소외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던 시기였다. 더욱이 유일한 실체는 언제나 존재해왔고 언제나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불멸성이 보장된다.


336 스피노자의 관점으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필연적인 것이다. 우주가 신이라면,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무슨 일이든 분명 어떤 아유 때문에 일어난다고 믿을 수 있다.


338 라이프니츠 역시 삶에 대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였지만, 스피노자의 외로운 삶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오늘날의 제트족으로 불릴만한 부자였다. 라이프니츠는 유럽의 군주들, 모든 위대한 천재들을 알고 지냈다. 그는 미적분학을 창안하였고, 과학자, 법률가, 역사가, 정치가, 학자, 논리학자, 언어학자, 그리고 신학자였다.


338 라이프니츠에게 철학은 하나의 꾸준한 취미였으며, 그는 일생동안 철학적 토론에 참여하고 서신을 통해 의견을 나누었다.


338 더욱 감동적인 것은 라이프니츠의 세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다. 이런 전망이 17세기 유럽을 황폐화시켰던 소름끼치는 전쟁과 종교적 다툼 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38 라이프니츠가 모든 문제를 피를 흘리지 않는 합리적인 계산에 의해 해결할 수 있는 보편적 언어와 보편적 논리의 개발을 제안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는 자기 철학의 기초적 원리로 '충족이유율'이라 불리는 것을 옹호하였다.


339 선택할 수 있는 서로 다른 가능한 세계가 무수히 많다면, 신은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세계, 즉 모든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가장 좋은 세계만을 선택할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논리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 전망은 논박의 여지가 없이 교화적이다. 환란의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뒤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믿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위안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오래된 악의 문제에 대한 또 다른 고전적인 답이 있다. 우리가 악으로 여기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전망이 한정적이라는 점, 즉 가능성들의 총합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


339 만일 근대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이작 뉴턴(1643~1727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면, 근대 철학에 대한 이야기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20강 10/20 스피노자, 뉴턴

21강 10/27 볼테르, 루소, 그리고 프랑스혁명

계몽사상, 식민주의, 동양의 몰락

341 과학의 발흥과 교회의 권위에 대한 과학의 두드러진 승리와 더불어, 유럽은 새로운 신앙, 즉 이성에 대한 신앙을 찬양하게 되었다. 이른바 계몽사상이라 불리는 것이 영국에서 처음으로, 아이작 뉴턴의 과학적 성취와 17세기 말의 비교적 피를 흘리지 않고 빠르게 진행된 정치적 변혁, 즉 명예혁명에 곧이어 나타났다.


341 그들의 진리는 보편적인 진리이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강요 받지않고 그들이 독자적으로 발견한 진리들이다. 특히 두세 명의 프랑스 철학자들은 무신론자이자 유물론자들로서, 사물의 합리적 질서 속에 권위주의적인 신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보았다. 모든 계몽철학자들이 동의하고 믿는 것은 바로 이성이었다. 그들은 이성을 통해서 과학으로써 자연의 근본적인 비밀을 건드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상에 비참함과 불의가 없는 사회, 즉 지상 천국을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로크, 흄, 그리고 경험론

344 영국의 철학계에서 존 로크(1632~1704년)가 이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무비판적인 신뢰를 비판하였다. 그는 추상적인 이성과 사변 대신에, 감각을 통해 세계에 대하여 배우고 아는 능력과 경험을 신뢰해야 한다고 하였다. (젊은 볼테르가 파리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사상이 바로 로크의 철학이었다.)


344 로크는 '모든 지식은 감각으로부터 온다'고 하였으며, 이 점에서 아일랜드의 주교인 조지 버클리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이 그의 뒤를 이었다.


345 플라톤의 『국가』와 달리, 로크의 새로운 정치적 세계는 인간의 권리라는 비교적 새로운 개념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 그 권리는 특히 사유 재산에 대한 권리였다.


346 우리가 어떤 사물의 속성이라고 생각하는 감각 덩어리 외에, 우리는 그 사물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문제를 제기한다. 로크의 결론은 우리가 사물 자체의 존재, 즉 실체를 추론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대상과 무관한 속성 개념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346 (모양이나 무게와 같은 제2성질에 반대되는) 이러한 제1성질들은 '저기 바깥의'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347 데이비드 흄(1711~76년)은 이러한 불편한 결과를 완전히 공표하였다. 흄의 철학은 고대 이래 볼 수 없었던 완전한 회의론이었다.


348 흄의 회의론은 한 세기 동안 지속된 지식에 대한 토론을 통해 나온 일련의 이론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선 흄은 스스로 인정하는 경험론자였다. 그는 거듭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하였다. 두번째,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을, 경험과 이 경험이 의존하는 세계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였다.


349 흄의 우리의 모든 지식이 근거로 삼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이 이성에 의해서 확립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마찬가지로 도덕의 영역에서도, 흄은 회의적인 시각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내 손가락을 찌르는 것보다 세계의 반이 파괴되는 것을 택하는 것은 이성에 반하지 않는다." 이성은 우리에게 그렇게 행동하게끔 정당화하거나 동기를 부여할 수 없다.


349 우리의 흄의 정치학에서처럼 계몽주의의 이성 대신에 전통에 호소하는 보수성을 보게된다. 결국 이성은 한계를 지니는 것이었다. 흄은 개인적 성격, 즉 좋은 교육, 덕의 수양, 전통에 대한 존중의 중요성을 옹호하였다. 이성은 한계를 지닐지 모르지만 우리의 감정과 자연적인 상식은 사회의 전통을 통해서 양성되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과학적인 근대 철학의 분위기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무시되어온 힘과 덕을 지녔다.


350 정신이 지식과 경험을 획득할 수 있게끔 미리 준비된 능력 혹은 '재능'을 갖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351 경험론자든 합리론자든, 그들은 수백만의 사람들을 죽이고 유럽 및 유럽인들을 갈라놓은 지역적 편견과 상호 적대감으로 싸우는 인간의 보편적 이성 능력에 대해 논의하였다. 근대 철학은 존재론, 인식론, 형이상학의 확장된 논의가 아니라 지독한 학살 대신 활발한 대화를 요청하는 것이다.


351 그들의 진정한 공격 대상은 비합리성이었다.


351 특히 철학자들이 사회의 본성과 인간의 권리에 관하여 행한 논쟁은 결코 이론적인 것이 아니었다. 표현의 자유, 종교적 관용, 그리고 사유재산의 자유로운 소유 등이 포함되는 이러한 권리들은 미국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의 핵심적인 주제였다.


352 한 개인이 법이나 관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권'에 의해 재산을 소유할 자격이 있다는 사상은, 나중에 자본주의로 불리게 될 것을 위한 확고한 기초를 제공하였다.



22강 11/03 로크, 흄, 경험론

애덤 스미스, 도덕적 감정,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윤리

354 애덤 스미스의 사상에 1980년대의 '부의 대한 끝없는 욕망은 좋은 것이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지지하는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 2000년 동안 돈과 탐욕이 죄악으로 비난받아온 이후, 18세기 말의 시민들이 사적 이익이 단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분명 경험했을 속시원함이 어떤 것이었을지를 쉽사리 상상할 수 있다.


356 대표적인 도덕적 감정익 동정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논증하였다.


356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거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들이 아니며, 오히려 타인들을 위해서도 행동하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들인 것이다. 점잖은 자본주의 체제는 오직 이와 같은 사회 환경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볼테르, 루소, 그리고 프랑스혁명

357 볼테르(1697~1778년)는 영국의 계몽사상과 특히 로크의 정치철학에 탄복하였다. 그는 영국에 갔다가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두 가지 모두를 수입하였다. 그는 이것들로 프랑스정부와 가톨릭교회를 공격하였다. 


357 볼테르는 무엇보다도 이성과 개인의 자율성을 옹호하였으며 당시의 가열된 형이상학과 신학을 자극하며 즐거워하였다. 그는 이런 점에서 그보다 몇 년 후배격인 흄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였으며, 중산계급(혹은 좀더 정확히 말해서 부르주아)의 개혁에 대한 요구가 실행되도록 추진하여 프랑스혁명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였다.


357 장 자크 루소(1712~78년)은 더욱 미묘하고도 복잡한 사상가이다. 그는 볼테르와는 달리, 인간의 본성과 사회에 대한 큰 이론들을 피하지 않았다.


358 어떤 사람이 땅 한쪽에 울타리를 쳐놓고 "이 땅은 내 거야!"라고 선언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에서 이보다 더 큰 범죄는 없었다. 인간의 삶을 지배해온 불평등과 불의에 대한 긴 탄식은 사유재산의 확립으로부터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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