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야기I,II | 02 세계질서에 대한 탐구-고대 철학


세상의 모든 철학 - 10점
로버트 솔로몬 외 지음, 박창호 옮김/이론과실천



강유원: 철학이야기I,II | 2008

일시: 철학이야기I: 2008년 04월 07일 ~ 07월 28일, 철학이야기II: 2008년 09월 22일 ~ 12월 29일

교재 : 로버트 솔로몬 외(지음), 《세상의 모든 철학》, 이론과실천


강의 내용을 필사하지는 않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책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여 올린다.


04강 04/28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3 - 다원론자들/소피스트의 등장/소크라테스

05강 05/19 플라톤 - 형이상학자 혹은 숭고한 해학가?

06강 05/26 철학자 중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각주

07강 06/02 험난한 시대 - 스토아 철학, 회의주의, 에피쿠로스의 철학/고대 인도의 신비주의와 논리학



 


플라톤 《향연》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04강 04/28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3 - 다원론자들/소피스트의 등장/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3-다원론자들

82 엠페도클레스아낙사고라스, 그리고 데모크리토스는 모두 일원론과는 거리가 먼 다원론자들이었다. 이들은 세계가 어떤 하나의 요소에 기초를 두었다거나 혹은 어떤 하나의 질서에 의해 통일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84 데모크리토스는 가장 극단적인 다원론자였다. 세계는 수많은 다양한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입자들은 크기와 모양에서 서로 다르지만 사물의 근본 요소라는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잘라지거나 분할될 수 없다. ('atom'이라는 단어가 어원학적으로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단어는 a[=아니다]와 tom[=자르다]의 합성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데모크리토스는 무한한 분할 가능성에 대한 아낙사고라스의 주장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대 의견을 제시하면서 맞섰다.

85 데모크리토스와 더불어, 세계를 정령과 신화로부터 끌어내는 시도가 완수되었다. 그의 우주 개념은 전적으로 물질적이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강요된 질서나 지성도 없으며, 로고스나 목적 및 정신 같은 것도 전혀 없다.

87 철학은 이후 2천 년 동안 전제들을 공격하기, 논리를 비판하고 세력화하기, '존재'와 '있다'의 용어를 분명히 하고 또 다른 대상에 적용시켜 추정하기, 결론을 재해석하기, 결론을 재확인하기, 논증을 재구성하기, 논증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기, 신학을 존재론으로 변환하기, 존재론을 재정의하여 언어의 의미론으로 바꾸기, 의미론을 재정의하여 다시 상식적인 언어로 되돌려놓기, 그런 다음 상식에 도전하거나 상식을 웃음 거리로 만들고 이를 다시 역설로 만들어 버리기, 논리를 더욱 세련화하기, 새롭고 더욱 곤혹스러운 역설 만들어내기 등을 하면서 보냈다.


소피스트의 등장
87 파르메니데스와 그의 논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이미 언급 했듯이 그를 무시하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철학자들이 이런 방법을 채택했다. 

88 우리가 진정한 세계를 결코 알 수 없으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환영이라는 제안은 철학자들로 하여금 매우 극적인 방법으로 상식에 대항하게끔 만들었다.

88 그런 사상들은 ① 인간의 모든 지식과 가치들은 '상대적'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실재'가 아니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② 윤리학에서 이와 비슷한 논증이 행해졌다. ③ 우리의 이상은 사실상 통치자들의 이상에 불과하며, 정의(正義)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이익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 ① 인식론적 회의주의, ② 윤리적 상대주의, ③ 정치학적 현실주의

88 바꾸어 말하면, 소피스트와 더불어 철학은 전적으로 실천적인 것, 즉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살아가는 방법이 되어 버렸다. 세계의 기원과 궁극적인 실재의 본성에 대한 논의는 지겨울 만큼 충분했다. 모호한 언설과 불가능한 논증도 마찬가지였다. 자, 이제는 삶으로 내려가서 철학을 사용하여 출세하고 너무 경멸스럽지 않을 만큼 인생을 좀 즐기도록 하자.

88 여러 소피스트 중에서 고르기아스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을 모방하여 다음과 같은 다소 놀라운 결론을 '증명'하였다.
1.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2.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3. 어떤 것이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3 다음에 추가: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수 없다.

90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말한 사람이 바로 프로타고라스였다. 이 말은 때로 고대의 인문주의적 진술로 인용된다. 이것은 곧 인간의 필요, 인간적 개념, 인간의 관심사 등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주장 한다. 따라서 이 말은 유용한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견해, 즉 일종의 실용주의에 대한 권유로 여겨졌다. 이것은 또한 신적 전망이란 없으며 따라서 사실상 신은 없다는 말이었다.
━ 각각의 개별적인 인간은 만물의 척도 → 인식론적 회의주의의 핵심을 나타냄

90 그렇지만 이 금언은 일종의 회의주의, 즉 실재에 대한 모든 주장을 의심할만한 충분하고도 반박할 수 없는 이유를 지적하는 것으로 훨씬 더 자주 사용되었다.

91 그러나 프로타고라스를 덜 회의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 있다. 그의 진술을 의심이 아니라 오히려 확신에 관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이 세계를 인간적인 견지에서 바라 보기 때문에 이 세계를 안다.

92 소피스트 가운데 다른 몇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 해둘 만하다. 이는 단지 그들 역시 나중에 자주 철학적으로 남용 되었기 때문이다. 트라시마코스는 플라톤의 『국가』 제1권에서 나오는 인물로, 정의(正義)란 사실상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생각해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실존 인물이었다. 그리고 플라톤이 묘사한 바와 같이 그의 논증 방식이 날카롭지 못했던 것 같다. 이어서 칼리클레스를 들 수 있다. 그는 힘의 자연스러운 표현을 주장하였으며, 인간사의 다른 이상들의 역할에 대 해서는 오히려 냉소적이었다. 당시의 또 다른 철학자이자 시인으로서 크리티아스라는 귀족을 들 수 있다. 크리티아스는 스파르타의 전제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다소 사색적인 시구를 창작했으며, 수천 명의 아테네의 민주주의자들을 살해했거나 살해한 것으로 의심 받는다. 그의 최후는 불행했다. 플라톤이 바로 그의 사촌이었다. 아테네 역사에 실재했던 한 인물도 언급할 만하다. 바로 평판이 나빴던 알키비아데스이다. 그는 두드러진 미남에다 재능이 있었으며, 배신을 잘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거침없이 말하였으며 아테네를 두 번이나 배신하였다. (한번은 스파르타인들에 붙었으며 나중에는 자신의 고향인 아테네에 대항하여 페르시아인들에게 붙었다.) 그는 유명한 연애쟁이로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간통을 하고 불경스러운 욕을 해대었다. 그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상을 받은 학생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였다. 

93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시민들의 단 한 번의 자발적인 봉기로 그러한 제도가 생겨날 수는 없다.

93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도 없지 않았다. 부유한 귀족 가문들은 권력과 특권의 상실에 분개하였으며, 그들은 항상 취약하기 마련인 민주주의의 기초를 뒤흔들 비밀단체들을 조직하였다. 소피스트의 시대에 아테네는 기원전 430 ~ 429년에 전염병의 창궐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페리클레스를 포함하여) 아테네 시민의 4 분의 1이 죽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국가가 황폐화되었다. 소피스트 중 가장 현명하고 영리했던 소크라테스는 젋음에 넘치는 알키비아데스가 포함된 바로 이 비밀단체들의 젊은이들에게 호소하였다.


소크라테스
94 그는 결코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이론적인 철학자, 무심하고 사회에 무관심한 철학 교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서 그를 찬양하거나 조소해왔다. 그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그가 항상 말했듯이 그의 중요한 사명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정치적 사명 또한 갖고 있었다. 그의 사명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는 통치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 통치되는 모든 형태의 정부에도 똑같이 반대하였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완전한 국가, 즉 철학자들에 의해 통치되는 공화국에 대한 이상을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다.(보류)
 모든 사람이 전문가가 되어서 모든 사람이 각자를 다스리고, 그리고 모든 이가 자기를 잘 지배할 수 있게 되면 그 사회가 잘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 통치되는 것에 반대하기는 했지만 소수의 전문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96 그는 현자였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며, '쇠파리(끈질긴 토론자)'였다.

96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에 화려한 논증법을 가진 아테네의 수많은 쇠파리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는 다른 소피스트처럼 논리뿐만 아니라 수사적인 수법과 왜곡에서도 뛰어났으며, 그 많은 부분을 솜씨 좋은 파르메니데스와 지나치게 영리한 제논으로부터 빌려 왔다. 소크라테스는 자명해 보이는 이치를 모순에 빠뜨려 무너뜨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평범한 말을 모순에 빠지게 할 줄 알았으며, 한 논증의 가장 날카로운 비판이 거꾸로 그 논증을 제시한 이에게 향하도록 만들면서 비트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96 그의 목적이 단지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 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스스로 해답을 찾게끔 만들었으며, 일부 소피스트와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이 질문들 에 대한 대답이 실제로 있다고 확신했던 것 같다.

99 소크라테스는 아주 특별한 덕(virtue) 개념이 핵심인 이론을 옹호하였다. 덕은 한 개인에게 가장 좋은 것이며, 덕 중에서 첫째가는 것은 철학적이거나 지적인 덕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이런 의미의 덕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99 우리가 자아의 경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아주 모호하였다. 소크라테스는 내부의 목소리, 즉 자신의 분수를 지키게끔 해주는 다이몬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수호신은 그에게 계속해서 그가 얼마나 무지하며, 얼마나 무식한지를 말해주었으며, 또한 오로지 앎(지식)만이 그의 영혼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100 그의 영혼 개념은 잘 알려진 대로 확정적이지 않고 열려 있다. 그것은 명백하게 종교적이지도 않고, 또 어떤 형이상학적이거나 신학적인 이론을 전제하지 않는 것 같다. 또한 영혼을 생기 있는 '숨(호흡)'으로 보는 전통적 관점처럼, 어떤 자연적이거나 물질적인 연관성도 포함하지 않는다. 사실은 그가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며 동의를 구하였다는 사실조차 분명치 않으며, 그는 다만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만일 영혼이 불멸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냐고 말했을 뿐이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 사는 일(그리고 죽는 일)은 순전히 개인적인 성격과 성실성에 관련된 문제이며 미래의 보상에 대한 어떤 기대와도 상관이 없다. 소크라테스의 관심은 엄밀히 윤리적인 것이며, 거기에는 그의 선배들을 매혹시켰던 우주론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102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통상적인 경험 너머에 있는 이데아를 믿었던 것 같다.

각주 24 물론 그렇게 고무적인 것은 아닌, 소크라테스에 대한 또 다른 반응들도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제자였던 안티스테네스는 빈곤과 매우 금욕적인(자기부정적인) 개인의 도덕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견유학파(Cynic, 이 말은 개를 뜻하는 그리스어 'cyne'에서 유래하였다)였다. 또 다른 견유학파였던 디오게네스에 대하여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미쳐버린 소크라테스이다."


05강 05/19 플라톤 - 형이상학자 혹은 숭고한 해학가?

플라톤-형이상학자 혹은 숭고한 해학가?
108 플라톤의 철학은 우선 의심할 수 없는 소크라테스의 가치에 대한 인정과 전적인 찬양으로 시작되었다.

108 플라톤의 초기 대화들은 특히 윤리와 선한 인간이 되는 것과 덕의 정의에 관한 것으로, 여기서는 소크라테스의 견해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고 있기는 하지만 매우 미화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반면 지식과 우주론적 문제들에 더욱 많이 관련되어 있는 후기의 대화들은 플라톤의 사상임이 거의 확실하다.

108 플라톤 철학의 중심사상은 형상론이었다. 이 이론은 '두 개의 세계'를 상정하는 우주론을 제기하였다. 하나의 세계는 변화하고 비 항구적인 우리의 일상 세계이며, 다른 하나의 세계는 이상적인 '형샹' 혹은 에이도스(eidos)가 살고 있는 이데아의 세계이다. 첫번째 세계는 '생성의 세계'로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하였듯이 유동하는 세계이며, 후자의 세계는 파르메니데스가 요구했던 영원불변하는 세계이다. 플라톤의 새로운 통찰이 매우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두 세계가 파르메니데스와 몇몇 소피스트들이 주장하듯이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되어 있다고 본 까닭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성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 즉 이상적인 형상의 세계에 의해 규정된다(이상적인 형상의 세계가 생성의 세계에 관여한다). 이렇게 하여, 일상세계를 근저에서 지탱하고 있는 불변하는 로고스는 형상들의 이상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로고스는 일상세계의 끊임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상세계를 규정한다. 더욱이 이 이상적인 형상들의 세계는 파르메니데스의 경우처럼 알 수 없는 세계가 아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는 이성을 통하여 이 세계를 적어도 어렴풋이 알아볼 수는 있다.

110 동굴의 비유는 동굴 속에서 족쇄에 채워진 채 동굴의 벽을 바라보고 있는 죄수들의 이미지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이 바라보면서 실재라고 여기는 것은 벽 위에 비친 그림자일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이 비유를 얘기하면서) 우리 모두가 실재로 여기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그림자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그림자가 비실제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재의 그림자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실재적인 것의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파르메니데스의 경우처럼, 실재와 환영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좀더 실재적이고 좀 덜 실재적인 것 사이의 구분, 상위 세계와 하위 세계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111 이제 죄수들 중의 한 사람인 철학자가 족쇄를 끊고 고개를 돌려 처음으로 동굴의 벽에 그림자를 던지는 진정한 사물과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드는 밝은 태양을 보게 되었다고 하자. 그는 이 눈부심에 현혹되지 않을까? 그는 곧바로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실재와 비교하여 일상의 실재의 그림자들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알아보지 않을까? 또한 언제나 불완전하고 혼동된 관념 들과 일상적인 남녀의 행동에 비해 완전한 형상을 가진 덕과 정의 그리고 용기를 보면서 철학자는 눈이 부실 것이다. 그때 그의 열망은 얼마나 '더 높아'질 것인가. 그리고 만일 철학자가 다시 동굴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그들의 세계가 얼마나 초라하며, 또 그들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들인가를 설명해주려 하면, 그들은 오히려 그를 죽이려 들지 않을까? 이 비유가 소크라테스의 운명을 언급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형상에 관한 암시는 더욱 보편적이고 심오한 의미를 갖는다.

111 형상론은 플라톤의 철학을 매우 추상적이고 우주론적으로 보이게 한다. 사실 플라톤의 철학은 우선 정치철학이며, 『국가』는 정치적으로 매우 논쟁적인 저작이다. 하지만 이는 정치적이지만도 않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옹호하고 재정의하는 일은 전혀 새로운 우주론, 즉 사실상 제우스와 그 외 신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종교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111 국가의 통치는 가장 지식이 많고 덕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이 맡게 되는데, 이는 곧 철학자를 의미한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철학자-왕이라는 이미지를 선보였는데, 이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조롱을 받았다(정신 나간 철학자에 대한 농담이 적어도 탈레스 때부터 도처에 있었다.).

114 『향연』에서의 사랑에 대한 강조는 플라톤 사상의 중요한 한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아름다움과 질서에 대한 미학적 관심은 플라톤 철학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아름다움이란 육체를 가진 인간이 가장 용이하게 인식할 수 있는 형상이다.

114 더욱이 플라톤에게 덕은 아름다움과 유사하다. 덕은 영혼을 조화롭게 만들며,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은 얼굴이나 어떤 장면의 요소들을 질서지운다.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조차 각 부분들이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다는 미학적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115 『향연』은 또한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무지한 사람이 아니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는 유일한 대화이다. 그는 자신이 확실히 알고 있는 한 가지가 사랑이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는 그가 이미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06강 05/26 철학자 중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각주

철학자 중의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

116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로서 자신이 거부한 스승의 형상론과 자연스럽게 관계되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학생의 학생'으로서 또한 스승의 덕 개념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여기서 스승의 이론에 진심으로 동의하였다.


116 그리하여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속에서 굳건히 지상에 발을 딛고 있는 '일원론적 세계'의 철학을 발견하게 된다.


118 철학의 역사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숙명적인 대결 관계로 기술해왔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이자 20년 동안의 벗인 플라톤과 전면적으로 결별할 생각이 결코 없었다. 사물들의 형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는 사물의 형상은 역시 그 사물 안에 있으며, 그 사물 너머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119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저 너머에 도달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감각적 경험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현실적 상태를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사물의 현실태가 아니라 잠재태(사물이 그렇게 될 수 있고 그렇게 될 것)이다.


120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심사상(이는 이를 그렇게 강조하지는 않았던 플라톤과 사실상 같은 입장을 견지한다)은 목적론으로, 이는 사물들의 목적성을 뜻한다.


121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는 우주창조론이 없다. 그는 우주가 영원히 존재해 왔으며 따라서 우주에는 시초가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사물의 잠재태와, 이 잠재태를 규정하고 이끌 내적 원리에 대해 설명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플라톤에게 개별 사물들을 규정하는 형상은 그 개별 사물들과 완전히 구분되었던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물들의 형상은 바로 사물의 가능성을 인도하는 내적 원리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때로 무한히 많은 개체들에 관여하는 하나의 형상이 있다고 말했던(이것은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에 '일자와 다자[혹은 다자 속의 일자]' 문제로 불리곤 하던 것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궁극적 존재하는 것은 이 말, 이 나무, 이 사람 같이 개별적인 사물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의 세계 같은 초현실은 없으며, 이 세계의 개별 사물들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122한 사물의 모든 특성들이 똑같은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어떤 특성들은 본질적인 것으로서, 그 실체를 실체답게 만드는 결정적인 특성이다. 다른 특성들은 '우연한' 특성들로서, 우발적이고 비 본질적인 특성들이다. 소크라테스가 머리카락을 잃었어도, 그는 여전히 소크라테스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개구리가 되었다면 개구리는 소크라테스가 아닐 것이다. 한 사물의 본질은 그 사물일 수 없는 것은 제외되고, 그 사물을 그것답게 만드는 특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123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중에 (찬양되지 않는) '철학자의 신'으로 불리게 될 개념을 선보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을 하나의 물질적 원리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주를 처음으로 움직이게 하는 '최초의 원인'으로서, 18세기의 '이신론(理神論)자들'의 신과 같다. 신은 존재에게 불현듯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항상 그렇듯이, 이러한 개념은 무엇보다도 목적론적이다. 모든 활동은 하나의 목적(텔로스, telos), 즉 그 최종적인 이상을 갖는다. 이것은 존재의 세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활동 자체의 내부에 존재 한다. 그럼에도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후의 그리스도교적인 신의 개념에 아주 훌륭한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다. 우주 자체의 궁극적인 목적, 즉 그 자체 내에 존재하며 질료와는 별개의 유일한 형상은 바로 신이다. 신은 부동의 원동자로서, 별들과 행성들이 궤도를 유지하며 우주 속에서 삶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124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 서로 다른 '원인들'을 구분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원인'이란 하나의 설명적인 원리로서 '이유(reason)'이자  '왜냐하면(because)'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원인은, 즉 다소 즉각적이고 대체로 물리적인 원인은 이들 네 가지 원인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네 개의 원인들은 다음과 같다. 사물을 구성하거나 움직이게 하는 물질인 질료인, 사물의 형태, 청사진, 본질, 발전을 인도하고 설명해주는 내적 원리로서의 형상인, '그것을 위한' 목적 곧 텔로스인 목적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원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움직이게 하거나 멈추게 하는 즉각적인 계기 또는 추진력으로서의 동력인.


125 목적인은 과학에서는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리고 아마도 바로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근대의 사고와 가장 두드러지게 다르며, 이는 단지 용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128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그의 윤리학과 정치학에 실천적으로 적용되었다. 엄밀히 말해서 윤리와 정치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핵심인 좋은 삶은 그의 정치학의 핵심인 좋은 사회에의 참여를 요구한다.


129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엄밀히 말해서 목적론적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목적'에 의해 규정된다. 사람들은 목적을 갖고 있다. 우리는 즉각적인 목적들을 갖고 있지만, 또한 궁극적인 자연적 목적도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후자의 목적은 일반적으로 '행복'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잘 지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행복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인 에우다이모니아는 종종 '잘 지내는' 혹은 '번창하는'이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행복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그리고 그것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들(특히, 이성과 덕)에 대한 분석이다.


134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그 자신이 해결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중요한 난제를 지적해두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이 분석을 시작하면서, 행복한 삶이란 활동적인 삶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이런 활동들 중의 하나로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실상 가장 중요하고도 신성한 활동은 관조(사유, 반성, 철학)라고 언급하였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보다도 관조하는 삶을 찬양하였다. 관조하는 삶은 가장 거룩한 삶이며 그리고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에게 즐거이 기대할 수 있는 종류의 유일한 불멸성을 주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134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술하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조화로운 삶이란 것은 당시의 그리스 도시국가에 대한 정확한 서술인 동시에 향수(鄕愁)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전쟁에 의한 황폐화, 아테네와 다른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으로 편입된 것, 정직과 충성심과 가족적 가치 등 전통적인 규범의 몰락,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의 영광을 기울게 했다. 후에 (철학자이자 고전학자였던) 니체가 주장했듯이 소크라테스,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데카당파들, 즉 이미 빠르게 쇠퇴하고 있던 사회의 대변인들이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들이 그의 윤리학에서 허겁지겁 움켜쥔 부분이 관조하는 삶이라는 이상론(理想論)임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인간 본성의 가장 본질적이고도 신성하기까지 한 특성으로 고양되었던 사심없는 이성이라는 이상은 사실상 이후 전 세기에 걸쳐 서양의 전통을 지배하게 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각주

135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주장에 따르면, 서양 철학 전통 전체는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한 것이다. 좀더 관대하게 말하자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쟁을 정교하게 확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플라톤은 사변적이고 암시적이며 시적이다. 그의 알려진 저작들은 연극과 철학에 관한 것들이다. 궁극적 이상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는 커다란 비밀처럼 반쯤 감추어진 채로 남아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저한 과학자로서, (지금은 유실되었지만) 그가 대화록을 썼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아는 그의 저작은 다소 무미 건조하고, 명쾌하면서 조심스러우며, 완전히 분석적이어서 사변적인 경우는 드물다. 물론 우리는 플라톤에게서 많은 암시적인 분석과 논의를 볼 수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굉장한 철학적 통찰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방식과 본질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차이는 서양의 전통 전체에 걸쳐 서로 뒤섞여 있는 서로 다른 두 기질을 보여준다.



07강 06/02 험난한 시대 - 스토아 철학, 회의주의, 에피쿠로스의 철학/고대 인도의 신비주의와 논리학


험난한 시대 - 스토아 철학, 회의주의, 에피쿠로스의 철학

137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은 여러 학파 간에 경쟁하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그러한 경쟁은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움 사이뿐만 아니라, 새로 생겨난 경쟁적인 학파들 사이에서도 있었다. 철학이 이론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철학들이 우선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인간의 기본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37 여기서 우리는 이들의 발전을 더듬어 가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그리스 도시국가의 붕괴, 야심적인 군주들 사이의 무의미한 전쟁들, 이집트에서의 박해와 학살, 로마의 침략으로 인한 그리스의 황폐화 및 대제국의 두드러진 퇴폐와 쇠퇴 등을 포함하여 점차 거칠어지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 대응하여 철학자들이 취했던 서로 아주 다른 방향들에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137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는 5,600년 이상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며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지닌 놀라운 폭과 그러한 철학의 폭에 자양분이 된 도시국가 세계는 알렉산드로스의 승리 및 죽음과 더불어 갑작스러운 종말을 맞이하였다. 정치적인 철학도 종말을 맞이하였다. 


138 그리고 우주론은 그들의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각각 기원전 325년과 기원전 322년) 후에, '(그리스 문화를 따르는) 헬레니즘' 세계는 대부분 윤리학의 문제에 몰두하였다. '학파의 번성 역시 괄목할 만한 현상으로서, 이러한 현상은 중세 전체에 걸쳐 철학을 지배하였으며 현대의 철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철학은 팀 스포츠 같은 것이 되었으며 동시에 좋은 삶에 대한 추구가 되었다.


138 헬레니즘 시대의 또 다른 두드러진 특징은 세계주의와 보편주의였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리스의 강제적인 통일과 이집트와 페르시아의 정복에 기인하였다.


138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동방에서 온 종교들이 뒤섞이면서 그리스인들의 사고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 뒤에는 로마인들의 사고에도 영향을 주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이 만나는 곳이었다. 철학자 필론(기원전 15년 ~ 서기 45년, 그리스어를 사용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은 그리스 고전 철학과 히브리 예언자들의 가르침인 『구약 성 서』를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이다.


139 아테네로 되돌아가보면, 헬레니즘 철학은 많은 학파들을 융성하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에피쿠로스학파도 포함되어 있다. 에피쿠로스(기원전 341 ~ 270년)는 데모크리토스의 추종자로서 별로 신통치 않은 원자론자이자 에피쿠로스주의(쾌락주의)의 창시자였다.


139 그의 주된 관심사는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즉 아타락시아(ataraxua, 평정심)이었다. 에피쿠로스는 현자는 가장 나쁜 상황에서도 삶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은 고문을 받을 때조차 행복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고통은 결코 영원히 지속 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141 두 번째의 중요한 헬레니즘 학파인 스토아학파는 그리스 로마 철학에서 단일 철학으로는 가장 성공적이었고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일부 스토아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직후에 등장했는데, 특히 스토아학파의 제논(기원전 335 ~ 264년)과 그 뒤를 이어 나타난 크리시포스(기원전 280 ~ 206년)가 있다. 이후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로마제국의 전성기와 붕괴기에 활동했다. '인생은 험난하다'라는 그들의 주제는 노예였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서기 55 ~ 135년)같이 몰락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절정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스토아 철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서기 121 ~ 180)는 로마의 황제였다.


143 스토아 철학은 극단적인 철학이지만, 어렵고 혼란한 시대에는 많은 영혼에 봉사할 수 있는 철학이었다. 그리하여 로마와 로마제국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실제로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의 옹호와 비이상적으로 보이는 세계 속에서의 더 큰 합리성에 대한 통찰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 의해 채택되어 그리스도교 철학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었다.


143 마지막으로, 이보다 더 극단적인 철학인 회의주의가 나타났다. 이 철학은 피론(기원전 360 ~ 272년)에서 로마의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서기 3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피론은 어떤 것도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평온으로 가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그가 아타락시아를 이상으로 삼은 사상을 인도로부터 가져왔을 것이라는 점은 지적해둘 만하다) 여러 세대의 회의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에피쿠로스도 확실히 그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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