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야기I,II | 02 세계질서에 대한 탐구-고대 철학
- 강의노트/라디오인문학外 2013
- 2016. 6. 12.
일시: 철학이야기I: 2008년 04월 07일 ~ 07월 28일, 철학이야기II: 2008년 09월 22일 ~ 12월 29일
교재 : 로버트 솔로몬 외(지음), 《세상의 모든 철학》, 이론과실천
+ 강의 내용을 필사하지는 않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책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여 올린다.
04강 04/28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3 - 다원론자들/소피스트의 등장/소크라테스
05강 05/19 플라톤 - 형이상학자 혹은 숭고한 해학가?
06강 05/26 철학자 중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각주
07강 06/02 험난한 시대 - 스토아 철학, 회의주의, 에피쿠로스의 철학/고대 인도의 신비주의와 논리학
04강 04/28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3 - 다원론자들/소피스트의 등장/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3-다원론자들
05강 05/19 플라톤 - 형이상학자 혹은 숭고한 해학가?
06강 05/26 철학자 중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각주
철학자 중의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
116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로서 자신이 거부한 스승의 형상론과 자연스럽게 관계되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학생의 학생'으로서 또한 스승의 덕 개념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여기서 스승의 이론에 진심으로 동의하였다.
116 그리하여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속에서 굳건히 지상에 발을 딛고 있는 '일원론적 세계'의 철학을 발견하게 된다.
118 철학의 역사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숙명적인 대결 관계로 기술해왔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이자 20년 동안의 벗인 플라톤과 전면적으로 결별할 생각이 결코 없었다. 사물들의 형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는 사물의 형상은 역시 그 사물 안에 있으며, 그 사물 너머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119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저 너머에 도달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감각적 경험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현실적 상태를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사물의 현실태가 아니라 잠재태(사물이 그렇게 될 수 있고 그렇게 될 것)이다.
120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심사상(이는 이를 그렇게 강조하지는 않았던 플라톤과 사실상 같은 입장을 견지한다)은 목적론으로, 이는 사물들의 목적성을 뜻한다.
121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는 우주창조론이 없다. 그는 우주가 영원히 존재해 왔으며 따라서 우주에는 시초가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사물의 잠재태와, 이 잠재태를 규정하고 이끌 내적 원리에 대해 설명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플라톤에게 개별 사물들을 규정하는 형상은 그 개별 사물들과 완전히 구분되었던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물들의 형상은 바로 사물의 가능성을 인도하는 내적 원리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때로 무한히 많은 개체들에 관여하는 하나의 형상이 있다고 말했던(이것은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에 '일자와 다자[혹은 다자 속의 일자]' 문제로 불리곤 하던 것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궁극적 존재하는 것은 이 말, 이 나무, 이 사람 같이 개별적인 사물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의 세계 같은 초현실은 없으며, 이 세계의 개별 사물들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122한 사물의 모든 특성들이 똑같은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어떤 특성들은 본질적인 것으로서, 그 실체를 실체답게 만드는 결정적인 특성이다. 다른 특성들은 '우연한' 특성들로서, 우발적이고 비 본질적인 특성들이다. 소크라테스가 머리카락을 잃었어도, 그는 여전히 소크라테스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개구리가 되었다면 개구리는 소크라테스가 아닐 것이다. 한 사물의 본질은 그 사물일 수 없는 것은 제외되고, 그 사물을 그것답게 만드는 특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123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중에 (찬양되지 않는) '철학자의 신'으로 불리게 될 개념을 선보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을 하나의 물질적 원리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주를 처음으로 움직이게 하는 '최초의 원인'으로서, 18세기의 '이신론(理神論)자들'의 신과 같다. 신은 존재에게 불현듯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항상 그렇듯이, 이러한 개념은 무엇보다도 목적론적이다. 모든 활동은 하나의 목적(텔로스, telos), 즉 그 최종적인 이상을 갖는다. 이것은 존재의 세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활동 자체의 내부에 존재 한다. 그럼에도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후의 그리스도교적인 신의 개념에 아주 훌륭한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다. 우주 자체의 궁극적인 목적, 즉 그 자체 내에 존재하며 질료와는 별개의 유일한 형상은 바로 신이다. 신은 부동의 원동자로서, 별들과 행성들이 궤도를 유지하며 우주 속에서 삶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124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 서로 다른 '원인들'을 구분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원인'이란 하나의 설명적인 원리로서 '이유(reason)'이자 '왜냐하면(because)'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원인은, 즉 다소 즉각적이고 대체로 물리적인 원인은 이들 네 가지 원인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네 개의 원인들은 다음과 같다. 사물을 구성하거나 움직이게 하는 물질인 질료인, 사물의 형태, 청사진, 본질, 발전을 인도하고 설명해주는 내적 원리로서의 형상인, '그것을 위한' 목적 곧 텔로스인 목적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원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움직이게 하거나 멈추게 하는 즉각적인 계기 또는 추진력으로서의 동력인.
125 목적인은 과학에서는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리고 아마도 바로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근대의 사고와 가장 두드러지게 다르며, 이는 단지 용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128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그의 윤리학과 정치학에 실천적으로 적용되었다. 엄밀히 말해서 윤리와 정치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핵심인 좋은 삶은 그의 정치학의 핵심인 좋은 사회에의 참여를 요구한다.
129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엄밀히 말해서 목적론적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목적'에 의해 규정된다. 사람들은 목적을 갖고 있다. 우리는 즉각적인 목적들을 갖고 있지만, 또한 궁극적인 자연적 목적도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후자의 목적은 일반적으로 '행복'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잘 지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행복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인 에우다이모니아는 종종 '잘 지내는' 혹은 '번창하는'이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행복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그리고 그것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들(특히, 이성과 덕)에 대한 분석이다.
134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그 자신이 해결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중요한 난제를 지적해두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이 분석을 시작하면서, 행복한 삶이란 활동적인 삶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이런 활동들 중의 하나로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실상 가장 중요하고도 신성한 활동은 관조(사유, 반성, 철학)라고 언급하였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보다도 관조하는 삶을 찬양하였다. 관조하는 삶은 가장 거룩한 삶이며 그리고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에게 즐거이 기대할 수 있는 종류의 유일한 불멸성을 주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134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술하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조화로운 삶이란 것은 당시의 그리스 도시국가에 대한 정확한 서술인 동시에 향수(鄕愁)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전쟁에 의한 황폐화, 아테네와 다른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으로 편입된 것, 정직과 충성심과 가족적 가치 등 전통적인 규범의 몰락,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의 영광을 기울게 했다. 후에 (철학자이자 고전학자였던) 니체가 주장했듯이 소크라테스,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데카당파들, 즉 이미 빠르게 쇠퇴하고 있던 사회의 대변인들이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들이 그의 윤리학에서 허겁지겁 움켜쥔 부분이 관조하는 삶이라는 이상론(理想論)임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인간 본성의 가장 본질적이고도 신성하기까지 한 특성으로 고양되었던 사심없는 이성이라는 이상은 사실상 이후 전 세기에 걸쳐 서양의 전통을 지배하게 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각주
135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주장에 따르면, 서양 철학 전통 전체는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한 것이다. 좀더 관대하게 말하자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쟁을 정교하게 확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플라톤은 사변적이고 암시적이며 시적이다. 그의 알려진 저작들은 연극과 철학에 관한 것들이다. 궁극적 이상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는 커다란 비밀처럼 반쯤 감추어진 채로 남아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저한 과학자로서, (지금은 유실되었지만) 그가 대화록을 썼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아는 그의 저작은 다소 무미 건조하고, 명쾌하면서 조심스러우며, 완전히 분석적이어서 사변적인 경우는 드물다. 물론 우리는 플라톤에게서 많은 암시적인 분석과 논의를 볼 수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굉장한 철학적 통찰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방식과 본질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차이는 서양의 전통 전체에 걸쳐 서로 뒤섞여 있는 서로 다른 두 기질을 보여준다.
07강 06/02 험난한 시대 - 스토아 철학, 회의주의, 에피쿠로스의 철학/고대 인도의 신비주의와 논리학
험난한 시대 - 스토아 철학, 회의주의, 에피쿠로스의 철학
137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은 여러 학파 간에 경쟁하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그러한 경쟁은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움 사이뿐만 아니라, 새로 생겨난 경쟁적인 학파들 사이에서도 있었다. 철학이 이론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철학들이 우선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인간의 기본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37 여기서 우리는 이들의 발전을 더듬어 가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그리스 도시국가의 붕괴, 야심적인 군주들 사이의 무의미한 전쟁들, 이집트에서의 박해와 학살, 로마의 침략으로 인한 그리스의 황폐화 및 대제국의 두드러진 퇴폐와 쇠퇴 등을 포함하여 점차 거칠어지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 대응하여 철학자들이 취했던 서로 아주 다른 방향들에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137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는 5,600년 이상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며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지닌 놀라운 폭과 그러한 철학의 폭에 자양분이 된 도시국가 세계는 알렉산드로스의 승리 및 죽음과 더불어 갑작스러운 종말을 맞이하였다. 정치적인 철학도 종말을 맞이하였다.
138 그리고 우주론은 그들의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각각 기원전 325년과 기원전 322년) 후에, '(그리스 문화를 따르는) 헬레니즘' 세계는 대부분 윤리학의 문제에 몰두하였다. '학파의 번성 역시 괄목할 만한 현상으로서, 이러한 현상은 중세 전체에 걸쳐 철학을 지배하였으며 현대의 철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철학은 팀 스포츠 같은 것이 되었으며 동시에 좋은 삶에 대한 추구가 되었다.
138 헬레니즘 시대의 또 다른 두드러진 특징은 세계주의와 보편주의였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리스의 강제적인 통일과 이집트와 페르시아의 정복에 기인하였다.
138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동방에서 온 종교들이 뒤섞이면서 그리스인들의 사고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 뒤에는 로마인들의 사고에도 영향을 주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이 만나는 곳이었다. 철학자 필론(기원전 15년 ~ 서기 45년, 그리스어를 사용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은 그리스 고전 철학과 히브리 예언자들의 가르침인 『구약 성 서』를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이다.
139 아테네로 되돌아가보면, 헬레니즘 철학은 많은 학파들을 융성하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에피쿠로스학파도 포함되어 있다. 에피쿠로스(기원전 341 ~ 270년)는 데모크리토스의 추종자로서 별로 신통치 않은 원자론자이자 에피쿠로스주의(쾌락주의)의 창시자였다.
139 그의 주된 관심사는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즉 아타락시아(ataraxua, 평정심)이었다. 에피쿠로스는 현자는 가장 나쁜 상황에서도 삶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은 고문을 받을 때조차 행복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고통은 결코 영원히 지속 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141 두 번째의 중요한 헬레니즘 학파인 스토아학파는 그리스 로마 철학에서 단일 철학으로는 가장 성공적이었고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일부 스토아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직후에 등장했는데, 특히 스토아학파의 제논(기원전 335 ~ 264년)과 그 뒤를 이어 나타난 크리시포스(기원전 280 ~ 206년)가 있다. 이후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로마제국의 전성기와 붕괴기에 활동했다. '인생은 험난하다'라는 그들의 주제는 노예였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서기 55 ~ 135년)같이 몰락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절정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스토아 철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서기 121 ~ 180)는 로마의 황제였다.
143 스토아 철학은 극단적인 철학이지만, 어렵고 혼란한 시대에는 많은 영혼에 봉사할 수 있는 철학이었다. 그리하여 로마와 로마제국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실제로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의 옹호와 비이상적으로 보이는 세계 속에서의 더 큰 합리성에 대한 통찰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 의해 채택되어 그리스도교 철학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었다.
143 마지막으로, 이보다 더 극단적인 철학인 회의주의가 나타났다. 이 철학은 피론(기원전 360 ~ 272년)에서 로마의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서기 3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피론은 어떤 것도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평온으로 가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그가 아타락시아를 이상으로 삼은 사상을 인도로부터 가져왔을 것이라는 점은 지적해둘 만하다) 여러 세대의 회의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에피쿠로스도 확실히 그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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