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야기I,II | 06 과학과 종교 사이-근대 철학과 계몽사상


세상의 모든 철학 - 10점
로버트 솔로몬 외 지음, 박창호 옮김/이론과실천



강유원: 철학이야기I,II | 2008

일시: 철학이야기I: 2008년 04월 07일 ~ 07월 28일, 철학이야기II: 2008년 09월 22일 ~ 12월 29일

교재 : 로버트 솔로몬 외(지음), 《세상의 모든 철학》, 이론과실천


강의 내용을 필사하지는 않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책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여 올린다.


철학이야기 II

23강 11/10 칸트

24강 11/17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헤겔 

25강 11/24 헤겔




이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이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이마누엘 칸트, 《판단력비판》

요한 피히테, 《독일 국민에게 고함》

프리드리히 실러,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



23강 11/10 칸트

임마누엘 칸트-과학을 구출하기

362 독일로 되돌아가보면, 독일인들은 계몽사상을 약간의 의혹을 가지고서 환영하였으며, 프랑스혁명을 (안전한 거리를 두고서) 공포심을 가지고 보았다. 계몽사상은 정확히 보아 하나의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철학이라기보다는 런던과 파리에서 지배적이던 사상, 즉 어느 정도 지적 제국주의의 투사로 볼 수 있겠다. 파리의 혁명은 철학의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혼돈의 분출로 보였다. 혁명의 열매가 독일인들에 심각한 영향을 주게 되기까지는 10년 이상이 걸렸다. 


362 흩어지고 분열되어 있던 독일로서는 방어적일 만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는 아주 오랫동안 야만적이고 이류의 것으로 취급되었다. 예술은 주로 수입되었다. 지방의 젊은이들은 종종 무시되었다. 심지어 프로이센의 왕조차 주로 프랑스어를 썼다! 독일에서는 과학과 보편적 합리성으로부터 태어난 새로운 이상들이 일반적으로 부차적인 역할 밖에는 수행하지 못했다.


362 그렇지만 최고의 계몽주의의 철학자들은 독일인이었다. 


362 최고의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는 임마누엘 칸트(1724~1804년)로서, 그는 라이프니츠의 제자(크리스티안 볼프)의 제자이자 동시에 뉴턴의 물리학과 사회와 교육에 관한 루소의 급진적인 새 이론에 대한 열광적인 추종자였다. 


362 그가 데이비드 흄의 회의론을 만나면서 시작된 또 다른 혁명이었다.


363 흄의 회의론은 칸트를 '독단의 잠', 즉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의 무비판적 수용에서 깨어나게 했다. 칸트는 다른 모든 것들 중에서도 흄의 회의론에 답하고자 하였으며, 따라서 계몽사상을 계몽사상 자신의 끊임없는 의문으로부터 구해내었다.


363 칸트 역시 이성의 힘과 동시에 그 한계를 인정하였다. 그의 최고의 철학적 작업은 이성과 판단에 관한 세 개의 위대한 '비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363그는 진정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추론되거나 혹은 이성에 의해 발견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거부하였다.


363 칸트는 루터교회 경건파의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으로서, 그의 신앙은 흔들릴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아이작 뉴턴의 새로운 물리학에 대한 확고한 신봉자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364 인간의 자유와 도덕적 의무와 더불어, 신의 영역과 인간 영혼의 불멸성은 과학과 타협되지 않는다.


365 그는 인과관계와 과학적 설명도구를 통해서 외부세계의 필연적 존재를 증명하였다. 도덕에서 그는 도덕률에 대한 보편적 의무를 확립하여 이를 '정언명령'으로 불렀으며, 이것의 선결 조건인 인간의 자유와 이성적 종교에 대한 기본적 믿음도 확립하였다. 


365 오성의 개념 없이는 우리의 직관은 맹목적이 된다. 하지만 감각 없이는 우리의 개념은 공허해진다고 그는 말한다. 경험이란 언제나 감각들에 대한 오성의 적용이며,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계는 바로 그 결과이다. 


365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과 더불어 시작되지만 (그리고 감각에 기초를 두지만), 우리 경험의 기본 범주들은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을 구성하는 선험적 원리로서 경험에 작용한다.


368 또한 칸트의 자아 개념 문제도 있다. 그는 이 세계가 우리의 경험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만, 이 세계의 사물들이 우리의 경험 안에, 즉 '우리 안에' 있다는 점 역시 부정한다. 사물로서의 그것들의 본성에 의해, 그것들은 자아 밖에 있다.


368 자아는 하나의 사물, '영혼' 또는 하나의 '정신'이 아니라 초월적 자아이다.


369 초월적이고 경험적인 자아 외에 우리가 대충 '자아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있다. 이것은 동작의 주체로서 행동하는 자아이고, 심사숙고하고 행동하는 자아이며,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책임이 있거나 없는 자아이며, 또 실천적인 세계의 한가운데에 살고 있는 자아이다.


칸트의 도덕철학과 세번째 비판

370 우리 각자는 자연계의 일부로서, 즉 경험적 자아로서 인과적 영향에 지배를 받는다. 이런 영향은 욕망, 기분, 정서적 욕구, 그리고 감정들 속에 잘 나타나 있는데, 칸트는 이것을 묶어서 '경향'으로 불렀다. 


371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이러한 도덕법칙에 따라서 행동할 때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정확하게 명시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가 단순히 자연의 인과적 명령에 따를 때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372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도덕률을 인식하기 위하여 신앙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도덕률에 복종하게 하는 합리적 동기를 부여하는 데 신앙은 꼭 필요하다.



24강 11/17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헤겔 

역사의 발견-헤겔

376 종종 헤겔이 철학의 기획에 새로운 하나의 차원, 즉 역사를 덧붙였다고 한다.


376 헤겔 철학의 결론은 비록 때로 '절대'라는 오만한 언어로 표현되기는 하였으나, 일종의 커다란 철학적 겸손과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어떤 것의 부분이라는 자각을 동시에 제시하는 것이었다. 지식과 진리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인 기여는 결코 최종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언제나 불완전하고 '간접적이며', 부분적이다.


376 칸트의 뒤를 따랐던 독일의 철학자들은 자신들을 관념론자들이라고 불렀다.


376 칸트가 아직 살아있던 18세기말에 십수 명의 젊은 철학자들이 칸트의 진정한 후계자가 되기 위해 서로 다투었다. 이들 중 두드러진 인물은 요한 피히테(1762~1814년)와 헤겔의 대학 친구인 프리드리히 셸링(1775~1854년)이였다. 


376 '체계'(system)라는 개념은 칸트로부터 왔다. 


378 '칸트의 체계를 완성한다'는 생각이 새로운 세기로 전환되는 시기의 철학을 지배하였다.


378 헤겔은 젊었을 때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어떤 종교적 영감도 받지 않은 듯했다.


379 1807년 헤겔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장 위대한 저작이라고 말하는 첫번째 저작인 『정신 현상학』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가장 기초 개념에서부터 가장 포괄적이고 복잡한 개념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이끄는 장대한 구상의 대여정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목적은 진리, 즉 '절대'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지만, '절대'라는 용어는 '최종의 완성된'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진리'라는 용어 또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헤겔이 추구했던 것은 하나의 포괄적인 전망이며, 이것은 지식의 본성에 관한 다양한 철학적 이론들뿐만 아니라 종교, 윤리학, 예술 그리고 역사 등의 분야도 포함한다.


379 『정신 현상학』의 중심 관심사는 '정신'(Geist)의 본성으로서, 이것은 우리 모두와 모든 자연을 포괄하는 우주적 영혼이다.


380 헤겔은 지식은 발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380 의식 역시 비시간적인 것이 아니며, 의식이란 그로부터 혹은 그 속에서 우리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는 초월적인 조망 같은 것만도 아니다. 의식도 성장한다. 의식은 새로운 개념들과 범주들을 발전시킨다. 의식은 자신이 하나의 '의식 형태'와 다른 의식 형태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음을 발견하며 그 둘을 조화시키거나, 또는 어쨌든 그 둘을 넘어서는 것을 배운다. 의식과 지식은 모두 역동적이다.


380 헤겔은 『정신 현상학』의 시작 부분에서 그가 감각의 확실성이라고 부르는 지식을 이해하는 능력인 '상식'에 대해 고찰한다.


381 헤겔은 지식에 관한 그러한 개념화가 완전히 부적절하며, 더욱 포괄적이고 정교한 개념화에 의해 대체될 필요가 있음을 논증한다. 이러한 더 포괄적이서 정교한 개념화는 우리의 모든 지식이 실은 간접적이라는 사실, 즉 개념에 의해 걸러지고 부분적으로는 감각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381 지식은 그 자체가 불충분하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경쟁하는 일련의 범주들을 가진다고 가정해보자고 헤겔은 제안한다.


382 헤겔은 더 나아가 자아란 사회적으로, 즉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였다.


382 헤겔은 우선 자아란 내성(內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상호 인정을 통해서 발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383 우리는 여러 가지 철학적 전략을 통해서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거나 혹은 피할 수 있는 길로 인도된다(스토아 철학, 회의주의, 금욕주의, 그리고 몇몇 형태의 그리스도교).


384  『정신 현상학』이 서론에 불과하였던 헤겔의 철학 체계는 그의 『논리학』에서 계속된다. 이것은 형식적이고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논리학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 '생성' 및 '무'와 같은 기본적인 철학 개념들의 상호관계와 '연역'에 관한 체계이며 지식에서의 개념의 역할과 상호작용에 관한 광범위한 논의에 관한 체계이다.


384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첨예하고도 의심스러운 철학적 구별은 맥락에 따라 바뀌는 하나의 대립쌍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로 이 작업의 전체적인 요점은 궁극적으로 객관적인 실재와 지식으로부터 주관적인 경험을 구별할 것을 주장하는 근대 철학의 움직임이 무익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점은 사실상 현대 물리학의 성과에 의해 오늘날 확인되고 있다.


385 헤겔의 요점은 개인에 관한 우리의 개념이 아주 특별한 종류의 사회, 즉 그가 '시민사회'라고 불렀던 사회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헤겔이 영국의 정치경제학자들, 특히 애덤 스미스의 책들을 열광적으로 읽었던 사람이라는 점을 언급해 두어야 하겠다.) 그의 요점은 개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중요성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정황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25강 11/24 헤겔

철학과 시-합리주의와 낭만주의

387 새로 등장한 독일 정신의 옹호자는 칸트가 아니라 요한 헤르더(1744~1803년)라는 시인이었다. 그는 철학자이기도 하였다(그리고 우리는 철학과 시인의 차이를 과장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기질이 다른 철학자였다. 칸트와 계몽사상은 '세계주의'와 보편성을 주장하였다. 헤르더는 젊었을 때도 그러한 철학이 자신에게는 '고향이 없는' 느낌을 준다고 불평하였다. 그에게는 독일 문화와 특히 독일 사상이 세계 무대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387 이성에 대한 옹호자인 칸트와 계몽사상가들과 달리, 헤르더는 감정과 즉각적인 경험 혹은 감각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감정을 통해서 세계와 하나가 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력'을 인지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객관성과 지식을 추구하는 가운데 의식을 통해서 또한 가장 중요하게 언어를 통해서 그런 본래의 통합을 반성적으로 단절시킨다.


388 세계로부터 의식을 반성하고 개념화하여 구별하는 우리의 능력이 우리를 '해방된' 최초의 신의 창조물이게 한다고 헤르더는 주장하였다. 하지만 반성적인 삶은 한정된 삶이다. 감정에 따른 삶, 즉 시에 의해 포착된 질풍노도는 (단지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만이 아니라) 전인적 인간이 되고 세계와 하나가 되는 데 필요불가결한 것들이다.


388 그는 또한 '더욱 높은 차원에서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낭만주의의 결정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이는 곧 불일치와 갈등을 넘어서는 통일, 특수성을 벗어나는 보편성, 일상적 삶의 복잡성과 혼란으로부터 발산되는 신과 절대적인 것을 가리킨다.


389 이성의 승리라는 말로 인해 헤겔은 낭만주의 진영에 어정쩡하게 위치하게 되었다.


389 그러나 헤겔은 자신이 낭만주의자들에게 빚을 진 점과 그들의 중요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한때 친구였으나 곧 라이벌이 된 프리드리히 셀링이 분명 이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계몽사상과 낭만주의 가 모두 '지나치게 제한적이고'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389 합리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 모두 그 사상을 칸트에 기반을 두고 있다.


389 그보다는 세 번째 비판서의 칸트였는데, 세번째 비판서인 『판단력 비판』은 미적 판단, 세계의 합목적성을 다룬 저작으로서 낭만주의자들을 매우 고무시켰다.


390 당시의 탁월한 시인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년)였다.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시대의 대변자일 뿐만 아니라, 독일의 정신과 자아상을 가장 잘 표상하고 있기도 하였다.


390 괴테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문학적으로 필적하는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년)는 칸트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칸트에 대해 통달해 있었다. 그는 (거의 동시대인이던) 헤겔처럼 자신을, 그가 칸트 철학에서 부적절하게 본 것에 대한 '교정자'로 여겼다. 그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에서, 실러는 칸트가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과, 세번째 비판에서 미를 찬양한 것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덕성을 기르는 길은 실천 이성의 추상적 규칙들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과 미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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