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하르트만: 독일 관념론 철학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7. 2. 16.
독일 관념론 철학 - 니콜라이 하르트만 지음, 이강조 옮김/서광사 |
옮긴이의 말
제1부 피히테,셸링,낭만주의
서언
서론
Ⅰ장 : 칸트학도와 반칸트학도
Ⅱ장 : 피히테
Ⅲ장 : 셸링
Ⅳ장 : 낭만주의 철학
부록 : 독일관념론의 주요 저작 연대표
참고문헌
제2부 헤겔
서언
Ⅰ장 : 헤겔의 철학 개념
Ⅱ장 : 정신 현상학
Ⅲ장 : 논리학
Ⅳ장 : 논리학의 토대 위에 세워진 체계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6 18세기 말에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근대의 독단적-질료적 관념론에 대하여 비판적-선험적 관념론이 수립되었다. 이것은 표상 배후의 존재, 즉 물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우리의 인식 형식을 주관적인 것으로 보고 우리에게 가능한 경험의 대상을 모두 현상으로 본다. 뿐만 아니라, 인식 형식의 선천성을 증명함으로써 인식의 보편 타당성을 정립하였다. 이 비판적-선험적 관념론을 설명하는 칸트의 비판주의 철학은 근대 자연과학 정신의 자기 비판일 뿐만 아니라, 이 비판을 통해서 르네상스 이래의 인간성의 이념을 개념적으로 자각한 것이다.
6 칸트 이후 칸트 후학들에 바로 이어서 피히테, 셀링 그리고 헤겔에 의해서 전개된 독일 관념론은 이렇게 자각한 인간성의 이념을 대담하게 사변적 정신으로 완성시킨다. 그리하여 독일 관념론에 있어서는 칸트의 인식론적 색깔은 흐려지고 유심론적-이상주의적 색깔이 강하게 나타난다.
6 칸트 철학에서 인정되는 물자체를 비판하고, 실천 이성의 우위의 사상을 철저히 규명한 결과로 사행으로서의 자아를 유일의 실재로 보고, 세계는 이 자아가 활동할 수 있기 위하여 자아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피히테의 철학은 윤리적 및 주관적 관념론이라 불린다.
7 피히테에 의하면 대상이란 본래 어떤 작용에 대립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대상은 어떤 작용, 활동을 전제한다. 이 활동 없이는 대상은 성립될 수 없다. 이론적 자아에 대한 대상은 자아가 활동함에 있어서 대상에 의해서 저지되는 데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활동하는 자아의 본성은 대상에 의해서 가로막히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를 뚫고 나가려 하는 데 있다. 그것은 자아의 무한한 순수 활동성이다.
7 자아는 자기 자신을 절대로 정립하려 한다. 자신을 절대적으로 내세우려는 자아의 이 활동을 피히테는 사행이라 부르고, 그러한 자아를 절대적 자아라고 한다. 유한한 개인도 그것이 자아인 한, 본성상 무한한 자아를 이념으로 삼고 활동하는 것이다.
7 피히테는 유한한 자아에 대한 대상의 성립 근거를 비아를 절멸코자 하는 자아의 활동성에서 구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한갓된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상을 한정하려는 태도이다. 이 태도는 실천적 자아의 활동성에서 나온다. 여기서 실천적 자아의 활동성은 이론적 자아의 가능성의 근거가 되고, 그리하여 칸트에 있어서 성취되지 못했던 이론적 자아와 실천적 자아의 통일이 이루어진다.
8 실천적 자아를 우위에 둔 피히테의 철학은 자연히 윤리적 성격을 띤다. 실천적 자아의 목표는 절대적으로 자신을 정립하려는 절대적 자아의 활동을 지향하는 것이므로, 이 목표에의 도달은 자연히 당위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피히테의 철학은 윤리학적 관념론이라 부른다.
8 그리고 피히테의 자아 철학에 객관성을 보충함으로써 자연철학을 확립하고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를 통하여 동일철학에까지 도달한 셸링의 철학은 객관적 관념론이라고 한다. 피히테는 이론이성을 실천이성에 종속시킴으로써 칸트 철학에 결여되었던 체계적 통일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근저에 절대적 자아를 둠으로써 가능하였다. 그런데 이 절대적 자아는 유한한 인간의 자아가 아니라, 순수한 자기 정립에서 일체를 창조하는 자아이다. 따라서 이 절대적 자아란 궁극적으로는 오히려 절대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피히테의 절대적 자아의 철학은 자아와 비아를 함께 포괄하는 절대자의 철학으로 되고 만다. 이곳으로 나아간 것이 셸링의 철학이다.
8 셸링은 자아와 비아, 주관과 객관, 정신과 자연에 똑같은 의의를 인정하고, 이 양자의 근저에 절대자를 예상하여, 이것을 지적 직관으로 파악코자 한다. 절대자는 정신과 자연, 주관과 객관의 공통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 자체에 있어서는 주관, 객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는 완전한 무차별자요, 절대적 동일성이다. 이 동일성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그의 철학을 피히테의 주관적 철학에 대비하여 객관적 관념론이라고 부른다.
9 셸링은 정신의 영역에서도 이론적, 실천적 및 심미적 전상을 둔다. 셸링에 있어서는 심미적 활동성은 의식적인 동시에 무의식적이다. 예술가의 창작 활동은 의식적으로 수행되지만, 창작된 작품 속에는 예술가가 창작하고자 한 것 이상의 어떤 것이 포함된다. 천재에 있어서는 그 자신 이상의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무의식 중에서도 영원한 것, 무한한 것을 그의 작품 속에 창작하게 한다. 이 점에서 심미적 활동성은 실천적 활동성보다 우월하다. 실천적 활동은 언제나 이념을 구하여 전진할 뿐, 결코 완성됨이 없는데, 심미적 활동에 있어서는 무한한 것이 완전한 모습으로 작품 속에 표현되기 때문이다. 예술이야 말로 절대자의 완전한 계시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셸링의 관념론은 심미적 관념론이 된다.
9 이 셸링 철학의 방법적 기초를 자각하여 논리화함으로써 모든 세계를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자기 전개로서 파악한 헤겔의 철학은 논리적 관념론 또는 셸링의 체계적 객관성을 거쳤다는 의미에서 피히테의 주관성을 극복한 것으로 보아 절대적 관념론이라고 한다.
제1부 피히테,셸링,낭만주의
서언
19 관념론은 사상적인 추진 작용 그 자체의 특수한 형식이다. 그리고 이 형식은 칸트로부터 헤겔에 이르는 시대의 지배적인 형식이다. 모든 문제 내용은 이러한 철학자한테서는 다소간에 관념론적 형식을 따른다. 그러나 이 문제 내용 자체는 결코 그 때문에 관념론적인 것은 아니다. 이 문제 내용이 여기서 겪게 되는 취급 방법은 그 자체로서는 이 내용들이 저장 되어있는 이론들의 완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늘날 여전히 순전히 관념론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은 물론 보다 쉽게 이 관념론적인 이론에 접근할 것이다. 그의 사유 작용은 바로 관념론적 사상가들의 사유 형식을 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사상가들의 사유 작업의 문제 내용은 그 자체로서 체계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보다 더 큰 연관에 속한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보다 더 큰 연관을 겨냥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철학적 견해뿐만 아니라, 관점상으로 적대적인 입장에 서 있는 철학적 견해에 대해서도 명백히 드러나게 되지 않을 수 없고, 또 효과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연관이다.
서론
23 독일관념론의 사상가들이 그들의 깊은 차이, 아니 의식적인 대립과 쟁점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무리로 통일될 수 있는 것은 우선 공통적인 문제 상황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칸트 철학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데 이 철학의 무진장한 풍요로움이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항상 다시 불러 일으킨다. 그들은 각기 칸트 철학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이 철학이 지닌 현실적 또는 외견상의 결함을 극복하려 하며, 이 철학의 잔여 문제들을 해결하고, 또 착수된 그 과제들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그들 모두가 갖고 있는 공통의 목표는 최후의 명백한 토대 위에 기초하고 있는 포괄적이며 엄밀하게 통일적인 철학 체계의 창출이다. 모든 사상가들 앞에 저 "미래의 형이상학"의 이상이 떠올랐고, 칸트의 강력한 사유의 노력이 처음으로 그 서설을 제공했다. 그들은 칸트가 그의 후기의 두 비판에서 이 형이상학을 이미 개설적으로 구상했다는 사실을 전연 간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설은 그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체계는 완전하고 확실하게 철학의 이념을 충족시키면서 성립되어야 한다. 사상가들이 이 이상적인 체계를 구하는 방향은 제각각이었고, 그리하여 사실상으로 제각기 다른 새로운 기도에 대응해서 서로 다른 체계가 생겨난 것이다.
24 따라서 우리는 위대한 관념론자들의 이 공통점을 주저하지 않고 체계를 만들려는 통일적인 충동이라고 특징 지을 수 있다.
25 칸트 이후의 초기 사상가들은 아직도 칸트 이론의 개조보다는 그 참된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 우선 그와 같은 이해가 모자랐다는 사실은, 순수이성 비판의 탐구가 난해했다는 점에서 보면 놀랄 일은 아니다. 사라져 가는 계몽 시대를 지배하던 통속 철학은 이 과제를 감당할 수 없었다. "상식"이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은 상식에게는 역설적인 것으로서, 뿐만 아니라 상식 본래의 권위에 대해서 위협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지 않을 수 없었다.
Ⅰ장 : 칸트학도와 반칸트학도
31 어떤 위대한 사상이 일단 파악되어서 형성되고 나면, 불붙듯이 무성하게 전파되며, 눈에 띄지 않던 수많은 문제들을 폭발적으로 제기하고, 한 시대의 가장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연구하게 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철학사에서 칸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독일 관념론의 운동에 있어서 칸트의 비판 사상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명백하게 감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운동에서는 우선 본래 생산적, 천재적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 전적으로 자발적인 사람들은 처음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뒤따르는데 반해서 ━ 다름 아닌 의존적이고,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잘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라인홀트, 마이몬, 베크와 같은 칸트의 직접적인 추종자와, 이에 못지 않게 슐체, 야코비와 같은 그의 반대자도 모두 다소간에 대가의 이론을 둘러싸고 논쟁하며, 그리고 이러저러한 형식으로 전적으로 이 이론에 매혹되어 있는 숙련공의 유형을 여전히 나타내고 있다. 최초의 칸트 해석가인 라인홀트가 이 유형을 가장 순수하게 나타낸다. 그는 새로운 사상을 포착하고, 이 사상에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형식을 부여할 줄 알았으며, 자기가 수행한 내용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시도를 행하였다.
Ⅱ장 : 피히테
79 칸트의 가장 내면적인 철학적 관심에 있어서 순수 이성 비판은 단지 하나의 예비작업, 물론 결국 그의 생명력의 대부분을 쏟지 않을 수 없었던 거대한 예비 작업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순수 이성 비판은 그의 최후의 목적, 최고의 관점이 되지 못하였다. 근본적 관점은, 비록 이 관점이 판단력 비판에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표현된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사유 속에서는 변치 않았다.
81 피히테의 철학과 피히테의 인격은 행동하는 인간성이라는 동일한 근본 특징을 나타낸다. 그의 생애는 활동하고 창조하는 정열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의 철학적 노력은 그를 자유의 광신자로 나타내고, 그의 윤리학은 선을 곧바로 활동성 그 자체 속에서, 그리고 악을 나태함 속에서 본다. 칸트의 예지적 자유에 관한 이론은 그에게는 결정론의 악몽으로부터의 구제로 간주된다. 그는 자신의 가장 내면적인 본질이 온갖 정열로써 몰두했던 이 사상을, 일체의 철학을 하나의 통일적인 원리로부터 연역하는 라인홀트의 요청과 통일시키면서, 자기의 체계의 축점을 활동적이고 자유로운 절대적인 자아 ━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고 사행이다 ━ 라고 생각했다.
89 의식 속에는 사실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것, 즉 사행이 있다. 의식은 최종의 근거에 있어서는 작용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성은 실천적이다." 따라서 이성의 본래의 본질은 사실의 성격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주안점은 이론 철학에서 실천 철학으로 옮겨진다. 이 실천 철학만이 최초의 최상의 원칙을 줄 수 있다. 이론적 자아는 비자립적이다. 이론적 자아에게는 비아(이론적 자아의 대상)가 영원히 대립한다. 이론적 자아는, 순수한 관념론이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비아를 자신으로부터 산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비아의 독립성 때문에 자기 자신도 지양하게 될 것이다. 인식 작용은 이 작용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는 인식된 것, 혹은 인식되는 것과 관계있는 바로 그 어떤 것일 뿐이다. 의식의 고유한 이론적 본질은 결코 의식을 이 이원성 너머로 올려놓을 수는 없다. 이 본질은 이원성, 즉 비아에 결부되어 있다.
89 자아는 행위 속에서 창조하면서 또 형태를 만들면서 비아에 간섭하게 되고 자기의 상, 즉 자기의 정신의 목적에 따라서 비아를 변형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비아에 대한 자기의 우월을 표명한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자아는 사실상 산출적이다. 비아의 자아와의 동등한 권리는 여기서는 중지되고 이것과 더불어 이원성이 종말을 고한다. 어디엔가 문제점이 있다면 여기서는 철학의 제1원칙의 통일성이 시작되어야 할 그 점이다.
90 즉 반성이 최종적으로 안내되는 곳은 "나는 존재한다"도 "나는 사유한다"도 아니고, 그것은 오로지 "나는 행위한다"인 것이다. 피히테가 여기서 의식적으로 결부시키는 칸트의 선험적 통각은 그에게는 그것이 인식하는 최상의 원리라는 것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선험적 통각은 실천적 의식의 최상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 전환을 통해서 비로소 선험적 통각의 의미는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99 인과성과 자유의 칸트적 이율배반의 배후에는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의 이율배반이 꽂혀 있고, 이 이율배반 배후에는 다시 비아의 법칙성과 자아의 법칙성의 이율배반이 꽂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피히테의 변증법의 출발점이다.
101 칸트는 의식을 기능적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이러한 세계관의 극복을 향한 의미심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피히테에 있어서는 이러한 세계관이 의식적으로 극복되었고, 그리하여 그 반대로 역전되었다. 즉 기체 없는 순수 기능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기능이 일체의 토대이다. 모든 존재는 행위에 대해서 이차적인 것이고 행위 속에서 행위의 산물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행위 자체의 존재만이 하나의 예외가 된다.
101 존재하는 자아가 행위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는 행위 속에서 외관상으로 실체 같은 것, 즉 자아가 발생한다. 이곳에 데카르트의 "나는 사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 대한 피히테적 출발점의 대립이 놓여 있다.
113 비아가 자체 존재로서 수용하는 자아에 대립하는 반면에, 이성으로서의 자아는, 자아 그 자체가 모든 활동성이고 부여하는 모든 작용이기 때문에, 자아의 외부로부터 어떤 것도 주어질 수 없음을 파악한다. 자아는 오히려 비아가 자아 자신의 산물이요 정립임을 파악하고, 자아는 그의 이론적 관점에서는 자기 자신을 비아를 통해서 규정된 것으로서 정립했음을 파악한다. 이 정립을 자아는 이성 속에서 다시 지양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의식은 철학자의 입장에도 달한다. 철학자는 이제 소박한 의식이 겪는 필연적인 착각의 긴 계열을 폭로하는 바로 지식학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115 "자아는 비아를 규정하는 자로서 자기 자신을 정립한다"는 것이 실천적 지식학의 원칙이다. 이 원칙으로부터 문제의 해결을 얻을 수 있다. 자아의 실천적 태도가 아무 저항 없이 단순히 무한히 진행하는 순수한 활동성 속에 존립한다면 실천적 자아는 절대적 자아와 일치할 것이고, 이때 이러한 상태로부터는 자기 제한의 설명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렇지 않다. 실천적 태도, 행위, 작용은 무제한적 생산이 아니고, 그 어떤 것에 대해 작용함이다. 실천적 자아의 활동성은 노력이다. 그러나 이 노력은 극복이다. 그런데 저항이 있는 곳에서만 극복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또 노력에 대립하는 것, 즉 어떤 저지가 있는 곳, 요컨대 노력에 의해서 획득되는 대상이 있는 곳에서만 노력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122 실천적 지식학은 두 가지의 과제, 즉 자유로운 행위의 윤리학에 토대를 마련해 주고, 또 물적 실재성의 현상에 이론적 관점이 제시할 수 없었던 최후의 기초를 부여하는 과제를 충족시킨다. 실천적 지식학이 이 이중 과제를 너무나 근원적으로, 그리고 통일적으로 충족시키고 있으므로 이 이중 과제는 실천적 지식학에 있어서는 하나의 유일한 과제로 결합한다. 자유롭게 창조하는 것으로서, 또 자기 입법적인 것으로서 증명되는 자아의 동일한 근원적 활동성은 그 창조의 조건으로서 제한 ━ 이 제한의 무반성적 바깥 모습이 실재적 사물의 세계이다 ━ 을 자신에게 부과하기도 한다. 그러나 통일적 이론의 이러한 이중 의미 속에는 서로 제약하기 때문에 포개어 함께 공존하는 관점들의 이원성이 놓여 있다. 즉 그것은 이론적으로 한정된 자아의 실재론 ━ 이 실재론에 있어서 대상의 실재성이 정당하게 존립하고 있다 ━ 과 저 한정을 파괴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회복되는 실천적 자아의 관념론이다.
137 지성은 지성의 근본인 자유로운 능력을 깨닫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본질을 당위로서 파악한다. 신의 참된 도식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존재해야 한다. 의지가 실재적 원리이고, 순수한 능력 ━ 이 순수 능력을 통해서 신의 당위 존재적 형상이 결국 실현된다 ━ 속에 있는 근원적 가능성이다. 이 능력은 "지성적 인식과 직관 또는 실재성이 긴밀하게 삼투하는 동일한 지점이다." "의지는 자신을 꿰뚫어 보며, 또 도덕적 의무를 직관한다. 의지 속에서 능력은 완전히 다 드러나게 되고, 신적 생명의 도식은 현실로 고양된다." 따라서 처음에 그렇게 보였던 것처럼 지가 아니라, 의지가 신의 참된 형상이다. 의지의 사명은 신적인 것을 신적인 것 속에 재현하는 일이고, 우리의 마음 속에서 볼 수 있게 되어야 하는 신적 생명에 대한 완전한 귀의이다.
140 피히테는 여기서도 결코 칸트적 출발점을 놓치지 않는다. 인과적 이율 배반은 칸트에게서는 현상계와 가상계의 구별 속에서 해결된다. 자유는 결코 부정적인 것, 무법칙적인 것 ━ 이런 것은 인과적으로 결정된 세계 속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 이 아니라, 자연법칙을 실제로 능가하고, 자연법칙에 자주적으로 관여하는 유일무이한 합법칙성이다. 왜냐하면 자연법칙은 보다 깊은 근거를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자유의 현상방식은 도덕법칙이다. 제1지식학은 이러한 계획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실천적 자아는 그것의 절대적 자아 속에 보다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이론적 자아를 능가한다. 인과 관계의 세계는 자아에 의한 비아의 정립이고, 자유의 세계는 자아의 보다 깊은 본질, 즉 자아의 작용적 근본 성격 속에서 출현한다.
141 자유는 결코 주어진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과제이다. 자유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사명이다. 따라서 도덕 법칙의 내용은 이 사명을 실현하고, 진실로 자유롭게 하는 그러한 내용일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일은 다시 행위가 모든 외적 목적을 포기하고 행위 자체의 자기 목적일 때만 가능하다. 근본적인 악은 활동의 중단, 즉 나태함이다. 도덕적 충동은 여기서는 "온전한 자아를 향한 충동", 또는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충동"으로 특징지어진다. 순수한 충동은 자연적 충동에 대립한다. 순수한 충동의 명확한 특징은 요구이고, 이에 반하여 자연적 충동의 그것은 동경이다. 후자가 향락을 노린다면, 전자는 일 그 자체를 노린다. 향락의 표준은 쾌와 불쾌이고, 일의 표준은 시인과 부인이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 속에는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자유의 법칙을 인간이 자신 속에 사실상으로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는 시인과 부인의 틀림 없는 법정, 즉 양심이 존재한다. 양심은 직접적인 도덕 감정으로서, 순수한 충동과 현실적 충동 및 절대적 자유의 요구와 그 사실적인 활동 사이의 조화와 부조화에 대한 의식을 표현한다. 양심은 자유의 의식이요, 우리들의 보다 높은 사명의식이다. 그리하여 피히테가 칸트의 정언명법을 "너의 양심에 따라서 하라!"라는 짤막한 공식으로 만들 때, 그것은 이해가 되는 일이다.
162 여기서 피히테가 《자연법》에서 다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 두었던 법의 최후의 정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법의 제도는 특수한 윤리적 명령 역시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엄밀하게 윤리의 원리로부터 요구되고, 윤리 속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법제도는 다만 윤리적인 것의 바로 그 가장 외면적인, 가장 낮은 단계를 형성할 뿐이지만, 이 단계 위에 보다 높고 보다 다면적인 단계가 우뚝 솟아야 한다. 이곳에 강제의 정당화가 뿌리박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는 자유의 의미에 대해서 모순되는 그 어떤 것이다. 도덕률은 절대적으로 강제의 지양을 요구한다.
164 역사철학은 역사학처럼 사실의 탐구가 아니라 모든 인간 사회 ━ 그것이 가장 작고 덧없는 사회이건 또는 가장 크고 보편적인 사회이건 다같이 ━의 생동적인 작용 및 노력에 대한 불가결의 윤리적 방향 설정을 형성하고 있다.
165 인류의 발전에 어떻게 어떤 다른 의도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역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상승, 보다 높은 발전, 진보이어야 하고, 둘째로는 역사 속에서 발전적으로 전개되는 가치 실질은 가장 내면적인 인간 본질의 가치 실질, 즉 이성의 가치 실질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따라서 인류의 지상 생활의 목적을 피히테는 이성에 따라서 자유와의 모든 인간적 관계를 수립하는 곳에서 탐지한다.
169 《독일 국민에게 고함》 ━ 이것은 물론 성공한 작품의 동일한 구성적 일면성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그러나 동일한 위대성도 나타낸다 ━ 이라는 주제는 이상과 같은 역사 이해와 밀접하게 관계한다. 국가 개혁의 사상은 여기서는 어느 국민의 세계적인 사명의 열광으로부터 솟아 나온다. 민족의 쇠퇴로부터 그 민족의 역사적 사명의 실현에로 안내해야 하는 수단은 국민 교육인 것이다. 독일 국민성의 해방은 피히테에게는 국민의 자기 보존의 의무로서뿐만 아니라, 인류에 대한 독일 정신의 의무로서, 즉 역사상의 다른 어떤 민족도 실현할 수 없는 의무로서 간주된다. 생존해 있는 세대는, 필요에서 나온 힘을 가지고서, 독일 민족이 자기의 과제를 실현시켜야 할 미래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172 피히테의 사상은 범신론적이다. 신은 세계의 피안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 피안에 존재한다면 세계는 신의 한계일 것이다 ━, 감각의 세계 속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다 ━ 이 세계 속에 갇혀 있다면 이로써 신의 본질은 유한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관계를 통에서 신을 사유할 수는 없다. 이 관계는 결코 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사유는 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고 또 세계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그러나 세계와 일치하지도 않고 또 세계를 초월해 있지도 않은 어떤 존재를 맞이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사유할 수는 있으나, 신을 사유할 수는 없다. 고대의 신학은 신을 절대적 존재, 또는 실제로서 특기하면서, 신이야말로 보호해야 할 최고의 권위라고 믿었다. 피히테는, 신의 본질에 있어서는 오히려 모든 오성 범주는 아무 소용 없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실체 및 존재의 범주도 역시 그렇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연관에서 신에게 존재를 거부하게 되는 명제는 불가피한 귀결이다.
Ⅲ장 : 셸링
192 칸트에 따르면 자연은 오성의 법칙 아래 있다. 피히테의 초기의 지식학에 의하면 자연은 직접적으로 자아의 산물이다. 자아의 자발적인 활동성이 자연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활동성 자제에 대한 반성이 없기 때문에 자연적 존재가 자립해 있는 듯한 가상을 가진다. 칸트는 자연적 대상에 목적론을 적용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거절했다. 피히테도 실은 원칙적으로 이 적용을 거부하고 있으나, 자연적인 것의 의미가 도덕적인 것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사실상으로는 자연에다 넓은 영역을 승인하고 있다. 이 목적 사상은 물론 전체로서의 자연에 해당되는 것이고 자연을 개별적으로는 다루는 것은 피히테로부터 거리가 먼 것이며, 그의 전체적 관심은 자유를 향해 있었고, 또 자유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가 자연 속에서 자각적 정신의 실재적인 조건을 인식하고, 동시에 목적론에 대한 칸트적 제한을 원칙적으로 탐구의 방법에 해당되게 한다면, 위의 사정은 필연적으로 변경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가지 일을, 셸링은 그가 자연 속에서 어떤 무의식적 지성 ━ 이 지성의 전개 국면들은 동시에 자연적 산물들의 단계인 것이고, 그 최고의 단계와 궁극 목적은 자각적 정신이며, 이 정신의 담지자로서 인간이 존재한다 ━의 창조 활동을 인식한다고 생각하면서 행하고 있다.
194 지식학에서는 자연은 순전히 관념적으로 자아의 산출적 구상력으로부터, 즉 무반성적인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창조하는 어떤 힘으로부터 발생한다. 셸링은 이 무의식적 창조 활동을 고수한다. 그러나 이것을 객관적인 것, 즉 실재적인 것으로 바꾼다. 왜냐하면 여기서 정신적으로 창조하는 원리는 셸링에게는 자아가 아니라, 자아 바깥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 바깥에 놓여 있는 실재하는 것의 원리요, 그러한 한 셸링의 자연철학은 지식학과는 반대로 철저히 실재론적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아직도 정신적 원리이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다시 관념적 원리이다. 그것은 동시에 관념적이기도 하고 실재적이기도 하다. 셸링의 관점은 따라서 아마도 당연하게 관념-실재론이라 부를 수 있겠다.
195 셸링의 자연철학은 통일성 철학의 순수한 전형이다. 이 철학의 형이상학적 근본 사상은 동일성의 사상이다, 즉 자연과 정신의 동일성, 우리 속의 정신과 우리 바깥의 자연 과의 본질의 동일성이다. 자연은 외부에 의하여 경계 지어진 것이 아니고, 정신은 내부에 의하여 한계 지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외부에도 동일한 정신이 지배하고 있고, 우리의 내부에도 동일한 자연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자연의 영역 내부에서도 역시 존재하는 통일성의 철학이다. 그리하여 유기적 자연과 무기적 자연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원리를 갖고 있는 분리된 두 자연이 아니다.
205 피히테의 의식에 관한 이론은 두 개의 구분지로 구성된 것이었다. 그것은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셸링은 제3의 구분지인 심미적 의식을 끼워 넣음으로써 이러한 피히테의 구성을 넘어서는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인식의 철학 및 행위의 철학과 함께 예술의 철학이 등장한다. 이렇게 의식의 세계를 풍부하게 한 것은 셸링의 예술가적 천성 속에 뿌리박고 있기도 하고, 또 낭만주의 사회 속에서 획득한 이념과 자극에 근거를 두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문제 영역을 선험적 관념론의 구조 속에 삽입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유기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식학에서 본래 결여해 있었던 것이 셸링에게서 더욱 절실히 감지된다.
221 자연철학은 실재론적 근본 사상 위에, 그리고 선험철학은 관념론적 근본 사상 위에 세워져 있다. 실로 자연의 원리는 정신적 원리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관념적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한 이 원리가 의식의 원리가 아닌 한에서만 그러하다. 자연의 산물 및 그 최고의 전상인 의식의 발생은 무의식적 자연력의 법칙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그리고 언제나 의식 및 의식의 내재적 조건 들로부터 독립하여 일어나는 실재의 과정인 것이다. 이 실재론은 피히테의 자연 파악에 대한 셸링의 자연 파악의 대립을 드러내며, 셸링이 아무리 관념론에 대하여 거슬리는 이 관점을 교묘한 여러 정의를 통하여 지워 버리려고 해도, 없는 것으로 해석될 수 없는 그러한 이론이다.
238 자유의 실재적이고 생동적인 개념은 자유가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위에서 언급한, 그리고 아직도 보다 더 깊이 파악해야 할 선과 악 그 자체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이 고찰의 중심에 새로이 들어선다. 이 문제의 해결은 적어도 셸링의 철학 체계의 토대도 똑같이 깊이 파악해야 할 것이라는 데에 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238 이 동일성으로부터 대립을 이 동일성을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신이 세계의 절대적 근원이요, 포괄적인 통일성이기 때문에, 이제 신 안에서 선의 절대성을 포기하는 일 이 없이, 신 자체 속에서 악의 근원을 지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신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해 있는 어떤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악은 신의 곁에 있는 어떠한 근원적 원리일 수도 없다. 악은 신을 배반함으로써 비로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배반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 원인 역시 다시 신 안에서 구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때 이 원인이 바로 근원적 악 그 자체인 것이다. 자유는 신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자유의 전제인 악은 신 바깥에서만 가능하다. 이 모순은 지양될 수 없고 시인되고 해결되어야 한다. 이 모순은 신 자신은 아니지만 신 안에 있는 어떤 계기를 지적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262 속죄의 의미는 악의 문제로 되돌아간다. 1809년의 악에 대한 원칙적 파악은 계시 철학에서 악마 이론으로 재현한다. 악마는 신이 창조한 것도 아니고, 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근원적 원리도 아니다. 그것은 창조가 이미 전제하고 있는 "생성된 원리"이다. 왜냐하면 이 원리는 창조와 단적으로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원리 속에서는 첫 번째의 전상, 즉 규정되지 않은 존재, 그리고 무제한한 가능성이 그 부정적인 이면으로부터 비존재로서, 부정하는 원리로서 현상한다. 따라서 악마의 세계에 대한 적의, 거짓말과 사기의 아버지로서의 그의 특성이 현상한다.
262 악마는 인간의 생명을 계속적으로 고무시키고 운동시키는 자이고, 인류의 역사의 과정을 잠들게 하지 않는 불휴의 원리이다. 악마는 창조의 적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도구이다. 그리고 "그것이 악마의 철학적 이념"이다. 악마는 악을 의욕하면서 선을 창조하지 않을 수 없다. 악마가 쉬지 않고 악을 창조하고자 하는 한, 그의 창조는 쓰리고, 본의 아닌 풍자로서, 그리고 그의 전체적 본질에 의하면 인간의 유혹자 및 사기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영원히 소득 없이 고생하는 자, 자기 자신을 유혹하고 기만하는 자로서 나타난다.
263 이렇게 이차적이고 부정적인 원리로서의 악마는 시원적이고 긍정적인 원리로서의 로고스에 대립한다. 이러한 적대 관계 속에서 악마는 처음부터 하위의 것이다. 악마는 로고스에게 고통을 줄 수는 있지만, 로고스가 그의 머리를 짓밟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의 속죄는 필연적으로 수난과 죽음의 일이다. 왜냐하면 악마는 이 세상에 있는 실재적 힘이기 때문이다. 신의 화해는 로고스가 그것의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 옴으로써, 육신의 지옥 속으로 들어옴으로써. 그리고 로고스의 극복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논리 정연한 합리주의가 신비를 거절하여 그 무엇으로 간주해야 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또 신적 부정과 무력의 작용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하나이지만, 그러나 악마는 생성된 원리로서 자기의 창조물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악마로부터 구원되는 것은 세계의 두 번째의 창조이자 개조인 것이다. 세계 가 그것에 좇아서 창조되는 로고스는, 세계 속에 새로이 부활하기 위 해서 그 속에서 죽어야 하고 또 몰락해야 한다.
Ⅳ장 : 낭만주의 철학
265 낭만주의란 본래 어떠한 것이며, 낭만주의의 창시자들이 창작과 철학에서 무엇을 의욕했으며, 그들의 이러한 의욕의 기저에 최종적으로 무엇이 동기로서 직관되고 감지되어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하게 정의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이 모든 정의는 의문스러운 시작에 불과하다. 그것은 어떠한 신조도 원리도 아니고, 어떠한 목표도 과제도 아니며, 윤곽이 뚜렷한 사상이나 개념으로 구성된 어떤 체계 속에 자리잡을 그러한 것도 아니다. 순수한 낭만주의 그 자체는 결코 철학이 아니다. 창작이 거기에 보다 더 가깝다. 작가가 낭만주의의 가장 순수한 대변자이다. 셸링이나 슐라이어마허처럼 작가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철학자들은 저들이 생각하는 것의 단지한 단편만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단편은 충분한 의미를 가지지만 그것이 전체일 수 없는 것은 사상의 구조가 생활의 어떤 태도 및 세계 이해 ━ 이것은 근본적으로 세계 감정이고 또 전체의 감정 세계를 포함 것이다 ━의 전체일 수 없는 것과 같다.
266 낭만주의는 특유한 방식의 생활 기분이다. 여기에 낭만주의의 본질을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불가능성이 놓여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정서적 기분으로 동화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낭만주의는 개념적으로 파악 불가능한 것에 대한 의식 속의 황홀경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개인의 유약함의 현상인 것이고, 자기의 눈앞에 떠도는 사실의 크기에 직면한 의식의 무력함일 뿐이다. 모든 기분의 가치 배후에는 낭만적 문학이 우리에게 주선해 주는 것처럼, 내용적인 그 어떤 것, 생의 새로운 의미 및 실질 아니 생 자체가 새로운 의미로 드러난다. 세계의 영원한 수수께끼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낭만주의자의 본질의 깊은 곳에 은폐되어 있고, 또 이 본질 속에서 직접적으로 간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해결이 이 낭만주의자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270 철학은 자기 방식의 전통의 짐을 짊어지고 있고, 또 전혀 다른 무게와, 다른 문제 내용을 가진 사상적 창작물에 몰두해야 한다. 위대한 관념론자 들은 모두 자기의 방식으로 칸트 및 이전 시대의 큰 체계와 투쟁한다. 낭만주의는 이 위대한 관념론자 들에게는 그 사상 세계의 한 단편 ━ 비록 본질적인 단편이라 할 지라도 ━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조건 아래에서만 낭만주의 철학자로 간주될 수 있다. 초기의 셸링과 슐라이어마허는 가장 이른 낭만주의 철학자이다. 그런데 두 사람 역시 제한된 범위 내에서 그러하다. 헤겔의 정신철학에서 낭만주의의 어떤 깊은 뜻이 어쩌면 가장 위대하게 사상적으로 명료하게 되어 발견되는데, 헤겔은 자기의 체계에서 낭만주의를 훨씬 능가해 버린다. 그는 보다 보편적이고 보다 위대한 인간성의 대변자이다. 물론 낭만주의자들이 자아낸 섬세한 많은 망상 조직들이 그의 손으로부터 동시에 미끄러져 나가기도 하였다. 그는 바로 완전한 철학자이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근본적으로는 철학이 아니다.
301 인간의 본질은 그 경험적 본질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속의 이념과 "사명"은 언제나 인간의 현실성을 넘어선다. 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말하자면 예술가로서의 인간에 대한 상대물이다. 예술가는 그가 자기의 전체의 자아를, 자기의 바깥으로 나와서 객관이 되는 이념. 즉 그의 작품에 내맡긴다는 사실 속에서 자기를 완성하게 된다. 이에 반하여 윤리적 인간은 그가 자기의 자아를 간취하여 실현한다는 사실 속에서 자기를 완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윤리적 인간은 행위하면서 존재하는 자기의 고유한 대상이요, 결코 완성되지 않는 자기의 작품이다. 그의 자기도야는 자기의 예술품이다. 그리고 이 도야의 이상은 보편적인 것으로서 사유될 수 있다.
308 우리가 휠더린의 철학적 이념에 관해서 자기의 작품 속에서 반영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할지라도, 그에게 독일관념론의 역사 속에 어떤 불변의 자리를 지정해 주는 것으로서 충분할 것이다. 순수한 자연에 대한 그의 감각으로부터, 그리고 피히테가 요구한 자연의 희생을 반대 하는 그의 예술가적-고대적 대립으로부터, 초기의 자연철학은 그 단초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의 전체가 그에게 살아있는 그대로,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윤리적, 심미적, 종교 철학적 전망 ━ 이 전망으로써 그는 외관상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철학적 동시대인들을 앞서고 있다 ━ 인 그대로, 그의 세계관 속으로 보다 깊이 통찰하고 인식하게 하는 다른 종류의 증거를 아직도 갖고 있다.
328 그러나 동시에 여기로부터 시와 철학의 본래적 관계가 밝혀진다. 철학자 역시 물론 바로 참된 마술사이어야 한다. 그는 정신의 지배를 열망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시와 철학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슐레겔한테서보다도 노발리스한테서 더 강하게 표현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활동성이란 계기, 즉 창조적인 것이 이 두 사람한테는 보다 더 기본적인 것으로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철학을 또한 "학문의 학문"이라고 특징 짓는다. 그러나 노발리스는 예를 들어 슐레겔이 순환 철학의 이념 안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완결된 학문적 체계를 변호하지는 않는다.
329 철학은 말하자면 규정된 작품이 아니라, 생 그 자체를 형태화시키는 절대적 예술이다. 철학은 절대적 가능성 그 자체이고, 절대적 기관을 자기의 지배력-안에서-다스리는 것이다. 철학은 세계상을 명상적으로 자세히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고유의 본질, ━따라서 바로 세계를 창조적으로 완성시키고 형성하는 것이다. 철학의 본질은 따라서 가장 본래적인,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시, 즉 절대적 창조이다. 이러한 관계에서도 역시 노발리스는 통일된 권리를 갖지 않고서는 피히테의 능동주의의 완성자로서 자부할 수 없었다. 자기계시는 여기서는 명백히 철학의 반쪽일 뿐이다. 자기 창조와 자기 완성이 철학의 실현이다. 자유로운 능동성은 비록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어떤 의무라 할지라도, 이 의무에 구속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속에 있는 철학적 본질은 창작을 일찍 끝내는 일이 없이 영원히 계속하여 창작하는 바로 그 것이다. 그것은 감각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 사이에 떠 있는 상태로 계속하여 머무는 것이다.
334 종교는 사변적인 것도 실천적인 것도 아니다. 종교는 의지의 일도 인식의 일도 아니고, 심정의 일이다. 종교에 있어서의 심정의 태도는 ━종교가 그 속에 존립하고 있는 신에 대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 결코 대상적인 것이 아니고, 상태적인 것이다. 이 상태적인 것이 바로 종교적 감정이다. 이 감정은 신앙심 깊은 인간에게는 "경건한 감정"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경건은 신에 대한 대상적 의식이 아니고, 신의 현존에 대한 내적 확신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경건을 결국 신의 계시라고 특징 짓는다. 무한자 및 절대자의 현존은 경건한 감정 안에 주어져 있다. 이 동일한 절대자를 우리의 지식 및 의욕은 손에 넣을 수 없다. 이것을 요구하며, 첫째 조건으로서 가정하기는 하나, 현실적으로 접촉하지는 못한다. 이 절대자를 경건한 감정은 깨닫게 된다. 감정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따라서 바로 공통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인식할 수는 없는 지식과 의욕의 근거인 것이다, 따라서 대상적 의식을 부정하는 곳에 모든 의식의 절대적 대상 ━ 비록 대상으로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 이 주어지는 것이다. 주관-객관-관계의 이러한 지양은 종교적 의식의 특성을 이루는 내용이다.
344 이제 슐라이어마허에 있어서 개인의 자율적 내면성에 대한 특징적 믿음이 결정적으로 발현한다. 인류의 종교적 생의 전개는 대중의 의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탁월한 인격들의 의도를 통해서 일어난다. 이러한 생명이 새로운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곳, 즉 헌 길이 헐리고 새 길이 닦이는 곳에서, 새로운 이념을 갖고서 최초의 인물로서 앞서 가 고, 그리고 나서 이 이념의 내면적 힘을 통해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채가는 사람은 언제나 개별자이다. 그리고 언제나 이념이 존립하게 되는 곳은 종교적 체험 자체의 새로운 형식이고, 절대적 의존 감정의 새로운 형태이며, 이 의존 감정을 통한 신에 대한 관계의 새로운 친밀성이다. 그러한 혁명과 새로운 창조를 교의와 교회 법령의 단순한 개조 속에서 구하는 것보다 더 그릇된 것은 없다. 그 어떠한 새로운 것도 깊은 곳으로부터 싹 트지 않는 곳에서는 형식들을 파괴할 어떠한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개조는 오히려 종교적 감정의 내면적인 새로운 각성을, 그것도 실로 필연성을 갖고서 추적하지만, 그러나 결코 끝까지 다하지는 못한다. 모든 실증 종교는 각기 근본적으로 이 종교 창설자의 창조적 인격을 통해서 규정된 것이다.
361 "종래의 윤리학"은 양 극단에서 진행되었다. 이 윤리학은 인간의 자연적 노력에 호소하여, 마치 모든 행복설이 행복을 추구하는 노력을 윈리로 삼는 것처럼, 이 자연적 노력을 원리로 삼거나, 또는 이 윤리학은 모든 자연적인 것을 경멸적으로 부정하고, 모든 애착에 저항하는 당위 ━ 이 당위는 명령으로서, 명법으로서 등장하고, 그 밖의 다른 경향의 폐기를 요구한다 ━를 이 자연적인 것에 대립시키거나 한다. 후자 유형의 대표자는 칸트와 피히테이다. 전자 유형의 윤리학이 실천 이성의 비판을 통하여 충분한 논박을 받은 반면에 후자는 아직도 유효하며 존경을 받고 있다.
제2부 헤겔
Ⅰ장 : 헤겔의 철학 개념
403 헤겔은 근대의 사상가 중에서도 정신의 철학자이다. 그런데 정신적 존재는 내면성이요, 충만이며, 포괄함이다, 따라서 헤겔의 철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철학이 지닌 가장 내면적인 것, 그 충만,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가치를 인정하는 그 거대한 포괄 작용에서 그의 철학을 이해해야 한다.
406 헤겔의 독자, 특히 논리학의 독자로 하여금 언제나 되풀이해서 골치를 앓게 하는 것은 헤겔이 사용하는 개념들이 지니고 있는 전대미문의 "추상성"이다. 헤겔의 독자는 이 개념들이 뜻하는 바에 정통해 있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이 개념들은 적어도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독자는 이 개념들 속에서 두드러지게 구체적이고 생동적인 어떤 그 생명이 판에 박힌 듯한 저 형상을 끊임없이 파괴하는 어떤 것, 따라서 개념 그 자체를 판에 박힌 듯한 개념의 저 형태로부터 내몰고, 개념을 지속적으로 개조하며 변경하고 전개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유동적인 어떤 것으로, 그리하여 그 자체를 생동적인 것으로 만드는 그 어떤 것이 간직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432 독일관념론은 점점 더 객관적으로 된다. 독일관념론은 초기의 피히테와 셀링에 있어서는 아직도 매우 주관주의적으로 채색되어 있었고, 그리고 실로 경험적 자아로부터 구별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경험적 자아를 유추해서 이해하게 되는 어떤 자아 개념에 결부되어 있다. 후기의 지식학 및 동일성의 체계 속에서는 이러한 관념론은 이미 극복되어 있다. 그러나 헤겔에 있어서 이 관념론은 그 역할을 완전히 끝내 버렸다. 그러나 이 관념론은 지금 자기의 자리를 자기와 마찬가지의 상태에 있는 일면적인 새로운 실재론에 양도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관점상의 대립의 지평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연구가 등장하여 이 지평을 넘어섬으로써, 비로소 이 연구는 그 대상이 본래 지니고 있는 존재론적 성격을 올바르게 평가하게 된다.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관념론 자체의 ━ 바로 이 관념론의 전개의 정점에서 ━ 존재론에로의 철저한 전환이다. 그것은 관념론의 역사적인 자기 극복이다. 이 극복은 관념론 고유의 문제들 속에서 다름 아닌 관념론 고유의 내적 일관성에 이끌리어 발생한다.
434 헤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자 존재"라는 이 술어의 형식적 의미가 뜻하는 것 그 이상으로 이 술어를 올바르게 이해하여야 한다. 헤겔의 개념들은 당장 그 비밀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가 논리학의 "객관적" 부분에서 처음으로 대자 존재라는 개념을 만나면, 그것의 의미는 외부에 대한 폐쇄성, 즉 단절되어 있음, 자립성 속에서 다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옛날 사람들이 부른 합창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자 존재의 외적 측면일 뿐이다. 이 외적 측면 배후에는 "대하여"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 받아 들여지게 되는 또 다른 의미가 꽂혀 있다. 그렇게 되면, "대자존재"는 자기 자신을 포착하는 존재, 따라서 자기 자신 속으로의 반성을 이미 거친, 그리하여 이제 이 반성을 자신 속에 보존하는 존재를 의미하게 된다.
435 우리가 어떤 존재자의 참된 존재론적 성질 ━ 따라서 존재자에 있어서 누군가에 대한 그것의 현상 방식만이 아닌 그러한 것 ━을 그것의 "즉자 존재"라고 부른다면, 동일한 존재자의 대자 존재 속에는 실은 보다 높은 존재의 단계 ━ 이때 이 존재자가 "즉자적"이면서, 또한 "대자적"인 바로 그러한 것인 한에서 ━가 놓여 있다.
435 모든 존재자는 정신적인 것의 이 최고의 형식에로 나아가는 경향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고, 또 모든 존재자는 자기 자신의 의식에로 밀고 나아가며, 그 때문에 세계의 전체 단계 영역에 있어서 보다 낮은 단계가 보다 높은 단계 영역에로 이행하는 경향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술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모든 즉자 존재는 자기의 대자 존재 속에서 비로소 성취되고 실현되며 자기 자신에 도달한다는 것을 뜻한다. 대자 존재는 즉자 존재의 "진리"이다. 단순한 즉자 존재는 단지 절반일 뿐이고, 실마리이요 실현되지 못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진리는 전체이고, 즉자 대자 존재이다.
436 절대 이성이 신과 동일하다면, 세계의 생성 속에 있는 절대 이성의 생성 작용은 신의 생성 작용인 것이고, 세계 과정 자체는 신의 실현인 것이다. 이러한 역동적 범신론은 헤겔 철학 속에 내재하는 종교적 사유가 받아들이는 형식이다. 범신론은 관념론 및 목적론적으로 상승하는 변증법과 마찬가지로 헤겔의 체계 속에서는 본질적인 것이다.
467 칸트는 형이상학에 이르는 통로를 우선 실천 이성에서 발견하였고, 피히테는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서 당위에 기초를 둔 체계를 만들었으며, 셸링은 이 체계를 우주에 확장시켰고, 그리고 헤겔은 그것을 보편적으로 완성하였다. 헤겔이 이 체계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장 철저한 귀결들을 칸트 자신의 명제(정립)로부터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비 사변적인 사유에게는 칸트가 부인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 ━ 칸트의 정립에 대하여 위에서 암시된 일련의 반정립 ━ 그것은 바로 칸트의 정립의 고유한 귀결이요, 또 이 정립에 대한 필연적 보완이다. 그리고 이 보완을 통해서 칸트의 정립은 "전체"로 됨으로써 비로소 "진리"가 된다.
477 우리가 한층 더 깊이 본질론으로 들어간다면 일련의 동일성의 명제들 ━ 실로 두 사상가에 있어서 매우 차이가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명제들 ━을 만나게 된다. 헤겔한테는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 동일성이 된다. 그것은 결코 동어 반복이 아니고, 최고도의 종합적인 동일성이다. 그리하여 술어는 주어이고, 모순되는 것은 사태의 통일성(사태의 진리)이며, 개념은 존재의 본질이고, 원인은 목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고, 즉자 존재자(내면적 규정)는 대자 존재이며, 역사적 단계는 논리적 단계이다로 된다.
480 헤겔은 철학적 자기의식을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동일한 것. 하나의 절대자 즉 이성을 생각한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 절대자를 만물의 단초에 전개되지 않은 채 기저에 놓여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종말에 가서 자신을 실현해 있는 그대로의 절대자를 생각한다. 철학은 바로 영원한 정신이 자신을 완성시키는 우리 마음 속의 자기의식인 것이다.
Ⅱ장 : 정신 현상학
Ⅲ장 : 논리학
Ⅳ장 : 논리학의 토대 위에 세워진 체계
정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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