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우에 가쓰오: 막말·유신 ━ 일본 근현대사 1


막말.유신 - 10점
이노우에 가쓰오 지음, 이원우 옮김/어문학사



머리말 ― 희망봉에서 에도 만으로-

제1장 에도 만의 외교 
제2장 존양(尊攘)·막부 토벌(討幕)의 시대 
제3장 개항과 일본 사회 
제4장 근대국가의 탄생 
제5장 ‘탈 아시아’로의 길 

맺음말

저자 후기 
역자 후기 
연표 
참고 문헌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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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8 극동의 동쪽 끝이라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일본은 전통사회가 발전된 상태에서 개국을 받아들여 서서히 정착했고, 그리하여 일본은 자립을 지켰다고 하는 것이 이 책의 일관된 견해이다.


9 서양 열강의 압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이용하여 메이지 정부의 외교정책이 동아시아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



제1장 에도 만의 외교 

17 이 무렵의 국제법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민족자결권이 없는 등 중요한 결점이 있었기 때문에 현대 국제법과 구별하여 근대국제법이라고 부르며, 막말?메이지 시기에는 '만국공법'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청)에서 번역되어 일본에 소개되었다.


19 근대 서양에서는 세계의 민족과 국가를 '세 개의 군'으로 구분한다. 그 세 가지는 문명국, 반미개국, 미개국이다.


23 아편전쟁 4년 후인 1844년에 막부에 보내진 네덜란드 국왕의 개국 권고는 아편전쟁에서의 패배로 중국이 개항하여 많은 배상금을 지급하고 영토를 할양한 점, 게다가 일본에도 군사적, 침략적인 무위 세상에 빛나는 영국의 내항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 또한 나폴레옹 전쟁 종료 후 빈 체제의 안정과 그 체제 하에서의 산업혁명과 세계 무역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23 네덜란드는 에도시대 초기부터 네덜란드 풍설서라는 형태로 매우 간단한 외국 정보를 매년 막부에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편전쟁 2년 후인 1842년부터 막부의 요구로 매년 제출된 네덜란드 별당풍설서이다.


25 페리가 내항하기 전년도인 1852년의 별단풍설서는 페리에게 일본으로 가도록 명령이 내려진 사실과 그 목적은 첫째로 통상, 둘째로 저탄소라고 기재되어 있고, 상륙과 포위 전투 준비를 하고 무기를 적재하고 있는 사실도 알렸다. 막부는 페리의 내항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33 미일화친조약 전 12조는 1854(가에이)년 2월 10일부터 3월 3일까지 20여 일간 막부의 전권 사절과 페리 사이에 4번의 정식 회담을 거쳐서 체결되었다.


34 제9조의 편무적 최혜국 대우는 페리가 '가장 중요한 조항'이라고 평가한 조항이다. 서양에서는 쌍무적인 최혜국조약이 일반적인 것을 일본은 몰랐다고 생각한다. 명백한 불평등조약이었다.



제2장 존양(尊攘)·막부 토벌(討幕)의 시대  
79 전쟁을 하려는 강력한 국가나 대국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국가의 자립을 위한 유일한 길은 아니다. 일본 열도에는 서양 열강의 균형이 빚어낸 고유의 지정학적 조건이 있으며, 개국에 대응하는 국내의 성숙도 있었다. 조약에 의해 외교를 수립하는 것은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79 그러나 고메이 천황은 훗타가 돌아간 후에는 통상조약을 거절한 다음에 미국과 동맹을 맺은 여러 오랑캐가 함께 내습할지 모른다며 공가들에게 각오를 촉구하고 조정의 경비절감과 기도를 명령했다. 천황은 그야말로 무모하고 현실적인 전쟁을 상정하고 있었다.

81 천황과 귀족 공동의 '운상'이라는 전통적인 신국사상에 비교해서 천황(고메이)야말로 귀족(다카쓰카사와 구조)과는 달리 진무 천황 이래의 '만왕일계'를 잇는 귀종이라는 신화는 이때 탄생한 새로운 신국사상이다. 이러한 막말 정쟁의 전사(前史) 위에 메이지 헌법에서 '만세일계'라는 천황주의 사상이 창안된 것이다. 

81 온당하고 개명적이며, 현실적인 막부의 개혁파 세력이 진무제로부터 황통연면 신화에 근거한 대국주의 사상에 의한 천황 때문에 크게 좌절했던 것이다.


제3장 개항과 일본 사회 
118 종래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일본은 쇄국정책으로 폐쇄된 사회였다. 서양인과 만나면 혐오와 경계, 허세와 공포의 감정이 생겼을 것이라며 긴박한 상황을 상정해 버린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119 종래의 혐오와 경계라는 이미지는 현대의 문명개화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서양문명을 따라가고자 하는 의식이 문화 후진 의식, 문화열등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에도 후기 사람들은 그러한 열등 의식과는 무연했다.

137 최강 해군국 영국은 일본 주변 해역에서의 러시아와 세력 균형, 대륙 국가 중국을 교두보로서의 해양 국가 일본의 지리적 위치, 일본의 수준 높은 국가 통합과 세 개의 조약과 항 방위의 곤란함, 그리고 순조로운 무역 추이 등을 고려하고 있었으며, 이것들이 영국의 일본 영토 식민지화라고 하는 현실적인 위기를 상당히 작게 만들고 있었다.


제4장 근대국가의 탄생 
223 1872(메이지 5)년 11월, 이와쿠라 사절단이 영국에서 파리로 들어갔을 무렵, '징병고유'와 '전국 모병의 조칙'이 발포되었다. 

223 '사민'은 '자유'의 권리를 획득했기 때문에 국가의 재난을 막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야 한다고 국민개병을 선언했다.

224 전국에 5만 3,760교의 초등학교를 일시에 설립하는 구상이었다. 프랑스의 학제를 모방하여 '마을에 불학하는 집이 없고, 집에 불학하는 사람을 없게 한다'는 획일적인 국민개학제 구상으로, 개인의 공리주의를 끌어내자는 취지였다.

225 1868년에 전통적인 다섯 명절 '노는 날'을 폐지하고, 기원절(紀元節)과 천장절(天長節) 등이 신설되었는데, 국경일을 전국적인 법령으로 확정한 것도 1873년이었다.

225 1868년에 전통적인 다섯 명절 '노는 날'을 폐지하고, 기원절과 천장절 등이 신설되었는데, 국경일을 전국적인 법령으로 확정한 것도 1873년이었다.

228 즉 메이지 정부는 이전에도 묵인되고 있었던 폭동 봉기 그 자체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강경 방침으로 크게 전환한 것이다. 민중도 성숙한 전통사회를 권력에 의해 파괴해 가는 메이지 정부를 ‘기독교도’(耶蘇宗)라 말할만큼 거부하여, 쌍방이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제5장 ‘탈 아시아’로의 길 
247 운양호의 무장 단정이 첫날 범한 돌영한 행동은 페리의 행동과 비교할 수가 없다. 무법적인 작전 행동 그 자체이다. 이어지는 포격전에서의 육전대 상륙, 성과 민가를 파괴하는 작전, 조선군 격멸도 물론 국제법 위반이다. 

247 사건에는 외무부도 관여하고 있었고 목적도 명확했다. 서양이 후발국(반미개국)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조선과 맺고, 조선을 개국시키는 일. 에도 시대에는 이웃 나라 조선과 대등외교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 조선을 일본의 후발국으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249 1876년 2월에 조일수교조구가 체결되었다. 강화도조약, 병자조약이라고도 한다. 조선을 자주국으로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청의 종주권을 부인했다. 그러나 내용은 철저한 불평등조약이며, 부산 외 2개항의 개항, 일본인의 '왕래 통상'을 인정하고, '일본의 항해자'에게 해안을 수시로 자유 측량을 하는 것과 나아가 일본의 영사재판권을 인정했다.

249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서양과 입장을 같이 하여 동아시아의 소(小)서양으로서 임한 것이다. 한편 조선이 편무적 최혜국 대우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조선으로서는 최악의 사태를 막는 것이 되었다.

261 1875년 7월, 강화도 사건을 일으키기 2개월전, 정부는 류큐에 대하여 청국으로의 조공 폐지, 메이지 연호의 사용, 번정개혁, 진대 분영 설치 등을 명령하고 류큐를 청국에서 최종적으로 분리하여 일본으로 편입시키려는 류큐 처분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264 이민족을 '미개'로서 억압하고 부정하는 정책, 정부와 대자본에 의한 외지 자원의 약탈적 수탈, 침출 즈음의 민중의 국가적 동원 등 훗카이도 '개척'은 동아시아 침략의 제1단계가 되었다.


맺음말
268 사회가 필요로 하는 근면과 규율, 위생은 사실 서양과 형태는 다를지 모르나 에도 민중 사회에 성숙한 형태로 존재했다. 그렇다면, 메이지 초기의 문명개화라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학교와 징병령, 관청이나 징역장, 나아가 병원까지도 메이지 초기의 파괴 폭동에서 '방화'의 공격 대상인 의미가 여기에 있다.

268 무리한 서양화, 만국대치라는 대국주의, 이것이 막부토벌파인 소수파가 신정부의 요인이 될 때부터 정치의 기본으로 몸에 익히고 있었던 것이었다.

269 징병령 반대를 비롯해 이러한 과격화된 민중운동을 억압하는 것이야말로 메이지 정부에 의한 문명개화 중심선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장기간에 이르렀다. 수많은 유혈사태가 빚어진 싸움이었다. 그것을 무지몽매한 농민을 문명화된 국민으로 교화했다는 듣기좋은 이야기로 바꾼 것도 문명개화가 이룩한 것 중 하나이다.

269 고메이 천황은 중국에서는 현명한 인재를 선택하여 왕으로 삼지만 일본은 '진무 천황이래로 황통이 면면'하며, 그 때문에 중국보다 뛰어난 '신주(神州, 일본)'라고 말하고 조약은 '신주의 흠'으로 '허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양이를 주장한 것이었다. 진무 천황부터 황통이 면면하다는 신화에 근거한 대국주의 사상에 천황의 양이론이 탄생하는 하나의 길이 있었다. 그렇게 하여 야마우치 도요시게 등의 히토쓰파 다이묘들로부터 천황?조정의 양이론은 무모한 모험주의라고 통렬한 비판을 받았다.

270 막말에 일본 국민 대부분이 양이로 들끓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 천황?조정이 있었다고 하는 신국사상과 대국주의로 채색된 이야기야말로 본문에서 말한 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오류 중 하나였다. 그런 이야기는 근대 일본이 만들어낸 천황제 근대국가의 국가창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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