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하라 노리오: 민권과 헌법 ━ 일본 근현대사 2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7. 2. 20.
민권과 헌법 - 마키하라 노리오 지음, 박지영 옮김/어문학사 |
차례
머리말-5
제1장 자유 민권 운동과 민중 19
제2장 ‘헌법과 의회’를 둘러싼 공방 53
제3장 자유주의 경제와 민중의 생활 85
제4장 내국 식민지와 ‘탈아’로의 길 121
제5장 학교 교육과 가족 159
제6장 근대 천황제의 성립 195
맺음말-241
저자 후기 247
역자 후기 250
연표 255
참고문헌 258
색인 264
관련 공부 글 보기
강유원의 책읽기 20분 | 2014 | 일본 근현대사 | 02 민권과 헌법 1
강유원의 책읽기 20분 | 2014 | 일본 근현대사 | 02 민권과 헌법 2
강유원의 책읽기 20분 | 2014 | 일본 근현대사 | 02 민권과 헌법 3
강유원의 책읽기 20분 | 2014 | 일본 근현대사 | 02 민권과 헌법 4
강유원의 책읽기 20분 | 2014 | 일본 근현대사 | 02 민권과 헌법 5
강유원의 책읽기 20분 | 2014 | 일본 근현대사 | 02 민권과 헌법 6
강유원의 책읽기 20분 | 2014 | 일본 근현대사 | 02 민권과 헌법 7
머리말
10 확고한 의사 결정과 안정된 정치 운영을 이끌어내기에는 개인의 '결단'이 아니라 일정한 제도에 의거해야 했다. 이렇게 여러 정치 세력의 이념과 이해관계가 얼크러진 속에서 제국헌법 체제가 어떻게 형성되어 갔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이 책의 첫 번째 주제이다.
11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목적을 공유했기 때문에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메이지 정부와 자유 민권 운동 외에, 정부에 강력하게 반발하면서도 민권파와 다른 소망을 가진 민중이라는 독자적인 존재를 추가한 삼극의 대항이라고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 경우 삼자의 관계, 특히 민권 운동과 민중은 어떤 관계에 있었던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이 책의 두 번째 주제이다.
13 사회의 근대화가 사람들의 의식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이 책의 세 번째 주제이다.
14 불평등조약의 해소를 숙원하고 있었던 메이지 정부는 문명개화 정책으로 국내의 문명화?근대화를 진행시켰다. 한편 훗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영토에 편입시켜 내국 식민지로 삼는 동시에 중국, 조선에 대해서는 서구 각국과 동등한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려고 했다. 이러한 '문명적'이라는 가치 기준이 훗카이도, 오키나와 정책을 포함한 이 시기의 대외 정책 속에 어떻게 기능하고 있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이 책의 네 번째 주제이다.
14 '문명적'과 '일본적'이란 단어는 대립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며, 근대천황제와 제국헌법 체제는 그 양면성으로 인해 국민 통합의 기능을 수행한 것이 아닌지 그리고 그러한 장치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 이것이 이 책의 다섯 번째 주제이다.
제1장 자유 민권 운동과 민중
21 메이지 정부의 정치 자세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컸다. 세이난전쟁 중에도 도쿄의 목욕탕에서는 '이런 멍청한 세상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어짜피 도쿠가와 님이 곧 다시 돌아올 거야'라고 누군가가 말하면 '그래, 그래'라고 응수가 돌아왔다.
40 누가 천하를 가지더라도 상관없으니 어찌 됐든 안심하고 밥만 먹을 수 있게 해달라는 서민의 생각은 단지 정치적 무관심일 뿐이며, 현재의 지지 정당이 없는 사람들의 정치감각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41 소수의 '주인'만이 지배하는 신분제 국가에서 그 외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객분'에 불과하다. 객분은 국가의 운명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국내 문제뿐이라면 이 상태라도 좋지만, 외국과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무지 무력한 소민'이라 '무기를 거꾸로' 들고 반란을 일으킬 걱정은 안 해도 '우리들은 객분이기 때문에 목숨을 바치는 일은 과분하다며 도망가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41 후쿠자와가 '평등'을 역설하고 '학문'을 장려했던 것은 민중의 '객분' 의식을 불식시켜 '국민'으로서의 자각, 국가를 목숨을 바칠 각오를 지니게 하기 위해서 였다.
42 메이지 초기의 민중이 간단하게 '천하와 우락을 함께 할 리가 없었다. 그것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징병제에 대한 대응이었을 것이다.
44 군대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한, '천하와 우락을 함께하는' 민권파에게 병역은 당연한 의무였다.
45 '민권'이란 무엇보다도 '국민으로서의 권리'이며, 민권 운동은 대단한 '국민'주의적인 운동이었다. 그 때문에 자유 민권 운동은 정부에게 '국민의 권리'를 요구하는 한편, 민중의 '객분' 의식을 불식시켜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환기시켜야 했다.
47 '인민 일반이 학정에 고통 받고 있다'며 다케바시 사건에 참가한 농민이 얘기했던 것은 단지 메이지 정부의 부정형으로서 병역과 세금이 없는 '도쿠가와 님의 세상'이 부상했던 것뿐이다.
48 연설화의 청중이 되었던 대부분의 민중이 민권 이론이나 국가 구상을 충분하게 이해하고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민중이 바라는 것과 민권 운동이 지향하는 근대적인 국민 국가 간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반정부', '반권력'이라는 점에서 민중은 민권파를 열렬히 지지했다. 연설회장에서의 열광은 이질적인 것들이 부딪히면서 생성된 일종의 '충돌' 현상이었으며, 그 때문에 정부에게 큰 위협을 끼칠 수 있었다.
50 민중들 사이에 객분 의식이나 반정부 감정이 뿌리 깊게 남아 있었던 1880년 전후의 시기에 '국민'이라는 의식이나 '천황은 국민의 편이다'라는 관념을 침투시키고 나아가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은 정부가 아니라 오히려 민권 운동 쪽이었다.
50 요컨대 이 시기의 정치 구조는 메이지 정부와 민권 운동의 2극 대립이 아니라 민중을 포함한 3극 대립으로 보는 것이 실태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민권파와 정부는 대립하면서도 '근대국가의 건설' '민중의 국민화'라는 큰 틀을 공유하고, 민중과 민권파는 지향하는 방향은 달랐지만 '반정부'라는 점에서 뜻을 같이하여 정부에 큰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제2장 ‘헌법과 의회’를 둘러싼 공방
54 메이지 정부는 처음부터 명확한 국가구상을 세우고 거기에 따라 구축된 것이 아니라 도쿠가와 막부를 넘어뜨린 각 세력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었다.
55 중요한 대립 요소는 천황의 친정 문제, 재정문제, 헌법 문제 이 세 가지였다.
73 「군인칙유」는 천황이 직접 서명한 후, 태정대신을 거치지 않고 바로 육?해군경에게 하달되었다. 의회 개설이 불가피한 시점에서 육?해군이 '천황의 군대'라는 것을 명확하게 한 것이다.
74 다케바시사건이나 민권운동의 고양으로 쿠데타가 일어나거나, 정당이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는 위험성도 인식되었다. 그 때문에 군령 부문을 정부로부터 떼어 내어 천황 직송으로 만든 것이다.
제3장 자유주의 경제와 민중의 생활
119 그래도 1880년대 후반에는 집단 내에서 명령받지 않더라도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규율을 지키며 노동이 가능한 사람만이 '근면'한 사람이라는 '문명국 표준'이 사람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자유주의를 근거로 한 ‘강한 자의 자유’ 하에서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않으며, 지역이나 직장에서 ‘불결’하고 ‘태만한 자’라고 불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규제하고, 가혹한 노동조건과 높은 소작료에도 인내하면서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려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근대’라는 시대의 막이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
제4장 내국 식민지와 ‘탈아’로의 길
124 일정한 지역과 주민을 영토와 국민으로 포섭한 국민국가는 토지의 소유권자가 배타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국가 주권이라는 명목하에서 타국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었다. 만국공법이 기초로 하는 것은 근대적 소유권의 논리였다. 따라서 주권자가 존재하지 않은 지역은 '무주지(無主地)'가 되며 최초로 점유한 자가 소유권을 가진다는 '선점(先占)'의 논리가 국가 차원에서도 적용되어 식민지 지배가 정당화되었다.
125 '문명적'인지 아닌지를 인정하는 것도 서구 문명국이었다. 일본이나 중국은 미개와 문명의 중간, 소위 '반개(半開)'로 인정받았다. 불평등조약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었으며, 무엇보다도 후쿠자와에게 있어서의 '탈아론'은 일본의 '문명국' 선언이었다.
125 입헌제를 실현해 아시아를 문명의 빛으로 밝히는 선구자가 되겠다는 의지가 민권 운동의 에너지가 됐다. 그렇지만 아시아를 '암흑'이라고 규정해버리면 필연적으로 '문명과 미개'라는 이분법의 논리에 빠지게 된다.
126 아이누 민족의 존재를 무시한 일본 정부의 정책은 만국공법의 '무주지' 논리와 같았다.
133 자유 민권 운동이 아이누 민족의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제국의회가 열리자 입헌개진당의 가토 세노스케가 유럽의 인종차별을 비판한다면, 일본인도 아이누 민족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며 「훗카이도 토인 보호법」을 제안했다.
134 훗카이도로 이주한 사람들은 선주민에 비해서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받았지만, 동시에 개척이라는 힘든 일을 한 몸에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국민으로서의 권리'도 제한받은 존재였다. 그런 의미에서도 훗카이도는 식민지였다. 하지만 러일전쟁 후에 오타루 등은 일본의 세력권이 된 가라후토나 '만주'로 가는 중계지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내지'의 식민지가 이번에는 북아시아 침략의 거점으로 변화해 간 것이다.
제5장 학교 교육과 가족
168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로웠던 학교 교육의 모습을 크게 전환시킨 것은 내각제도의 성립으로 초대 문무대신이 된 모리 아리노리였다.
170 제국대학을 필두로 하는 관·공립 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관료가 되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 되었다.
173 학력사회는 '평등'을 전제로 한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이 정치, 경제, 문화를 지배하는 상류 사회가 엄연히 존재하고, 하층과의 사이에 명확한 단절이 있는 계급 사회에서는, 일단 노동자의 자식이 대학 진학을 꿈꾸는 일은 없었다. 일본에서는 경제적인 조건은 차치하더라도 '학력'만 있다면 소작농이나 노동자의 자식이라도 도쿄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거꾸로 만약에 '성공'할 수 없었다면 그것은 신분과 같은 외재적인 제약의 탓이 아닌, 본인의 '실력'이나 '노력'이 부족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학력주의야말로 기회의 평등, 우승열패, 자기 책임이라는 자유 경쟁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175 원래 일본 사람들에게는 '체조'하는 습관이 없었으며, 집단 노동이나 봉오도리의 경우에도 지금처럼 '구령하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질서정연한 집단행동을 요구하며, 전장에서 장애물을 민첩하게 넘기 위해서 목봉이나 철봉을 사용한 훈련을 했다.
176 집단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 특히 같은 간격을 유지하며 구령에 맞춰 팔다리를 움직이는 대열 운동 속에서 사람들은 '집단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지녔으면서, 바로 이것이 모리가 의도한 바였다.
189 혼인은 '이에(家)'의 존속이 목적이며, '가부장권은 신성하며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 이유'가 '선조의 영혼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천황제와 중첩시켜 '이에' 제도와 가부장권을 정당화시켰다.
제6장 근대 천황제의 성립
236 '헌법 축제'를 결코 '역사의 우스갯거리'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일장기와 기미가요?초상화?만세라는 국민 통합의 '네 가지 상징'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날이며, 1880년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정치문화, 즉 민중을 동원한 근대적인 국가 제전이 처음으로 등장한 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38 '신민'이란 제한 선거제도하에서 '비국민'을 국가에 통합시키기 위한 근대 국민국가의 요청으로 생성된 관념이며, 권력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참정권도 없으면서 국가의 일원으로 납세, 병역, 교육을 '의무'로 받아들이는 '국민'처럼 편리한 존재는 없었다. 그야말로 천황은 국민통합의 핵심이며 상징이었다.
맺음말
246 사람은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들은 국민국가와 경쟁사회 속에서 ‘욕망의 환기’라는 장치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장치가 형성된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적인 경험을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나 남의 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책 밑줄긋기 > 책 2012-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콥 부르크하르트: 세계 역사의 관찰 (0) | 2017.03.26 |
---|---|
야스마루 요시오: 근대 천황상의 형성 (0) | 2017.03.08 |
이와나미 신서 편집부: 일본 근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일본 근현대사 10 (0) | 2017.03.08 |
존 샌더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 어떻게 되는가 (0) | 2017.02.27 |
니콜라이 하르트만: 독일 관념론 철학 (0) | 2017.02.16 |
플라톤: 메논 (0) | 2017.02.07 |
케네스 C. 데이비스: 말랑하고 쫀득~한 미국사 이야기 (0) | 2017.01.31 |
이노우에 가쓰오: 막말·유신 ━ 일본 근현대사 1 (0) | 2017.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