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큉: 한스 큉의 유대교 ━ 현 시대의 종교적 상황


한스 큉의 유대교 - 10점
한스 큉 지음, 이신건.이응봉.박영식 옮김/시와진실



이 책은 무엇을 원하는가?


제I부 여전히 현존하는 과거

1장 기원

2장 중심

3장 역사


제II부 현재의 도전

1장 홀로코스트에서 이스라엘 국가로

2장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의 논쟁

3장 근대의 극복


제III부 미래의 가능성

1장 포스트모던 시대의 유대교

2장 삶의 갈등과 율법의 미래

3장 유대인과 무슬림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의 미래

4장 홀로코스트와 하나님 담론의 미래


에필로그

새로운 세계 윤리가 없다면, 새로운 세계 질서도 없다





이 책은 무엇을 원하는가?

5 나는 다음과 같은 전제에서 출발한다. 기독교든 유대교든 이슬람교든 모든 세계 종교는 개인과 민족과 문명을 뛰어넘는 살아있는 체계다. 이 체계는 1천 년 이상의 역사를 거치며 다양하고 획기적인 패러다임을 형성해왔다. 만약 우리의 연구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실에 부합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1천 년 역사의 정신적 능력을 분석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체계적 진단이 필요하다. 분석된 현재로부터 미래에 주어질 다양한 선택을 전망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천적·공동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8 나는 이 책에서 대립적인 두 요소를 설정하려고 한다. 여기서 유대교를 과거의 구약성서로 관찰할 것이 아니라, 놀라운 연속성과 활력과 역동성을 지닌 독립적인 실체로 관찰할 것이다. 그 어떤 기독교 신학자도 이제는 유대교를 구원사적으로 능가된 종교로 생각하거나, 자신의 모습을 부각하기 위해 유대교를 단순한 '유산'으로 활용할 수 없다. 그 어떤 교회도 이제는 단순히 낡은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자처할 수 없다. 그 어떤 기독교인도 이제는 살아있는 유대교를, 그리고 그 민족의 끈질긴 생존만이 아니라 역동적인 혁신과 국가적인 자기 조직화의 도전을 무시할 수 없다. 교파를 초월하는 공동체적인 책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인류의 위대한 종교에 공감하지 않고는 이런 책을 쓸 수 없다. 따라서 이 책은 유대교에 깊이 공감하며 집필되었다.


제I부 여전히 현존하는 과거

1장 기원

32 나는 이스라엘의 종교를 다룬다.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관문의 나라이고, 비교적 놀랍게 젊은 민족이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야의 민족들처럼 자신의 존재를 항상 주어진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사를 다른 민족의 역사처럼 신들의 신화적인 역사와 직접 연결하지 않으며, 민족이 후기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철저히 의식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세계의 창조로부터 바벨탑 건설에 이르는 기나긴 태고의 역사를 전제하며, 전설 속에 묘사된 족장들이나 조상들의 역사를 전제한다.


34 오늘날까지 이르는 이스라엘과 유대교의 역사, 신앙과 신학을 위한 아브라함의 근본적 의미는 히브리 성서의 첫 책에서 이미 인상 깊게 설명되었다.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 요소로 여겨지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가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가 될 수도 없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며, 하나님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 아브라함 종교를 처음부터 결정 짓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합일의 신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대면 관계다. 그러나 전능한 하나님과 선택된 인간 사이에 영원한 언약이 하나님에 의해 체결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관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할례라는 언약의 표지를 통해 확증되었다. 언약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두 가지 약속이 주어졌다. 그들은 큰 민족을 이룰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된 땅, 가나안 땅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38 성서의 높은 윤리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유일신론도 족장의 시대에는 지배적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분명히 여러 신을 전제했지만 오직 한 분 하나님, 곧 그의 하나님만을 가장 높고 가장 예배해야 할 권위로서 받아들인 일종의 단일신론자였다. 그리고 할례란 무엇인가? 할례는 그 당시에 완전히 새롭게 도입된 의식이 아니다. 할례는 원래는 단지 가나안에서만 단지 이스라엘의 셈족의 이웃사람들과 이집트 사람들 가운데서만 퍼져 있었던 관습이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와 호주에도 퍼져 있었던 (돌칼로 실시된) 매우 오랜 관습이다. 그렇지만 할례는 블레셋 사람과 바빌론 사람과 아시리아 사람 가운데서는 실시되지 않았다. 할례는 위생적·의학적 이유로나 사회적 이유(입회의식)로 또는 종교적 이유로 실시되었다. 이스라엘인 가운데서 할례가 가나안 정착 이래 실시되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는 이스라엘인의 가장 오래된 율법 조항에는 전혀 나오지 않으며, 오직 레위기에만 특별한 강조 없이 오직 한 번만 나온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멸망 후에, 그리고 할례를 실시하지 않았던 바빌론 사람의 포로가 된 후에(예전에는 당연히 실시되었던) 할례는 이스라엘 민족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특별한 종교적인 표지로 변했다. 이제부터 비로소 할례는 더는 제거할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표지로서, 그리고 결국엔 창세기 17장에 바로 율법의 규례로 설명되어 있는 언약의 표지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50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 이 세 아브라함 종교는 다 같이 근동 셈족 기원과 예언자적 특징을 지닌 윤리를 지향하는 유일신론적 세계 운동을 형성한다. 기원과 구조에서 볼 때, 이 세 종교는 인도나 중국의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 세 종교는 공동으로 종교 전반의 일치를 위해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50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결의한 문서들은 바로 기독교 안에서도 명백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라는 공동 유산을 되돌아 보려는 시도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가톨릭 교회는 아브라함과 그의 백성이 없이는 자신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고백한다. 비록 그 다음에 오는 문장은 너무 강하게 기독교인의 자기 이해에서 기초되고 표현되었지만 유대교인과 기독교인 간의 공통요소가 분명히 드러난다.


52 우리 지구의 가장 오래된 종교 중 하나인 유대교는 자신의 힘과 따뜻함과 웃음과 인간다움을 지니고 있는 종교다. 그렇다. 이 유대교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에게 얼마나 신비스럽고 독특한 종교사와 세계사의 현상인가! 유대교의 본질은 정의하기 어렵다. 이슬람교와 기독교와는 달리 유대교는 수백만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는 다 민족적 세력은 아니다. 유대 국가는 먼저 페르시아만에서 시작해 나일 강 계곡까지 이르는 시리아-팔레스타인의 '비옥한 반달'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한 아주 작은 땅에서 살아가는 아주 작은 문명국이다.


66 6 세기에는 오직 야웨 숭배가 마침내 이제는 다른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엄격한 유일신론으로 이어졌다. 바빌론 제국의 예루살렘 정복은 다신론적인 탈선을 징계한 것으로 해석되었고, 옛 문서들이 엄격한 유일신론적 방향으로 편집되었다. 이것은 다신론에서 단일신론을 거쳐 유일신론으로 넘어가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미 일찍부터 유일한 질투하는 야웨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75 모든 인류가 믿는 유일한이 하나님은 물론 모든 민족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히 선택했다. 한 분 하나님과 그의 민족과 땅,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신앙 중심에 도달한다. 유대교가 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고 합의를 이끌어 내려고 할 때, 이 중심은 근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2장 중심

79 조상에게 주어진 약속과 아브라함과 체결된 언약 외에도 언젠가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던 민족에 대한 계속 풍성해지고 깊어지는 회상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무엇이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든 이스라엘은 후기에 자신의 출생 시간을 민족의 선택과 구조와 구원의 시간으로 이해했고, 이런 사건을 '야웨'라는 이름을 지닌 한 분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했다.


100 유대교와 히브리 성서, 이스라엘의 신앙의 중심과 토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불변하는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역사적, 문학적 또는 사회학적 비평이 무엇을 비평하고 해석하고 축소하든, 표준적이고 역사적 영향이 막강한 이스라엘의 신앙 구조로 볼 때, 중심 신앙 내용은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다. 다음과 같은 고백이 없다면 이스라엘의 신앙이 없고 히브리 성서가 없으며 유대교도 없다. "야웨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다!" 이 '언약 조항'은 (결코 정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구약성서의 중심"이다. 야웨와 이스라엘, 이 두 초점을 중심으로 히브리 성서와 테나크, 구약성서의 모든 이른바 타원형의 증언은 움직인다.


3장 역사

115 이 초기 시대에는 부족 사회는 존재했지만 국가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인의 대가족, 씨족, 마을, 부족은 기원전 12/11세기에 아직 왕조 이전과 국가 이전의 상황에서 살았다. 그 당시에 땅은 존재했지만 확고한 경계선과 국가적 일치도 없었고, 따라서 최고의 군주도 없었다. 이 시대에 조직체로서 기능하는, 완결된 이스라엘 부족 연합이 존재했을 거라는 생각은 국가 정체성을 국가 이전의 사회로 거꾸로 투사한 것이다.


127 "성서에 나오는 다윗은 광채를 발하는 왕이자 카리스마적인 경건의 인물로서 모든 시대와 모든 종류의 유대교에 감동을 주었다. 기원전 2세기부터 다윗은 통치자들(하스몬 가문, 헤롯 가문)과 성직자들(족장들, 바빌론 포로기의 지도자들)에게는 왕조의 원형이 되었고, 종말론적인 성향을 띠는 열광주의자들과 혁명가들에게는 동기를 부여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전승을 공유하는 공동체 생활의 설립과 공고화에 관심을 갖는 집단의 종교적 전형이 되었다."


134 권좌에 오르자마자 솔로몬은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잔인한 행동이━많은 사람들이 그의 모략과 백성의 동의가 없는 일종의 반역에 관해 말한다━많은 칭송을 받은 그의 "지혜"와 "3,000개의 잠언과 1,005개의 시가"와 실제로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는 역사적으로 전혀 설명할 수 없다.


134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은 아마도 떠도는 전설이었을 것이며, 솔로몬이 썼다고 생각되는 문헌(잠언, 아가서, 전도서, 솔로몬의 지혜서)은 후기의 위서다. 역사적인 솔로몬과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후기의 솔로몬을 구분 것은 불가피하다.


136 다윗이 왕좌에 오른 지 겨우 70여 년이 지난 뒤, 기원전 927년 무렵에 다윗 왕국의 핵심 지역에서 (정복한 지역을 계속 잃어가면서) 비극적인 왕국 분열이 일어났다. 왕국은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되었고 두 왕국은 각기 다른 역사를 밟았다.


136 북쪽에는 더 크고 더 강한 이스라엘 왕국이 탄생했다. 중심 도시는 오므리 왕이 다시 건설한 전통적인 사마리아였다. 


136 이와는 반대로 더 동떨어져 있고 폐쇄적인 남쪽에는 예루살렘을 중심도시로 삼은 아주 작은 유다 왕국이 생겨났다. 그곳 사람들은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다윗 전통을 고수했다. 그곳 사람들은 강력해진 이집트가 팔레스타인에 다시 개입할 때까지 오랫동안 큰 세계의 정치와는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150 이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종말이 이제 확고한 사실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북왕국은 새로 태어난 후손을 볼 수 없었다. 북쪽의 열 부족은 멸망했고 오직 앗수르 영토 사마리아만이 남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한 도시만이 아니라 온 지역이 '사마리아'라고 일컬어졌고, '사마리아인', 곧 혼혈 백성이 그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바빌론과 중앙 아시아에서) 새로 이주해온 상층부 사람들과 지도자가 없는 토착민들로 구성되었다. 이 백성은 이제 야웨와 함께 새로운 이방신도 동시에 섬겼고, 그들의 혼합주의 때문에 남쪽 지역의 유대인에게 심한 경멸을 받았다.


151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이후로 여전히 버티고 있던 남왕국 유다만이 이 이름을 주장했다. 비록 유다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매우 허약한 국가였지만, 사람들은 이제 유다를 다윗 국가와 그의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의 종교적 전통과 예배의 유일한 계승자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예루살렘 사람들은 왕국 분열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북왕국 사마리아의 합병에 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154 남왕국의 멸망도 북왕국이 멸망한지 겨우 150년 만에 다가왔다. 요시아 왕이 바빌론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자 기원 전 598/597년에 바빌론 군대가 남왕국을 점령했고,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포위를 당하던 기간에 아버지 요아김을 이어 왕위에 올랐던 요아긴 왕이 성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파괴는 막을 수 있었다. 물론 도시와 성전은 약탈을 당했고, 성전의 보물은 바빌론으로 옮겨졌다. 젊은 왕, 그의 여인들과 상층계급에 속한 사람들(귀족, 사제, 수공업자)은 모두 바빌론으로 끌려 갔다. 그들은 자주 인용되는 말처럼 "상층부에 속한 만 명의 사람들"이었고, 그 가운데는 나중에 예언자로 활동한 에스겔도 있었다.


155 기원전 587/586년에 도시는 이집트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다시 포위를 당했고 마침내 공격을 받고 약탈을 당했다. 솔로몬 성전은 화염 속에서 무너져 내렸고, 바빌론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던 오래된 언약궤도 화염 속에서 함께 사라졌던 것 같다.


157 바빌론 포로생활은 거의 50년(586~538)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스라엘인들은━특히 이집트에서 살던 이스라엘 인들은━이미 이스라엘로 되돌아 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흩어짐. 디아스포라 Diaspora가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역사적 현실로 남아있다. 이 시기부터 이스라엘은 고국과 분산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197 몇 년 후에, 곧 132~135년에 모든 경고 신호를 무시한 두 번째 봉기가 일어났다. 이것은 메시아적 성향을 띤 승산이 없었던, 그리고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최후 봉기였다. 그렇지만 이를 우리는 별로 알지 못한다 


197 로마에 의해 완전히 계획적으로 다시금 진압되었던 이 봉기는 요새 50개와 요새화된 마을 1천 개 가량이 정복된 후에 재앙으로 끝났다.


212 바빌론 탈무드가 점점 더 많이 해석되고 편집되는 가운데, 오늘날까지 랍비 유대교의 종교법 결정을 위한 다시 말하면 정통주의 유대교(종종 보수주의 유대교도 그러하다)의 종교적 가르침과 종교적 율법을 위한 규범적인 토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 번째 패러다임에서 형성된 유대교 이해는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분명히 그 결과는 가르침과 실천에서 드러나는 전통주의로 나타났지만, 랍비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이것은 결코 부정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213 정통적 유대교에서 우선하는 관심 사항은 '정통 실천', 토라 아래 '올바로 살아가는 것', 일상 생활에서 토라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물론 신앙을 이탈한 자들 앞에서 올바른 삶은 교리적인 삶, 교리를 배우는 삶, 재판하고 배제하는 삶일 수 있다. 그렇지만 유대인의 정체성은 신앙의 내용이 아니라 실천적인 신앙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216 랍비 시대는━1세기부터 7/8세기까지━교부시대였기도 하다. 그리고 랍비가 정통적 유대교의 구조에 영향을 주었듯이, 교부도 정통적 기독교 곧 (유대인-기독교인 패러다임 이후에) 두 번째 그리스 헬라적 기독교 패러다임의 구조에 영향을 주었다.


221 이스라엘 유대인의 신앙의 중심과 토대는 언제나 동일하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 땅이다. 그러나 이미 다른 시대의 전환 후에도 그러했듯이, 새로운 세계 시대에서 이 신앙의 본질은 확신과 가치, 행동 방식의 다른 구조 안에서 실현되고, 다른 틀 안에서 새로운 다른 패러다임 안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단지 성전 대신에 회당이, 제단 대신에 성서가, 사제 대신에 랍비가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종교가 이제는 완전히, 그리고 철저히 토라의 종교로 변했다.


226 기독교 이전에 이방인이 유대인을 싫어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독교인과 교회의 반유대주의를 평가하려면 이 대답은 중요하다. 1. 유대인은 한 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경배하거나 예배할 수 없었고, 그렇게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포로기 후에 관철된 유대교의 배타적 유일신론은 이방인의 전통적인 다신론과 그리스인들의 통치자 숭배에 맞서 그리고 마침내는 특히 로마의 황제 숭배와 그와 결합한 신비적인 왕국이념(황제와 국가의 일치)에 맞서 자신을 주장해야 했다.


226 2. 자신의 구원의 역사에 관한 공격적인 설명은 다른 문화의 백성에게 특히 이집트 사람에게 모욕감을 일으켰다.


227 3, 고대 동방에서 널리 퍼졌고 이스라엘인에게는 많은 계명 중 하나인 할례는 우리가 보았듯이 바빌론 포로기 이래 비로소 유대인의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안디옥의 에피파네스와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할례를 금지한 이래 할례는 신앙의 시금석과 신앙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지만 비유대인에게 이 신앙의 상징은 오히려 수치의 상징이 되었다. 할례를 통해 유대인 남자는 피 흘리는 이런 의식을 낡고 야만적이고 멋없고 미신적인 것으로 거부한 그리스인이나 로마인과 신체적으로 철저히 구분되었다.


232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이교적 반유대주의와 기독교적 반유대주의 간의 불행한 구분을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 이전의 반유대주의가 간헐적이었고 장소에 제한되어 있었으며, 비공식적이었고 (이집트적인 형태와 그 갈래를 제외한다면) 이념적인 근거가 없었다면, 최소한 콘스탄티누스의 시대 이래 기독교적 반유대주의는 지속적이었고 일반적이었으며 공식적으로 부추겨졌고 원칙적이었으며, 이념적 체계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253 유대인은 기독교인처럼 정치적 권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교회가 유대인 예수의 이름으로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유대인을 얼마나 억압하고 박해했으며, 최종적으로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후계자 대리자 상속자로서 얼마나 거만하게 행동했는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이것은 기독교인에게도 부끄러운 일이다! 


254 '유대인'은 히브리 성서의 모든 심판과 저주의 발언을 받아야 할 버림받은 백성이고, 이와는 정반대로 교회는 히브리 성서의 모든 축복을 누려도 좋은 참된 이스라엘이다. 교회는 영적인 이스라엘이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에 유대 백성은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중지했기 때문에 그렇단 말인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형벌은 이제 마침내 인류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수난의 역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사랑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것은 기껏해야 유대인 개개인에게 베풀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264 '카발라'도 원래는 '전승'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 단어는 토라의 진정한 이론으로 여겨지는 유대교 전통의 고유한 비밀이론과 동의어가 되었다. 지도적인-유대교-카발라 학자 게르 숌 숄렘은 카발라가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통찰이나 그것에 관한 지식을 목표하는 영지주의Gnosticism의 유대교적 형태라고 명백히 설명했다.


317 비록 외형적으로는 특정한 의례를 여전히 지켰지만 사람들은 의례를 더는 믿지 않았다. 따라서 총제적인 동화 속에서 완전히 비종교적인 유대교가 생겨났다. 이런 발전에 따른 다른 결과로 많은 젊은 지성적인 유대인들이 19세기에 생겨난 온갖 종류의 새롭고 철저히 세속적인 유사 종교의 구원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또는━미래의 유대교를 결정할 힘이 될지도 모르는━시온주의다.


321 유대교는 다양한 종교, 다양한 민족, 다양한 인종으로 갈라졌다. 비극적이지만, 이 질문은 머잖아 삶과 죽음을 좌우하는 질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노선에 속해 있든, 모든 유대인은 19세기 말에 또 다시 완전히 다른 비극적인 발전에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유대인 학살 후에 계몽되고 문명화된 유럽에서 그 누구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실이 지금 일어났다. 그것은 반유대주의가 또 다시 급진적으로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제 생물학적·인종적 근거를 가진 반유대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 결과는 끔직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새로운 유대인 차별과 유대인 추방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조직적인 유대인 말살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제II부 현재의 도전

1장 홀로코스트에서 이스라엘 국가로

351 히틀러의 개인적인 반유대주의는 본질적으로 육체적 제거가 아니라 분리나 개종을 목표로 삼았던 교회의 종교적 반유대주의보다 더 큰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본질적으로 유대인 의사들이 아니라 유대인 고리 대금업자들을 목표로 삼았던 경제적 채무자들의 사회적 반유대주의보다 더 큰 것이었다. 그렇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는 생물학적 인종적인 것이었으며, 따라서 총체적인━오직 유대인만을 겨냥한━것이었다.


356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전체주의적이고 극도로 반민주적이고 반유대적인 성향을 지녔던 히틀러의 인성과 그의 고백문서 《나의 투쟁>과 당의 강령("유대인은 결코 국민이 될 수 없다")은 처음부터━1938년에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1933년에━보편적으로 알려진 내용들이었다. 만약 방금 소개한 지방의원처럼 결과에 개의치 않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고 말한 몇몇 다른 용감한 의원과 시장, 공무원, 군인, 경제 지도자, 대학교수가 있었더라면 많은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357 만약 독일 주교들이━1933년 3월 23일에 히틀러가 통치를 선언한 후에 놀랍게도 국가 사회주의에 항복하지 않고━나치의 공개적인 반유대주의적 계획을 경고하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행된 테러와 폭력에 즉각 공개적으로 항의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357 전쟁 후에 몇 안되는 교회의 저항 운동가 중 한 사람인 마르틴 니묄러 목사가 질문했듯이, 만약 독일의 개신교 목사 1400명이 침묵하거나 협력하지 않고 처음부터 나치 정권에 맞서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정치적으로 저항했더라면 무슨 일이 발생했을까?


361 가톨릭 교회가 주로, '제국 협약' 때문에 히틀러에게 항복하고 광범위한 지지를 열광적으로 보여 주었다면,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처음부터 국가 사회주의 운동에 공개적인 지지를 표현했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지지는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무신론에 대한 거부를 동시에 의미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제국 협약'이 있었다면, 많은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약속된 '제국 교회'가 있었다.


376 다음과 같은 사실은 너무나 역설적이다. 비록 교황 파첼리가 전쟁이 끝난 1949년에 (교황청 선거에 대한 이탈리아인의 근시안적인 관심 때문에) 세계의 모든 공산주의 당원을 단숨에 파문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지만, 그는 히틀러와 히믈러, 괴벨스와 보어만(괴링과 아이히만과 나치의 다른 지도부 사람은 명목상 개신교인이었다)과 같은 매우 유명한 가톨릭 신자들과 집단 살인자들은 파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재판하지도 않았다. 


413 순수한 종교적 시온 기대오는 정반대로 시온주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운동이다. 이 운동은 '아래로부터', 곧 인간의 활동과 행동을 통해 (팔레스타인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유대인 국가를 설립하기를 원한다. 시온주의는 이념과 감정에 옛날의 메시아주의를 덧칠하려고 하지 않는다.


413 정치적 시온주의는 처음부터 인종적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8세기 유대교 계몽주의와 연관하여. 그리고 19세기 유럽 민족들 가운데서 일어난 국수주의와 낭만적인 민족주의 이념과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다.


413 정치적·사회적 시온주의는 종교적 약속을 점점 더 세속화하고 정치화한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운동이다. 여기서 특히 시온주의의 세 번째 선구자로 언급해야 할 인물은 사회주의적인 랍비 모세스헤스다. 그는 파리에서 트리어 출신 세례받은 유대인 칼 마르크스에게 영감을 주었다.


422 '민족의 고향!' 이것은 확실히 세계 시온주의의 첫 번째 요구였다. 그 요구는 물론 그 당시에 강대국이었던 영국이 정치적으로 적합한 문서로 마침내 추인해 주었다. 시온주의자들은 목적을 달성했는가? 이른바 이 밸푸어 선언은 명백하게 보였지만 숨겨서는 안 될 추가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선언은 다음과 같은 내용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에 존재하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를, 또는 다른 나라에 유대인들이 지닌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미리 결정하려는 시도는 당연히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바로 여기서 팔레스타인에 존재하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라는 표현은 날카로운 갈등을 낳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많은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오직 자기 자신만의 권리만을 생각했고 다른 사람의 권리 곧 1천 년 이상 살아온 아랍 민족의 권리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29 물론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은 국가적으로 또는 준-국가적으로 조직될 수 없었다. 그들은 16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오늘날의 국경선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영국과 프랑스가 만든 것이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처음에 독립적인 국가를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도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두말할 것도 없고━시리아와 이집트 또는 메소포타미아의 아랍인과도 달랐다. 그리고 1880년 이래 이주해온 수많은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곧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민족을 촉발했다. 유대인이 단지 백성과 민족의 특성만이 아니라 이름과 존재까지 부정하려고 애썼던 팔레스타인 민족이 언제 민족의 자결권을 요구하게 될는지는 단지 시간 문제였다.


445 유대교에서 신앙과 민족과 땅은 이제 한 덩어리다. 유대인의 존재는 종교적으로나 인종적으로 충분히 정의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보았듯이, 유대교는 온갖 재앙을 겪었지만 강력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 학자들의 공화국으로 성전과 국가가 없던 거의 2천 년의 세월을 놀랍게도 잘 극복해왔다. 비록 사람들이 상당히 정통적이고 좌파적·세속적인 이스라엘 국가를 언제나 문제로 생각해 왔지만 이스라엘 국가는 세계 유대교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2장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의 논쟁

453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의 대화에서 처음부터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단지 과거에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예수를 연구하는 유대교인들도 후기의 교회 교의학이 주장한 그리스도를 확실히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목수의 아들이었던 나사렛 예수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이라고? 이것을 받아 들일 수 없다고 신앙적인 유대인들은 말한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468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선포는 결국에는 폭력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칼을 잡은 자는 칼로 망할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폭력 포기를 목표로 삼는다.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라. 우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 하라.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혁명가였다. 그의 요 구는 정치적 혁명가들의 요구보다 본질적으로 더 급진적이었고 제도화된 질서와 사회 정치적 혁명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보다 더 과격했다.


486 재판 절차의 상세한 내용이 어떻게 설명되든 복음서의 저자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듯이 예수는 유대교 당국에 의해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졌고, 로마 제국의 관습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혔다.


486 그렇다면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유대교 쪽에서 자주 주장하듯이, 로마법이 홀로 예수를 죽였는가? 로마인들은 예수를 죽였지만 유대인들은 고난의 길을 걷는 예수를 애도했는가? 그러나 이러한 역할 분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단순하게 설명한 것으로서 믿기 어렵다. 이미 복음서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듯이, 로마 권력자들의 책임을 덜어주는 해석은 분명히 모순에 부딪친다. 그렇지만 복음서는 로마인이 홀로 주도하고 홀로 책임을 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492 베드로와 바울과 야고보, 편지와 복음서와 사도 행전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일치한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하나님 곁에 영원히 살아있다. 그는 우리의 의무이고 소망이다. 신약성서 공동체에 속한 유대인과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들은 죽임을 당한 자가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고 살아났고,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그처럼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에 사로 잡혔다.


493 하나님이 죽은 자를 일으키신다는 부활 신앙은 완전히, 그리고 철저히 유대교적인 것이다. "야웨여, 죽은자를 살리시는 당신을 찬양하나이다"(이것은 두 번째 축복의 문구와 비슷하고, 장례식의 문구와도 비슷하다), 단지 예수의 부활을 말하는 이런 고백의 내용만이 유대교적인 것이 아니다. 양식도 유대교적인 것이다.


496 신약성서의 가장 오래된 증언은 예수의 부활을 이 땅의 생명으로 되살아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렇다. 묵시 문학적 유대교적인 기대의 지평에서 볼 때 그것은 분명히 처형을 당하고 장사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곁으로 높이 들린 사건이다. 예수는 자신이 '압바',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 하나님 곁으로 높이 들렸다. 그것은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듯이 단지 영혼의 불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전체가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 인간은 항상 정신적·육체적 단일체로 생각 되었기 때문이다.


496 부활은 현세의 시공간적인 생명으로 되돌아온 사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죽음은 취소된 것(시체의 소생)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극복되었다. 부 활은 완전히 다른, 허무하지 않은 영원한 하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사건이다.


497 부활은 긍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허무 속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음 안에서,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파악할 수 없는 포괄적인, 최후와 최초의 현실 속으로 들어갔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칭하는 가장 현실적인 현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인간이 그의 종말, 곧 그의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할 때,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가? 허무가 아니라 모든 것, 곧 하나님이 기다린다. 믿는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안다. 죽음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통로이고 하나님의 은밀한 품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500 부활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를 메시아라고 부르는 칭호는 이제 깊은 의미와 진정한 신뢰성을 얻게 되었다. 나는 기독교 신학자로서 이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신들의 신앙 전승에 근거하여 부활 신앙에서 일정한 결론을 이끌어 낸 사람들은 바로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 추종자들이었다.


500 부활한 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매우 긴박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시편 110장 1편에서 찾았다. "너는 나의 우편에 앉아라." 하나님의 우편에 높이들린자는 이제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한 자로 간주 될 수 있었다!


527 그 당시에도 강력히 선교를 추진하고 있었던 유대교가 보편적인 유일신론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종교가 되지 못하고, 기독교가 보편적인 인류의 종교가 된 것은 바울의 공헌이었다. 사도 바울의 세계사적인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가는 곳마다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설교했지만 대부분 그들에게 배척을 당한 바울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유대인의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길을 터놓았고, 이로써 그는 기독교에서 최초로 패러다임 전환(유대인 기독교에 헬레니즘을 선호한 이방인 기독교로의 전환)을 이룩했다.


528 이방인이 먼저 할례와 그들에게 생소한 유대교의 정결 명령, 할라카의 음식 규정과 안식일 규정(율법의 행위)을 수용하지 않고도 이스라엘의 보편적인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대항하여 투쟁할 정도까지 바울은 패러다임 전환을 이룩했다.


560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은 신약성서에 따르면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이런 신앙을 공유한다. 성령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과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활동적인 능력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교인과 기독교인, 무슬림은 하나님의 영에 대한 이런 신앙도 공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한 분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 예언자 종교는 이 결정적인 차이점을 두고 계속 대화해야 할 것이다. 


560 기독교인들과 특히 기독교 신학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매우 자명하게 속죄의 죽음이며 하나님의 가장 높은 사랑으로 여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이를 위해 다시금 요한 복음의 이 문장을 즐거이 인용하지만, 깊은 성찰 끝에 인용한 것은 아니다. 


560 전적으로 유대교 전통 위에 서 있는 핀카스 라피데도 이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피조물과 화해하려고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고 하나님이 세계의 주로서 피 흘리는 희생이 없이는 그 어떤 인간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유대교인에게 이해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성서와 모순된다."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은 하나님이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일이다.


3장 근대의 극복

580 자신의 세계에 새로운 시대가 다가올 때 유대인의 반응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미 이런 이유 때문에 '세계적 유대교'는 존재하지 않았고 아돌프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증오와 유대인 망상에 현혹되었던 많은 사람이 생각했던 '세계적 유대교의 음모'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나 지금도 유대교를 하나의 집단으로 이해하고 다양성을 간과하는 것보다 더 잘못된 생각은 없을 것이다. 다양한 노선들과 집단들, 분파들이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다. 더 포괄적이고 더 객관적으로 말한다면, 오늘날의 유대교 안에도 경쟁적인 패러다임의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587 지금도 여전히 (통계적으로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많은 유대인은 자신이 유대인임을 인정하지만 유대인의 종교(유대교)와 유대교적 신앙은 부정하고 있다. 이미 과거 한 세기 동안에도 철저히 동화 노선을 걸어온 세속적 유대인들이 많았다(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사이에도 얼마나 많은가!). 이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러한 유대인들은 외형적 내면적으로 게토에서 벗어나와 근대에 완전히 적응했다. 그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보이는 유대교의 제의적 율법과 외형적으로 차별하는 모든 것을 지키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종교가 없는 근대적 패러다임을 대표한다.


587 그렇지만 이와 같은 비종교적 유대인이 처음부터 아무것도 믿지 않거나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으려는 허무주의자는 아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인본주의자거나 도덕주의자거나 사회주의자다. 그들은 윤리적 목적을 철저히 추구하고 윤리적 기준을 적용하며, 실천적으로는 인본주의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사회적인 사업을 위해 힘껏 헌신하고 있다.


제III부 미래의 가능성

1장 포스트모던 시대의 유대교

644 만약 새로운 포스트모던적 정황이 다종교적 세계사회를 의미한다면, 근대의 진보 이념의 종말과 더불어 종교, 곧 유대교도 다시 새롭게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만약 홀로코스트가 근대의 심연이고 종말이었다면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은 포스트모던의 출발점이고 기원이다. 유대교와 포스트모던 신학이 재앙(쇼아)으로 여전히 부정적인 특징을 띠고 있듯이, 이것은 이제 유대 국가의 재 탄생으로 긍정적인 특징을 띠게 된다.


663 히브리 성서가 증언하는 유대교의 근원적 중심은 모든 역사적 비평에도 불구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모든 시대적 변화와 패러다임 전환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과 한 백성 이스라엘이다. 이 두 가지 초점을 중심으로 이른바 모든 타원형적인 증언이 맴돌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히브리 성서의 증언과 최종적으로는 미쉬나와 탈무드, 중세 유대교의 증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 요소와 주요 이념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을 포함한다.


2장 삶의 갈등과 율법의 미래

729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신의 특별한 위치를 잃어버리고 말았는가? 바울은 실제로 그의 유언이 되어버린 로마 교회에 보낸 자신의 편지에서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성실함에도 자신의 신실하심을 거두지 않으신다. 기독교인들은━바로 여기서 바울은 유대인이 치른 대가를 바라보는 기독교인들의 자만에 대해 경고한다━다음과 같은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선택은 여전히 유효하고 포기 될 수 없으며, 철회 될 수 없다. 비록 그리스도 이후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유효성을 다른 빛 아래에서 보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바꾸지 않으셨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하나님에게 선택된 백성,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들이다.


737 바울의 기대는 바로 이것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채워질 때 모든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될 때, 이스라엘의 믿지 않는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일어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시온에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날 것이다. 바울은 임박한 종말론적 기대의 지평 앞에서, 그리고 가급적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는 열심 속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 개종에 앞서 해야 할 일은 언급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에게 일어날 하나님의 행위를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도 교회의 유대인 선교는 불필요하다, 따라서 참된 믿음을 향한 이스라엘의 회심 문제를 교회가 독단적으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이 문제를 자신있게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하며, 종말에 시온에서 오실 구원자로 나타날 그리스도에게 맡겨야 한다.


3장 유대인과 무슬림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의 미래

775 홀로코스트를 문제가 많은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해도 좋은가? 비록 불편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의 경고의 말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생존자들의 홀로코스트 트라우마가 오늘날 모든 악을 일반적으로는 아랍인들에 투자하고 특별하게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투자하는 사후에 태어난 자들의 홀로코스트 증후군이 되어서는 안된다. 


796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지 이스라엘 민주주의의 신뢰성만이 아니다. 유대인 신앙의 신뢰성도 역시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기 때문이다. 십계명에서 이웃의 생명과 재산도 존중하기를 요구하는 신앙,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종교적인 유대인이나 비종교적인 유대인에게도━(유럽에서 들어온) 민족을 믿는 신앙으로 대체 되어도 좋은가? 단지 25~30%의 유대인만이 자신을 종교적인 유대인이라 부른다. 그런데 많은 비종교인들에게 종교는 아마도 그들이 거부한 종교적 정통주의를 의미 할 것이다.


815 외교적으로 거리를 둔 채 이스라엘 국가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정치적이고 신학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이 국가는 지정학적인 실로 자리하고 있다! 또한 유대교는 단지 종교이기만 한 게 아니라 민족이기도 하다. 아랍인들과 바티칸도 이스라엘 국가를 외교적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인정은 단지 암묵적 일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평화로운 협력의 토대로 당연히 공식적이어야 한다. 


824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본질적인 문제는 일차적으로 사회적 영역이 아니라 종교 정치적 영역에 놓여 있다. 이 도시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이 질문에 역사적으로는 대답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최근에 이루어진 발굴 결과는━건축물에 이르기까지━유대 민족의 역사를 반영하기보다는 수백 년 동안 이곳을 다스렸던 다양한 통치자들 (가나안, 유대인, 신 바빌론 제국, 페르시아, 셀류쿠스 왕조, 헬라, 유대-마카비 왕조, 로마, 기독교-비잔틴 제국, 이슬람-칼리프 왕조, 중세 기독교, 투르크 이슬람, 영국의 통치자들, 그리고 이제는 다시금 유대인의 통치자들)의 역사를 더 많이 반영하기 때문이다. 


826 예루살렘의 세계사적 운명은 그것이 3대 아브라함 종교 모두에게 똑같이 거룩한 도시라는 사실이다. 아브라함 때문에 3대 종교 모두에게 그러하다.


826 유대교인에게는 다윗 왕이 중요하다. 그는 이 도시를 거대한 왕국의 중심으로 삼았다. 기독교인에게는 나사렛 예수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이곳에서 기념한다. 무슬림에게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그가 여기서 하늘로 승천했다고 믿는다(이것은 특히 이슬람교의 신비 문학에서 중요하다).


830 기독교인의 소유 주장과 유대교인과 무슬림의 소유 주장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왜 그러한가? 유대교인은 성서의 약속과 과거 수백 년 동안 소유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수도로서 예루살렘을 요구한다. 무슬림도 역시 종교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나중에 수백 년 동안 소유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예루살렘을 요구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예수의 활동 장소였던 예루살렘에 대한 주권을 종교적인 근거로 요구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예루살렘을 국제도시로 만드는 방법을 통해서도 그렇게 할 수 없다.


4장 홀로코스트와 하나님 담론의 미래

846 이 세계의 악을 바라보면서, 정의롭고 선한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케케묵은 신정론 답변은 이 고난 앞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인간의 자유를 위해 하나님이 악을 허용했다거나 유대인이 죄 때문에 형벌을 받았다거나, 이승이나 저승에서 보상을 받게 된다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를 구원하려고 고난을 받는다거나,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통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선한 의도 속에 주장되는 이 모든 명제는 홀로코스트 사건의 극악 무도한 성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882 엄청나게 부정적인 현실 앞에서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에게 제공된 신학적인 해결책은 하나의 중간의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아우슈비츠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를 발견하며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자들의 하나님 부재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우슈비츠를 삼위일체론적 사변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하나님 안의 고난 변증법으로 들어올렸지만 고난의 최종적 원인을 역시 설명하지 못하는 자들의 하나님 신앙이 있다. 중간에 있는 이 겸손한 길은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신뢰의 길,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성적인 하나님 신뢰의 길이다. 이 길은 끝없는 절망의 어둠에도, 그리고 바로 그 속에서도 여전히 빛이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길이다.


에필로그

903 종교 간의 모든 대화의 전제는 종교의 자기 비판이고 기독교의 자기 비판이기도 하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바로 공식적인 로마 가톨릭 측에서는 지금까지 이러한 자기 비판이 전혀 없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사람들이 이슬람교의 (부분적으로는 유대교의) 광신적인 근본주의를 불평하지만 근본주의라는 단어가 성서의 문자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안정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려는 개신교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914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은 히브리 성서와 신약성서에 근거하여 이 땅에서 마지막 식민지가 되지 않으려는 아랍 민족과 이슬람 민족의 존엄성을 위해 함께 헌신해야 한다.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꾸란과 신약성서에 근거하여 20세기의 마지막에 다른 민족보다 더 많은 고난을 당하고 거의 말살될 뻔했던 유대 민족의 생존권을 위해 함께 헌신해야 한다. 유대교인과 무슬림은 히브리성서와 꾸란에 근거하여 근동과 중동의 몇몇 나라에서 위협 받고 있는 기독교인들 공동체의 자유를 위해 함께 헌신해야 한다.


916 미래를위한 나의 소원은 다음과 같다. 종교적 소통에 기여하지 않는 회당이나 교회나 모스크도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회당과 교회와 모스크는 평화를 위해 단지 기도 할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일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에게는 비전이 필요하고 상상력과 용기와 지칠 줄 모르는 과감한 행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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