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8. 5. 30.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 톰 라이트 지음, 양혜원 옮김/IVP |
서문
1부 배경 설정
1. 잘 차려 입었는데 갈 곳이 없다?
2. 낙원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다?
3. 역사적 배경에서 살펴본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희망
4. 부활절의 특이한 이야기
2부 하나님의 미래 계획
5. 우주의 미래: 진보인가, 절망인가?
6. 이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
7. 예수님, 천국, 새 창조
8. 그분이 나타나실 때
9. 심판하러 오시는 예수님
10. 우리 몸의 구속
11. 연옥, 낙원, 지옥
3부 희망의 실천: 부활과 교회의 사명
12. 구원을 다시 생각하다: 하늘, 땅 그리고 하나님 나라
13.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건설
14. 사명을 위한 교회의 재구성(1): 성경적 근거
15. 사명을 위한 교회의 재구성(2): 미래를 살다
부록: 두 종류의 부활절 설교
1부 배경 설정
1. 잘 차려 입었는데 갈 곳이 없다?
20 이 책은 종종 완전히 별개로 다루어져 온, 그러나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내가 열렬하게 믿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첫 번째는 "기독교의 궁극적인 희망은 무엇인가?"이다. 두번째는 "현재 세계 안에서의 변화, 구출, 변혁,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떤 희망이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주된 대답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의 희망을 "천국행" 혹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구원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 두 질문은 서로 상관이 없어 보일 수밖에 없다.
20 "기독교의 희망"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는 희망이라면, 그리고 그 희망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이미 실현이 되었다면, 이 두 질문을 서로 연결시킬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21 비기독교 세계, 특히 현대 서구의 비기독교 세계는 자신들이 무엇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혼란을 느낀다. 사람들은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그저 가장 일반적인 의미의 '죽음 이후의 삶'을 신봉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부활, 심판, 예수님의 재림 등과 같은 좀 더 특수한 개념들이 서로 어떻게 맞물리고 해석이 되는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41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통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아예 모른다는 놀라운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형태의 '생존'도 직설적으로 부인하는 것과 대립되는 의미로서 죽음 이후의 삶을 믿는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어떠한 종류든지 죽음 이후의 삶은 기독교적인 것과 상당히 비슷한 종류일 거라고 생각한다.
41 대부분의 현대 서구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삶'이라는 일반적인 개념 안에도 다양한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리하여 여러 개념를 이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믿음에 매우 중요한 차이를 가져오며,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차이를 낳는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2. 낙원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다?
49 전통적으로 우리는 기독교가 구원받은 혹은 복받은 사람들이 가게 될 위에 있는 천국과 악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게 될 아래에 있는 지옥에 대해 가르친다고 생각해 왔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교회의 공식적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52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기에 몇 가지 것들의 혼란스런 조합이다. 또 한편으로는 과거의 천국-지옥 관점이 공격을 받은 까닭에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 세기 동안 나타난 역설적인 현상은 지옥을 부인하는 자세가 확고해지면서 역으로 천국에 대한 확신은 약해졌다는 것이다.
53 연옥이란 말하자면, 죽을 때도 우리는 여전히 창조자를 만날 준비가 덜되어있을 것이기 때문에 빛을 향해 성장해가는 정화의 시기가 필요한 것이라는 주장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오늘날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죄의 일소'라든가 그 외에 다른 불편한 것들을 강조하는 표현보다는 '정화'라든가 빛을 향해 성장해 간다는 식의 표현을 선호하는 경향이있다) 많은 사람들이 만인구원설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 님의 사랑에 굴복할 때까지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믿음을 선택할 기회를 계속해서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다.
68 내가 생각하기에는 종교가 육체를 비롯한 창조질서 전반을 플라톤주의식으로 비하하면서 그것을 이 땅의 헛된 그림자로 간주하고, 죽을 때는 그 모든 것을 기쁘게 두고 떠날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을 때 바로 그렇게 되는 것 같다. 곧 풀려날거라면 왜 굳이 현재의 감옥 상태를 개선하려 하겠는가? 곧 낭떠러지 아래로 내동댕이쳐질 기계에 기름칠을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바로 '구원'이 현재의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진심으로 믿는 일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는 영향이다.
3. 역사적 배경에서 살펴본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희망
78 기독교의 복음은 그 사건을 가장 상세하게 기록한 문서가 생기기 약 50년 전에 일어났고 또 그 기록들마저도 모두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어떤 사건을, 그 사건이 없으면 아예 복음 자체가 없었을 핵심적인 사실로 단언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같은 기록의 불일치 때문에 그 첫 번째 부활절에 무슨 일이 정말로 일어나기나 한 것인지 의심이 생긴다고도 했다.
78 네 개의 복음서에는, 그리고 아울러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는 비트겐슈타인의 부지깽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에 필적 할만한 1세기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제 나의 질문이 명쾌해졌다. 그 사건은 어떤 사건이었는가? 도대체 부활절 아침에 그 무덤은 어떤 식으로 비어있었단 말인가?
80 빈 무덤과 육체의 부활을 입증하는 혹은 그것을 반증하는 역사적인 근거를 댈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언제나 믿거나 말거나의 문제가 될 것 인가? 역사는 어느 정도까지 해답을 줄 수 있으며, 거기에서 믿음의 역할은 무엇인가? 또 그 둘은 서로 어떻게 작용하는가? 문제는 단지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이며, 지금 이 시점에서는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이 의문의 대상이 된다.
82 고대세계에서는 '부활'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나 라틴어, 그에 상응하는 다른 언어로도 죽음 이후의 삶을 의미하는 단어로 쓴 적이 없다. '부활'은 '죽음 이후의 삶'이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건간에 그것이 있고 난 이후에 오는 새로운 육체적 삶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모든 이교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활을 부인하기 위해서든 (일부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활을 지지하기 위해서든 고대인들이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그것을 두 단계로 보았는데, 육체적 죽음이라고 하는 중간 단계의 시기가 먼저 오고 그 이후에 새로운 육체적 생명을 의미하는 부활이 있다고 보았다.
83 부활은 죽음 직후에 사람들이 들어가는 상태를 극적으로 혹은 생생하게 표현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 이후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일어날 수 있는 ━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 일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의미는 후기 기독교가 2세기의 영지주의와 결합하기 이전까지 고대 세계 안에서 변하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대부분의 고대인들은 죽음 이후의 삶을 믿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복잡하고 매혹적인 신앙들을 발전시켰는데, 우리는 이제 막 그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를 (그리고 비록 그 연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혹 조로아스터교 정도까지) 제외하고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없었다.
83 부활은 육체를 의미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해야 하는데, 많은 현대의 글들이 계속해서 부활이라는 단어를 대중적인 의미의 죽음 이후의 삶과 같은 뜻의 단어로 쓰면서 사람들을 크게 오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90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미래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는 신앙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 첫 번째는 죽음과 (어떠한 형태이건간에) 그 직후의 상태로 머무는 단계이고 두 번째는 새롭게 재창조된 세상에서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사는 단계다.
96 부활절이 있기 이전 1세기 유대인들은 그 누구도 '부활'이 하나님 나라가 드디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는 갑작스런 사건의 일부로서,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혹은 인류 전체에 일어나는 광범위한 사건 이외에 다른 모습을 지닐 것이라고는 생각 지 못했다.
96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부활'은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죽음을 면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차후에 영광스럽고도 존귀하게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 이후에 다시 육체의 삶으로 돌아 오는 것'을 의미했다는 점이다.
96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변모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때까지는 그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 보았던 것처럼)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아해했던 것이다. 부활을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 전체가 태어나는 사건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생애의 한 부분으로 이야기하게 되는 그러한 부활이 무엇인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100 바울 이전에 확립된 초기 신경(creed)의 단편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아주 일찍부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부활 때문에 예수님이 참된 메시아라고 단언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곁가지의 이야기이지만 중요한 이야기로서 부활이 없다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사실을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4. 부활절의 특이한 이야기
111 그 몸은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죽은 그 몸의 재료들이 다 사용된 육체다. 그래서 그 무덤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또한 그 몸은 잠긴 문도 통과해 다니고, 사람들이 늘 알아 보는 것도 아니고, 마지막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을 나누는 것이라고 대개 생각했던 얇은 막을 통과해 하나님의 공간, 즉 '천국'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전례가 없는 이야기다.
116 한편으로는 그 만남이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빈 무덤이 반드시 그러한 신앙이 생겨난 이유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기록된 이유를 설명 할 수 있다.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그러나 두 가지를 같이 모아 놓으면 초기 기독교 신앙의 발생이 완전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설명된다.
125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다른 곳에서도 때때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의 한 사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점을 자주 간과한다. 그들이 그 사건을 언젠가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일의 첫 번째 사례, 보증 사례로 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의 유추로서 지금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129 인생에서 우리가 내리는 가장 중요한 결정들은 후기 계몽주의의 왼쪽 뇌의 합리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세계를 단순히 관찰하는 것에만 의존하는 순수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를 논증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29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지성을 주셨다. 이러한 질문은 적절하게 제기되어 온 질문이다. 기독교는 역사에 호소하고 역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134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초월하지만 또한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믿음은 모든 역사와 과학을 거절하는 맹목적 신앙이 아니다. 혹은 역사와 과학 모두와 단절된 채 전적으로 다른 영역 안에 존재하는 신앙도 아니다.
134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패러다임에 맞지 않는 무엇인가가 나타났거나 이런 저런 방법을 다 시도해 보았는데도 해결되지 않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 한 가치는 바로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그 때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큰 전체 안에 그것을 포함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도마가 받은 도전이다. 도마가 역사적·과학적 앎을 초월하면서도 포함하는 믿음의 인식론을 대변한다면, 바울은 희망의 인식론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36 반복해서 말하지만 부활은 현 세계 안에서 일어난 매우 독특한 사건이 아니다 (비록 그러한 면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부활은 원칙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탄생하게 되는 새로운 창조세계의 결정적 사건이다 우리가 이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는 것은 둘째치고 그것을 잠깐보기만 하려해도 우리에게는 다른 종류의 앎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참여시키는 객관적 자세로 연구하는 유사 과학 연구의 냉정한 평가만이 아니라 전 인격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하는 인식론이 필요하다.
2부 하나님의 미래 계획
5. 우주의 미래: 진보인가, 절망인가?
147 인간의 프로젝트가 그리고 이 우주의 프로젝트가 계속해서 자라고 발전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할 것이며, 그 결과 인간이 무한히 개선되면서 유토피아를 향해 갈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르네상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8 세기 유럽의 계몽주의가 그러한 생각의 결정적인 견인차가 되었다.
151 진보의 신화가 갖는 진짜 문제는, 내가 조금 전에 암시한 것처럼 그것이 악의 문제를 다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다룬다'는 말을 할 때는 그저 지적으로만 다루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악을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신화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심각한 악의 문제를 다룰 수가 없다.
152 진보의 신화는 세 가지 이유에서 악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 첫째, 악을 막을 수가 없다. 만약에 진화가 우리에게 히로시마와 강제 노동 수용소를 주었다면 진화를 좋다고만 할 수는 없다.
153 둘째, 만약 진보가 결국 우리를 유토피아로 데려간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악의 도덕적 문제는 다뤄지지 않는다.
153 만약 우리가 테야르드 샤르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그 모든 것의 과정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자신의 왕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고통받은 사람들의 뼈와 재 위에다가 그 왕국을 세우는 신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신이란 말인가?
154 세 번째로 진보의 신화는 악 자체의 성질과 힘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핵심적 중요성을 보지 못한다. 십자가는 약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인데 그 부정 다음에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긍정이 열린다.
6. 이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
164 악은 피조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세계를 만드신 하나님 대신에 그 자연 세계의 어떤 부분들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반항적 우상 숭배에 있다. 그 결과 이 우주가 엉망이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리해서 지혜롭게 창조계를 다스리는 대신에 창조주를 무시하고 하나님보다 요구가 덜한 어떤 것, 그들에게 권력이나 쾌락이라는 단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줄 어떤 것을 예배하려고 한다.
165 구속의 요점은 있는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속박된 것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악이 물질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항에 있다고 분석하기 때문에, 인간과 이 세상이 속박되어 있는 원인 역시 악이 형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165 노예됨의 상태는 바로 죄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구속이란 궁극적으로 영이나 혼의 선함만이 아니라 새로운 육체를 입은 삶도 포함 할 수밖에 없다.
177 빌립보서 3장에서처럼,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이 땅으로 내려온다. 실제로 교회 자체가 천국의 예루살렘이 이 땅으로 내려온다. 이러한 관점은 온갖 종류의 영지주의, 즉 이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 하늘과 땅이 분리되는 것을 최종적 목표로 보는 모든 세계관들을 궁극적으로 거절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주기도문에 대한 최종적 응답이다.
7. 예수님, 천국, 새 창조
185 왜 승천은 현대 서구 교회에서 그토록 어렵고 인기 없는 교리가 되었는가? 그 이유는 합리주의적 회의주의가 그것을 비웃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유는 승천이 우리에게 이 우주 전체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고, 또한 우리가 교회와 구원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86 하늘과 땅은 공간이나 물질의 동일 연속체 안에 있는 두 개의 다른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속한 서로 다른 두 개의 영역이다. 그리고 하늘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하늘은 땅과 접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존재는 동시에 땅의 그 어느 곳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승천이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지구상의 특정 지점으로 여행하지 않아도 그분을 만날 수 있고 그 분께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 하늘은 말하자면 땅의 통제실이다. 그곳은 최고 경영자의 사무실이며 지시가 내려지는 곳이다.
193 승천을 통해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간과 우리의 공간 ━ 다시 말해서 하늘과 땅 ━ 은 비록 매우 다르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하늘'에 대한 논의는 단지 우리 자신의 영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은유적인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간과 우리의 공간은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맞물려 있고 교차하는데, 심지어 그 두 개가 각각 구분되는 정체성과 역할을 유지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서로 맞물려 있고 교차한다.
9. 심판하러 오시는 예수님
227 믿음에 의한 칭의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게 될 미래의 판결을 예견하면서 현재에 일어나는 일이다. 복음을 믿으면 그 사람은 자신의 부모가 누구이건간에 이미 하나님의 가족이며,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죄를 용서 받았고, 미래에는 바울이 말한대로 "이제 결코 정죄함이 없는"(롬8:1) 상태가 된다고 하나님은 미리 선언하셨다.
227 바울에게는 현재 시점의 믿음에 의한 칭의와 미래 시점의 행위에 따른 심판 사이에 아무런 충돌이 없었다. 그 두 가지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의존해 있다.
10. 우리 몸의 구속
255 '불멸의 육체'를 믿는 이러한 신앙과 불멸의 영혼을 믿는 신앙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225 왜 우리에게 새로운 육체가 주어지는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의하면, 새로운 육체의 목적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지혜롭게 다스리는 것이라고 한다.
257 부활은 언제 일어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죽으면 곧바로 부활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만약 그리스도가 첫 열매라면 그 분께 속한 사람들은 "그분이 오실 때에"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는 그 사건은 분명히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265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부활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이것이 바로, 죽으면 모든 순간이 현재인 영원으로 넘어가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가톨릭과 개신교 동구와 서구의 모든 주류 정통 신학자들의 공식적인 관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특히 구속받은 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나타내는 말로 '천국'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비록 중세와 그 이후의 경건주의에 의해 그 용법이 크게 대중화되기는 했지만 본의를 심각하게 오도하는 것이며 기독교적 희망에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266 궁극적인 목적지는 죽음 이후의 '천국행'이 아니라 육체가 부활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 이후의 천국행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면, 이것은 두 단계의 과정 중에서 훨씬 덜 중요한 첫 번째 단계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부활은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이다.
268 나는 연옥이 어떤 장소, 시간 혹은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후대에 시구에서 도입 한 것이었고, 그것의 소외 신학적인 근거들도 이제는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뛰어난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자신에 의해 의문시되고 있다.
269 바울은 이 본문과 또 다른 본문에서 사실 연옥의 기능을 해야 하는 것은 현재의 삶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사후의 어떤 상태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고난이 우리가 영광스런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계곡이다.
270 우리를 떠나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같은 상태, 즉 복된 안식의 상태에 있다는 관점이다. 그 상태를 때로는 '잠으로 설명하기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의식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서는 안된다.
275 모든 교회는 궁극적인 미래의 문제뿐만 아니라 죽음 직후에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도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 전통 안에서 참으로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어느 정도 숙고하지 않으면 우리의 논의는 빈약할 것이고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새 창조 안에 있는 궁극적 부활에 대한 희망을 붙잡고, 그 외에 '죽음 이후'의 질문들에 대한 우리의 모든 사고와 논의를 그 관점에 따라서 재정리하는 것이다.
278 우리는 마지막까지도 하나님을 거절하고 그러한 거절이 인증을 받게 되는 사람들이 정말로 있을지를 알기 위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참조 할 수가 없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흔적은 예수님이 1세기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상적인 인식을 그대로 가지고 계셨다는 것 밖에는 보여주지 않는다.
279 이 모든 것이 이 주제에 대한 논의를 미혹시킨 두 종류의 교조주의에 대한 경고가 되어야 할 것이다. 즉 누가 지옥에 가고 누가 가지 않는지를 정확하게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교조주의와 지옥이란 곳은 없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하며 혹시 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텅 비게 될 것이라고 믿는 만인구원론자의 교조주의에 대한 경고가 되어야 한다.
280 심판 ━ 선하고 지지해야 하고 정당성을 입증 받아야 하는 것은 이런 것이고 악하고 정죄 받아야 하는 것은 저런 것이라는 주권적 선언 ━ 은 혼동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다.
280 문제는 너무나 오랫동안 모든 것을 용납하는 안이함에 기대어 살아온 신학, 맥도날드 햄버거만큼이나 경계가 없는 포용성을 가지고 살아온 신학이 이제는 심각하게 무력해진 나머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말로 하고 글로 썼던 강도 높은 심판은 둘째 치고 최소한의 사회적 문화적 심판마저도 감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284 죽은 후에는 자기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결국 한때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존재, 신의 형상을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은 피조물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선한 세상, 아직은 완전히 꺼지지 않은 깜빡이는 불꽃처럼 선함이 남아있는 세상에서 그들이 지니고 살았던 몸은 죽음과 동시에 희망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동정받을 가능성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288 "내가 죽은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문제는 수세기에 걸쳐 신학적 전통이 제기했던 주요하고 중심적이고 뼈대가 되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그것의 뿌리가 되는 구약성경과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바는 온 세상 우주 전체를 위한 하나님의 구출과 재창조의 목적에 대한 것이다. 개별 인간의 운명은 그러한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90 즉 하나님이 어떤 인간들을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이고 어떻게 그 일을 하실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통해서 자신의 창조계를 구속하시고 회복하실 것인지 그리고 모든 것의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그 과정의 일부로서 인간들도 구원하실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이 수정된 질문의 관점에서 로마서와 계시록 그리고 나머지 신약성경을 읽는다면 생각할 거리가 참으로 많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3부 희망의 실천: 부활과 교회의 사명
12. 구원을 다시 생각하다: 하늘, 땅 그리고 하나님 나라
295 물론 이생의 수고 후에는 반식이 약속되어 있고,'천국'이라는 단어가 비록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 '안식'이 일어나는 장소를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안식의 시기는 이 땅이 겪게 될 어떤 매우 다른 일의 서곡일 뿐이다. 그 통치가 일어나게 될 장소는 바로 땅, 회복된 땅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2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약성경이 자주 언급하는 내용은 예수님이 있는 곳에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곳에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다.
299 어떤 사람들은 '전도'를 영원한 내세를 위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어떤 사람들은 '선교'를 '현재의 세상에서 정의, 평화 그리고 희망을 위해서 일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구태의연하게 분리하곤 한다.
301 그러나 어느 종파건 '성경적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상태이며, 대중적인 가르침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전례, 공공기도, 찬송가와 온갖 종류의 설교에 의해 강화된다.
13.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건설
337 당신은 뭐라고 말하겠는가? 당신은 어떤 형식으로든 이미 시작된 종말론을 설득하려고 들 것이다. 즉 성령의 새로운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순종하여 현재의 삶에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를 가져와야 마땅하며, 비록 우리가 그 때가 오기 전에는 결코 완전하고 온전해지지 않을 것이지만 앞으로 올 삶을 예견하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14. 사명을 위한 교회의 재구성(1): 성경적 근거
376 예수님의 부활에서 시작된 혁명적인 새로운 세상, 즉 죄와 죽은 자 가운데서 승리하신 예수님이 주님으로 통치하는 세상은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최전선의 전진기지로 삼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온 세상의 회복, 그 중간 단계에서 인간의 회복이 있다. 바로 여러분과 나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순종의 삶을 통해 회복되는 것이다!
15. 사명을 위한 교회의 재구성(2): 미래를 살다
402 기독교적 희망의 근본적인 왜곡은 현재의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악이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정적주의에 있다.
402 이 지점에서 교회는 타협하지 않으면서 협력하고 이원론에 빠지지 않으면 서 대립할 줄 아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바깥 세상에서 이미 좋은 일들이 행해지고 있고 우리는 거기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자만, 복음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도록 요청받을 수도 있는 지점을 늘 경계해야 한다.
411 예수님의 부활과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에 대한 약속은 우리에게 성만찬을 새롭게 이해할 수있는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무엇보다도 종말론적인 틀을 제공해준다. 현재를 사는 우리를 지탱시켜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오는 희망을 박탈하지 말자. 하나님의 새로운 사상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현재의 세상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적 삶에 동력을 주는 토대를 부인하는 것이다.
부록: 두 종류의 부활절 설교
435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새로운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이 땅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늘의 생명으로 이 땅을 식민화하는 프로젝트다. 그것이 결국 주기도문의 요점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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