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벡위드: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프랑스에서 고구려까지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8. 6. 5.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크리스토퍼 벡위드 지음, 이강한.류형식 옮김/소와당 |
추천의 글(강인욱) / 책을 펴내며 / 감사의 말 / 일러두기 / 서문
프롤로그 ─ 영웅과 그의 친구들
CHAPTER 1 ─ 전차를 탄 전사들
CHAPTER 2 ─ 로얄 스키타이
CHAPTER 3 ─ 로마와 중국 사이
CHAPTER 4 ─ 훈족 아틸라의 시대
CHAPTER 5 ─ 튀르크 제국
CHAPTER 6 ─ 실크로드, 혁명, 붕괴
CHAPTER 7 ─ 바이킹과 키타이
CHAPTER 8 ─ 칭기스칸과 몽골의 정복
CHAPTER 9 ─ 유럽의 바다로 달려간 중앙유라시아 사람들
CHAPTER 10 ─ 길이 닫히다
CHAPTER 11 ─ 중심을 잃어버린 유라시아
CHAPTER 12 ─ 다시 태어나는 중앙유라시아
에필로그 ─ 야만인들
부록 A ─ 원시 인도유럽어족과 그들의 확산
부록 B ─ 고대 중앙유라시아의 민족 명칭
미주 / 참고문헌 / 찾아보기 / 참고지도
서문
35 중앙 유라시아(Central Eurasia)는 광대한 지역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유럽, 중동, 남아시아, 동아시아, 아북극과 타이가-툰드라 지역으로 둘러 싸여있다. 유라시아 대륙을 여섯 개 지역으로 나누면 그 중 하나가 중앙유라시아이다.
36 거칠게 말하면, 초기 중세 이후 "전통적 중앙 유라시아"라고 말할 수 있는 지역은 동서로는 압록강 유역과 도나우 강 하류 사이, 남북으로는 히말라야 산맥과 북극 지방 남부 타이가 숲 지대 사이였다. 이 지역은 서부(폰틱) 스텝 지역, 북부 카프카스 스텝 지역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중부 스텝 지역과 중앙 아시아 서부 지역 (합쳐서 투르키스탄이라고도 함. 현재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중앙 아시아 남부 지역(현재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북부), 준가르와 중앙 아시아 동부 혹은 타림 분지 지역(합쳐서 동 투르키스탄이라고도 함. 현재 중국의 신강), 티베트 지역, 동부 스텝 지역(현재 몽골과 내몽골), 만주 지역을 포괄한다. 이들 중에서 서부 스텝 지역 대부분 내몽골, 만주 지역 등은 더 이상 문화적으로 중앙 유라시아에 속하지 않는다.
37 전통적 중앙 유라시아는 고대 유라시아 대륙의 내부 경제 및 국제 무역 시스템과 거의 일치한다. 이것이 잘못 이해되어 실크로드(Silk Road)라는 이름이 붙어버렸다. 실크로드는 흔히 해로 중심의 연안무역 시스템(Littoral System)과 대비되곤 한다. 연안 시스템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존재해왔고,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중요성이 커지기도 했지만 역사 자료를 보면 사실 양자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대륙의 무역로와 해양의 무역로는 모두 합쳐서 단일한 국제 무역 시스템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43 이 책은 유라시아 대륙 범위에서 펼쳐진 중앙유라시아인들과 주변 민족들의 투쟁의 기록이다. 투쟁의 결과 주변민족들이 승리했고 중앙 유라시아 국가들은 파괴되었으며, 그 사람들은 극심한 가난과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가, 20세기 말 아슬아슬하게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
프롤로그 ─ 영웅과 그의 친구들
65 중앙유라시아 문화 복합체의 초기 형식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회 정치적-종교적 이상형으로서의 영웅적 군주와 그의 코미타투스(comitatus, 친위부대)이다. 코미타투스는 목숨을 걸고 주군을 지키기로 맹세한 주군의 친구들로 구성된 전투 부대이다. 기본적인 코미타투스와 그들의 맹세는 스키타이 때부터 존재했다.
81 간단히 말하자면, 2천여 년 전 흉노로부터 몽골을 거쳐 만주족의 청제국에 이르기까지 중앙 유라시아 지역으로 들어온 막대한 양의 비단은 무역과 세금을 통한 것이었지 전쟁이나 강탈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89 실크로드는 중앙유라시아 문화와 동떨어진 소란을 피우는 원인이 아니라, 근본적인 경제의 구성요소였다. 더욱이 지역 내 근거리 무역과 국제 무역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문화 교류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목 경제와 오아시스 농업 경제, 중앙 아시아 도시 경제는 모두 함께 실크로드의 구성 요소가 된다. 그 기원과 중앙유라시아 문화 복합체 형성을 살펴보자면 4,000년 전 인도 유럽어족의 이주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보아야 한다.
CHAPTER 1 ─ 전차를 탄 전사들
93 중앙유라시아 문화 복합체(Central Eurasian Culture Complex)는 거의 4,000여 년 동안 유라시아 지역 대부분을 지배했다. 이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는 역사언어학으로 포착 할 수밖에 없다. 바로 원시 인도유럽어족(Proto-Indo-European)이 그들이다. 그들의 고향이 어디 였는지 정확 한 위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역사언어학으로부터 추출된 정보에 근거하여 인도유럽어족의 고향과 문화를 연구하는 모델을 개발해왔다.
94 그들이 중앙유라시아의 고향 지역을 떠나 이동했던 정황은 세 단계로 분명하게 구별된다. 최초의 이동 혹은 첫 번째 물결 (first wave)은 기원 전 세 번째 밀레니엄(3000-2001 BC) 말기에 발생했다. 세번째 물결(third wave)는 기원전 두 번째 밀레니엄(2000-1001 BC) 후기 혹은 기원전 첫 번째 밀레니엄(1000-1 BC) 초기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번째 물결 (second wave)인데, 기원전 1700년대의 일로서 그 때 인도유럽어족이 중앙유라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근동, 인도, 중국으로도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이동은 조직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대규모 집단이 이동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개별 부족 단위였거나 혹은 사실상 전사집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31 아주 가벼운 두 바퀴 마차는 보통 말 두 마리가 끌고 조종사 한 명과 궁 수 한 명이 탑승한다. 이는 세계 최초로 개발된 복합 기계장치였고. 동시에 기술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무기였다. 실제로 전차는 매우 가벼워서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였고, 바퀴도 너무 약해서 오래 세워 둘 수도 없었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축을 빼서 보관해야 했다.
136 나중에 해양 민족과 일군의 무리들이 근동지역에 쳐들어왔을 무렵, 전자는 전쟁 무기로서 시대에 뒤쳐진 물건이 되고 말았다. 근동 지역을 파괴하고 청동기시대의 막을 내렸던, 해양 민족과 그 수하들이 어떻게 창을 던지면 말과 전차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전차는 경기용으로 사용 되었으며, 심지어 전쟁에서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활을 쏘는 전사가 탑승하는 용도가 아니라 장군이나 위대한 전사나 다른 지도자들의 위엄을 표시하는 고급 승용차로 쓰였을 따름이다.
CHAPTER 2 ─ 로얄 스키타이
141 기원전 1000년경 말을 타는 승마 기술이 완성되고, 기마 유목민의 생활 기술이 발전하면서, 중앙유라시아의 핵심 부위에 있는 스텝 지대는 북부 이란어족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500년쯤 지난 뒤에는 역사학적으로 잘 알려진 최초의 유목국가 스키타이가 서부 스텝 지역으로 들어와 자리 잡고 그 지역의 패권을 장악했다. 스텝 지역의 다른 이란어족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국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169 대륙 간 교역 체계를 통틀어 일컫는 이른바 실크로드라는 것이 등장하고 번성하고 사라지는 시기는 역사적으로 스키타이의 등장, 중앙유라시아 제국들의 번성, 준가르의 멸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2 천여 년 동안 대부분의 중앙유라시아 핵심 지역은 기마전사가 통치하는 나라들이 지배했고, 그들이 무역로를 보호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170 교역이 유목민에게 그렇게 중요했던 이유는 오히려 통치자와 그의 코미타투스를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고학적 발굴이나 역사 자료에서 코미타투스 대원들에게 지급된 사치품에 대한 묘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중앙유라시아 전역에서 고대로부터 그러했다. 통치자와 코미타투스의 관계는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어떠했던 지를 막론하고 중앙유라시아를 통틀어 모든 국가에서 사회 정치적 주춧돌이었다.
CHAPTER 3 ─ 로마와 중국 사이
196 중국과 로마제국의 공격적인 대외 정책이 성공을 거두자, 마침내 재앙을 초래하게 되었다. 두 제국은 모두 부분적으로 국경 무역을 폐쇄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중앙유라시아를 공격하여 불안을 야기했고, 지역 내 대량 살육전쟁을 일으켰다. 그 뒤 실크로드 교역은 심각하게 침체되었다. 중앙아시아에 도시 영역이 축소된 것이 그 증거다. 이는 장기 지속적인 경기 침체의 원인이 되었고, 서로마 제국과 동한 제국(그리고 그 후계자인 진 왕조마저도)의 몰락을 초래했다. 이로서 고대 문명은 막을 내린 셈이다.
CHAPTER 4 ─ 훈족 아틸라의 시대
216 기원 후 1세기 동안 부여와 고구려 왕국은 남만주 지역에서 왕조를 유지했으며 토착민들을 노예로 지배했다.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 낙랑에 있던 중원 제국의 극동 사령부와 여러 차례 분쟁을 겪었다. 때때로 고구려가 강성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한 왕조가 멸망 한 뒤에도 중국인들은 낙랑 지역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217 4세기에 고구려는 마침내 낙랑을 정복하고 피아르나(Piarna)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평평한 땅'이란 뜻으로, 한국식 한자음으로는 평양이라고 한다. 그들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다른 부여-고구려계 종족들과 함께 한반도 지역 대부분을 휩쓸었다. 백제 왕국은 과거 한반도 서남부에 있던 마한의 영토에 부여족이 내려와 세운 나라이다. 한편 또 다른 부여-고구려계 종족은 과거 한반도 동남부에 있던 진한의 영토에 신라 왕국을 세웠다. 신라 왕국에서는 한국어가 계속 유지되었다. 부여-고구려계 민족의 국가건설과 그들의 언어적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지역은 한반도 남부 해안에 있던 과거 변한 지역뿐이었다. 그곳은 가라 (Kara), 혹은 미마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나라가 되었는데, 한반도의 다른 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에는 휠씬 못 미쳤다.
CHAPTER 5 ─ 튀르크 제국
229 6 세기 말에 이르러, 중국은 다시 '수'라는 짧았던 왕조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들은 다시 중앙유라시아 지역으로 팽창을 시도했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곧이어 페르시아 제국과 동로마 제국도 무너지자, 새로운 제국의 질서가 수립되었다. 예전에 제국이 있었던 지역뿐만 아니라 변경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프랑크족은 서유럽을, 아랍인들은 아라비아지역은 물론 근동과 일시적으로 인도 북서부, 중앙 아시아 서부, 이란, 아프리카 북부와 스페인까지 차지하였다. 티베트 제국은 중앙 유라시아 동남부에 당나라는 중국 지역에 자리 잡았다. 당나라는 중앙 유라시아 동부와 그 인근 지역으로 급속히 팽창해 나갔다. 투르크는 중앙유라시아에 카자르(Khazar) 왕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들을 세웠고 동부 스텝 지역의 튀르크 제국은 계속 지속되었다. 예전의 동로마 제국은 새로운 면모로 시대에 대응했고 보다 작고 단단한 제국으로서 공식적으로는 그리스어를 사용하였다. 중앙 유라시아와 그곳의 번성했던 경제는 모든 유라시아 국가들에게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이 시기가 유라시아의 제2차 정주 제국 시대인데, 일반적으로는 초기 중세라고 알려져 있다.
270 오직 초기 중세에만 역사상 최초로 거대 제국들이 서로 직접 맞닥뜨렸고, 그들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각각의 제국은 서로 얼굴을 맞대었고, 각각은 사실 동등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제국을 통제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으로서 외교 규약이 발달하였다.
270 8세기 초, 유라시아의 문화들과 국가들이 서로 충돌했을 때, 각자는 서로가 힘닿는 데까지 중앙 유라시아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의 제국은 다른 제국에서 기꺼이 물자와 지식과 인력을 구했다. 그들은 정치적인 연맹을 맺고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군사 행동을 조율하였으며, 심지어 연맹을 위해 혹은 연맹을 거부하기 위해 자신의 관습과 신앙을 바꾸기도 했다.
CHAPTER 6 ─ 실크로드, 혁명, 붕괴
303 유라시아 대부분 지역의 경제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중국 측 역사 자료에 의하면, 830년대 말기의 기후 변화가 직간접적 원인이었다. 서양에서도 상업이 눈에 띄게 쇠퇴하였다. 심지어 아랍 제국 내부에서도 그랬다. 하룬 알 라시드가 통치할 때, 그리고 알 마문이 통치하던 중앙아시아의 시대는 굉장히 번성했고, 엄청난 수의 새로운 디르헴(dirhem)은 화가 주조되었다. 그러나 820년부터 새로운 은화 주조가 급격하게 줄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새로 주조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CHAPTER 7 ─ 바이킹과 키타이
341 송나라의 정치가 중앙유라시아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해상 무역이 유라시아의 반대 방향으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후원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송나라에서는 남부 지역과 그곳 사람들을 항시 문화적으로 낮추어 보는 경향이 있어서 대부분의 변화들은 중국 정치가 미치는 영토를 벗어나 이루어졌다. 따라서 남방으로 남중국해 연안과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해안 지역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개척했을 때, 중국 문화를 전파한 세력은 중국의 엘리트가 아니라 독립적인 마인드의 상인들이었다.
CHAPTER 8 ─ 칭기스칸과 몽골의 정복
345 여진은 카불 칸을 동부 스텝 지역 최고의 통치자로 인정했었다. 그가 죽은 뒤, 막 싹이 트던 몽골 왕국은 깨지고 말았다. 내전이 계속 이어지다가 마침내 카불 칸의 증손자인 테무진이 몽골을 하나로 통합했다. 칭기스칸은 번개 같은 정복 전쟁을 잇달아 성공시킴으로써, 중앙유라시아 대부분과 그 주변 지역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의 아들들도 정복 사업을 계속했다. 제국의 최전성기에는 영토가 동유럽에서 중국 동부 해안까지, 시베리아에서 페르시아 걸프만까지 이르렀다. 몽골은 중앙유라시아를 다시 통합했고, 다시 확장시켰다. 모든 중앙유라시아와 일부 연안 지역, 스텝 지역, 러시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티베트, 중국을 점령했다. 몽골 제국은 세계 최초의 육지기반 슈퍼 파워였다.
374 몽골은 최초로 거대 규모의 국제 무역과 세금 시스템인 오르탁(ortag)을 만들었다. 오르탁은 기본적으로 상인 연합 혹은 카르텔이었다. 주로 무슬림들이 이를 수행했는데, 그들은 카라반이나 어떤 기업에게 돈을 빌려 주었고 통치자들에게는 세금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기도 했기 때문에 그것은 믿을 수 없을만큼 수익이 높았다.
CHAPTER 9 ─ 유럽의 바다로 달려간 중앙유라시아 사람들
415 만주족은 현실적이면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통치자였다. 청나라 때 중국은 급속한 인구 성장을 이루었고, 중앙유라시아를 정복한 덕분에 영토도 굉장히 넓어졌다. 몽골 제국시대에 중국에 들렀던 여행객들처럼, 명말청초에 처음 바다를 통해 중국에 도착했던 유럽인들은 나라의 번영과 높은 문화적 수준에 무척 놀랐다. 당시 중국은 그들이 보기에도 유럽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그러나 이때도 이미 유럽인들은 중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선진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를 알아 본 강희제는 아마도 만주족 통치자 중에 가장 학식이 높았던 인물이었는데, 몇몇 유럽인들, 특히 예수회 수도사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CHAPTER 10 ─ 길이 닫히다
425 준가르 제국은 거대 중앙유라시아 스텝 왕국으로서는 마지막이었다. 제국국이 수립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689년 러시아와 청나라의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되면서 준가르의 세력은 약화되고 말았다.
425 18세기에 청나라는 중앙유라시아 동부를 완전히 복속시켰다. 동부 스텝 지역, 동투르키스탄, 티베트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19세기에는 러시아가 카프카스 지방과 나머지 중앙 아시아 칸국들을 정복했다. 몽골과 티베트는 청나라의 지방체제에 편입되지 않고 반 독립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이외에 중앙유라시아에서 온전하게 독립 국가로 살아남은 나라로는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유일했다. 그곳이 러시아, 청나라, 영국령 인도의 완충지대가 되었다.
438 청나라가 중앙유라시아 동부를 정복했던 그 다음 세기에는 러시아가 서부 중앙 아시아를 점령하고 식민지화했다. 같은 시기 영국은 무굴제국을 대신해 인도 아대륙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들 3대 제국이 자신의 주변 지역에 대한 강력한 장악력을 확립 해둔 상태였다. 이는 중앙 유라시아를 닫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454 중앙유라시아가 분열되자 유라시아 경제를 연결했던 지역 범위가 전체적으로 지워져 버리고, 두 개의 분명한 노선이 일컬어지게 되었다. 실크로드 시스템(Silk Road System, 현실적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았다)은 유라시아 해상 무역, 즉 연안 무역 시스템(Littoral System, 이것은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한 명칭이다)의 대비되는 개념이 되었다.
455 유라시아의 지역별 거대 제국들은 중앙 유라시아, 특히 중앙아시아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는 스키타이의 시대부터 준가르 제국 말까지 이어지는 전통이었다. 그리고 이 지역을 향해 진출하고자 하는 정책에 엄청난 양의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쏟아왔다.
471 중앙유라시아의 상황이 아무리 나빠져도 러시아나 청나라는 그곳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갈수록 그곳 식민지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유럽인들이나 미국인들이 그곳에 가는 것은 기를 쓰고 막았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과 동서 투르키스칸, 몽골, 티베트를 막론하고 중앙유라시아를 여행하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금지되었고, 외부세계 어디에서도 그곳에 대한 정보는 들을 수 없었다. 그 내부에서조차 고립되고 가난해진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그 결과 자신의 영토와 역사 및 문화에 대해서도 대체로 무지하게 되었다.
CHAPTER 11 ─ 중심을 잃어버린 유라시아
530 모더니즘은 단지 철학이나 운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생활의 모든 측면에 적용되었다. 정치적 극단주의로서의 모더니즘, 특히 러시아에서 막스레닌식 사회주의(1917부터)와 중국식 사회주의(1949부터)로 인해, 그들의 전체주의적 방식이 중앙유라시아 전역에 뿌리 내렸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중국 공산주의의 횡포 아래 예술 작품을 포함한 거의 모든 전통 문화가 파괴되고야 말았다.
531 20 세기 말에 돌이켜 보면 모더니즘과 "진보"라는 이름의 악마는 중앙유라시아로부터 과거의 대부분을 빼앗아가 버렸다.
CHAPTER 12 ─ 다시 태어나는 중앙유라시아
560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 그들의 후손들과 또 다른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복과 발견과 연구와 탐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 시스템, 고급 예술, 선진과학을 창조해냈다. 이집트인 수메르인 등등이 아니라 중앙유라시아인들이 우리의 조상이다. 중앙유라시아는 우리의 고향이고 우리의 문명이 시작된 곳이다.
에필로그 ─ 야만인들
564 한때 중앙유라시아의 역사를 주도했던 나라들 스키타이, 흉노, 훈, 투르크, 티베트, 몽골, 준가르 만주 등등과 그 후손들은 이후 오래도록 세계사 책에서나 등장하는 이름으로 사라져 버렸다. 최근 이들 중 일부가, 때로는 이름을 바꿔서 현대 유럽식 민족 국가(nation state)로 다시 등장하고 있지만 거의 모든 경우 실제 권력이 없다. 최소한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하고 물어 보는 사람 정도는 있을지 모르겠다.
627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야만인이라고 불렀던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체로 그들이 사라진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 중 일부는 주변 민족들과 그들 문화의 맹공격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자신의 전통 문화와 전통 생활 양식을 상당 부분 보존하고 있다. 일부는 또 다시 독립을 회복했으며, 황폐화된 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정열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여전히 폭압적인 이방인 통치하에 놓여 있으며, 서서히 소멸에 내몰리고 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어떤 경우는 그 사람들 마저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다.
628 중국의 청나라와 러시아가 중앙유라시아를 혹독하게 정복하고 분열시켰기 때문에 완전한 회복은 어렵게 되었다. 한편 남부 중앙아시아(현재 그 지역의 대부분은 아프가니스탄이다.)는 30여년 동안 계속 된 내전에 시달렸다. 모더니즘의 극단적인 형태 인 근본주의자들이 그 지역의 일부를 차지하여 일으킨 전쟁이었다.
629 역사적으로 그러했던 것처럼 중앙 유라시아를 유라시아의 핵심 지역으로 주변 정치 권력들이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중앙유라시아의 빈곤은 계속 심화되고 위험은 점점 더 커질 가성이 상당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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