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7 ━ 소돔과 고모라 1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7 - 10점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1부 · 9
2부 1장 · 61
2부 2장 · 284
옮긴이 주 · 407

 


244 내 전존재의 도괴였다. 첫 날 밤부터 피로에 기인한 심장 발작에 괴로워하던 내가, 괴로움을 제어하려 애를 쓰면서, 목구두를 벗으려고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상체를 숙였다. 그러나 내가 목구두의 첫 단추를 건드리기 무섭게, 미지의 신성한 존재로 가득 채워진 나의 흉곽이 한껏 부풀어 올랐고, 연이어지는 흐느낌이 나를 뒤흔들었으며, 나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렇게 나를 도우러 와서 영혼의 황량함으로부터 나를 구출해 낸 존재는, 여러 해 전, 유사한 비탄과 고독의 순간에, 나에게 더 이상 나 자신이라고 할만한 그 무엇도 없던 순간에, 나의 안으로 들어왔던, 그리고 나를 나 자신에게 돌려주었던 그 존재였으니, 그가 곧 나였고 또 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내용물 이상이며 또 그것을 나에게 가져다 주던 그릇이었다). 내가 나의 기억 속에서, 옛날 그곳에 도착하던 첫 날 저녁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신 할머니께서 나의 피곤 위로 숙이신, 다정하고 근심 가득하며 실망한 얼굴을 이제 막 언뜻 보았으며, 그 얼굴은, 내가 하도 그리워하지 않아 나 스스로도 놀라면서 나 자신을 나무라게 하던 그리고 명칭뿐인 그 할머니가 아닌, 샹젤리제에서 병세가 급격스럽게 악화된 순간 이후 처음으로, 무의지적이고 완벽한 추억 속에서 내가 그 살아있는 실재를 발견한, 진정한 내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우리의 사념에 의해 재창조되지 않는 한 그러한 실재가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으며(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대규모 전투에 휩쓸렸던 남자들 모두가 위대한 영웅전을 짓는 문인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할머니의 품으로 뛰어들고 싶은 미칠듯한 갈망에 휩싸여—장례를 치른지 한 해도 더 지난 후, 사실들을 기록한 책력이 감정들을 기록한 책력과 일치하지 못하도록 그토록 자주 방해하는 연대 착오 현상 때문에—할머니가 돌아가셨음을 내가 깨닫게 된 것은 겨우 그 순간에 이르러서였다. 장례식을 치르던 날 이후 내가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였고 또한 할머니를 자주 뇌리에 떠올리기도 하였으나, 나처럼 배은망덕하고 이기적이며 무정한 젊은이의 말과 생각 속에는 나의 할머니와 유사할 법한 무엇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나의 경박함과, 쾌락에 대한 애착과, 편찮으신 할머니를 일상적으로 대하던 습관 등으로 인해, 내가 진정한 할머니의 추억을 나의 내면에 잠재태로만 담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떠한 순간에 그것을 검토한다 해도, 우리의 총체적인 영혼은, 그 자산의 숱한 항목에도 불구하고, 거의 허구적인 가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바, 그것이 실질적인 자산이건 상상 속의 자산이건, 때로는 이것 혹은 저것이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나의 경우, 게르망뜨라는 유서깊은 명칭이 가지고 있는 자산이나, 비할 수 없을 만큼 더 엄숙한, 내 할머니의 진정한 추억이 간직하고 있는 자산이 그러하다. 그것은 기억의 혼란에 심정의 간헐성이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나간 기쁨들이나 슬픔 등 우리의 모든 내적 자산들이 영원히 우리의 소유물이라고 믿도록 우리를 부추기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우리에게는 우리의 정신적인 것이 갇혀 있을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육체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 자체이다. 그 자산들이 그곳을 탈출하거나 그곳으로 되돌아온다고 믿는 것 또한 아마 못지않게 부정확한 생각일 것이다. 여하튼, 그것들이 혹시 우리들 속에 머물러 있더라도, 그것은 거의 항상, 그것들이 우리에게 아무 도움 될 수 없을 처지에 놓이는 어느 미지의 영역 속이며, 그 영역에서는, 심지어 지극히 평범한 자산들 마저도, 전혀 다른 부류에 속하며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것들과의 동시성을 철저히 배제하는 추억들에 의해 억압되어 있다. 그러나 혹시 그 자산들이 보존되어 있는 감각의 틀이 재포착 될 경우, 이번에는 그것들이, 자기들과 양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축출한 다음, 그것들을 겪은 자아만을 우리들 속에 정착시킬 수 있는 지배력을 갖게 된다. 그런데, 내가 이제 막 문득 회복한 나의 자아가, 발백에 도착한 후 할머니께서 나의 옷을 벗겨 주시던 그 먼 옛날의 저녁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지라, 그 자아는 전혀 모르는 현재의 하루 일정 끝에가 아니라—마치 시간 속에 상이하되 평행을 이루는 열 들이 있는 듯—지속성의 중단 없이, 과거의 첫 날 저녁 직후에, 나의 할머니께서 내 목구두 쪽으로 상체를 숙이시던 바로 그 순간에, 내가 접착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사라졌던 그 시절의 내 자아가 다시 내 곁으로 어찌나 가까이 와 있었던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사람이 흩어져 사라지는 자기의 꿈 속 소음들을 가까이에서 감지한다고 생각하듯, 할머니께서 나에게로 상체를 숙이시던 순간 직전에 들렸으되 역시 한 가닥 꿈에 불과했던 말들이 아직도 나에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제 나는 자기 할머니의 품 속으로 피신하여 할머니에게 입맞춤을 퍼부음으로써 할머니가 느끼시던 슬픔의 흔적을 지워 버리려 애쓰는 존재, 즉 최근 얼마 전부터 나의 내면에 연속적으로 출현하던 존재들 중 내가 이런 혹은 저런 존재였을 때에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던 그 존재일 뿐이었고, 그러한 상상의 어려움은, 적어도 잠정 기간 동안이나마 옛날의 존재로 돌아간 내가 그 존재들 중 하나의 욕망과 기쁨을 느끼려면 필요로 할—그러나 부질없을—노고 못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께서 실내용 드레스 차림으로 나의 목구두 쪽으로 상체를 숙이시기 한 시간 전, 열기 때문에 숨이 막힐 듯한 거리를 배회하면서, 혹은 과자점 앞에서, 할머니를 포옹하고 싶은 욕구가 어찌나 간절했던지, 아직도 할머니와 떨어져서 보내야 할 한 시간 동안을 결코 기다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던 그 순간이 얼마나 절박했었는지를 뇌리에 떠올렸다. 그런데 그 시절에 느끼던 욕구가 다시 태동하고 있던 이제, 내가 아무리 여러 시간 동안 기다려도 할머니가 더 이상 내 곁으로 돌아오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내가 기껏 그 사실이나 발견한 것은, 살아 계신 진정한 할머니를 처음으로 느끼고 심장이 터질 지경으로 팽창된 상태로 드디어 할머니를 되찾으면서, 내가 할머니를 영원히 잃었음을 이제 막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원히 잃다니,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따라서 다음과 같은 모순에 기인되는 괴로움을 감내하는데 익숙해지려 노력하였던 바, 한편으로는, 내가 일찍이 알았던 그대로 나의 내면에 살아남은, 다시 말해 나에게 바쳐졌던 하나의 생애와 애정,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하도 나에게서만 그 보완물과 목적과 방향을 발견하였던지라, 위인들의 천재성도, 태초로부터 존재할 수 있었을 모든 천재적 재능들도, 나의 할머니에게는 내 단점들 중 하나만도 못하였을 하나의 사랑이 있었던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 유열을 마치 현재의 것처럼 내가 다시 경험한 직후, 내가 간직하고 있던 그 애정의 영상을 일찍이 지워 버렸고, 그 생애를 파괴하였고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숙명적 관계를 나중에 끊어 버렸던, 그리고 내가 할머니를 거울 속에서처럼 선명히 되찾은 순간, 그 할머니를(어떤 우연이, 나 아닌 전혀 다른 사람 곁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처럼, 내 곁에서 몇 해를 보내도록 하였으나, 그 이전에도 또 그 이후에도,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고 또 그렇게 여길)하나의 낯선 여인으로밖에 보이지 않게 만든 허무의(반복적인 육체적 통증처럼 솟구치는) 확실성에 의해, 그 유열이 관통되는 것을 느껴야 하는 모순이었다.
얼마 전부터 내가 누렸던 기쁨들 대신 이제 내가 맛볼 수 있었을 유일한 기쁨은, 과거에 다시 손을 댐으로써, 나의 할머니가 전에 느끼셨던 고통을 줄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할머니를 그 날 저녁에 입으셨던 그 실내용 드레스 차림으로만 뇌리에 떠올리지 않았으니(그 드레스는, 할머니께서 나를 위하여 감당하시던, 물론 건강에는 해로우나 감미롭기도 한 노고에 적합하게 지어져, 그 노고의 상징이 될 정도였던 의복이다), 내가 일찍이 나의 괴로움을 할머니에게 드러내거나 필요하면 그것을 과장하면서, 마치 나의 애정이 할머니에게 행복을 안겨 드리는 나의 행복과 같은 능력을 구비하기라도 한 듯, 나의 입맞춤에 의해 즉시 지워질 것이라 상상하던 괴로움을 할머니에게 끼쳐 드릴 계기들을, 그리하여 내가 놓치지 않고 포착하였던 계기들을, 어느덧 차츰 모두 회상하기에 이르렀으며,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이제 나의 추억 속에서 애정으로 빚어지고 가볍게 숙인 그 안면에 퍼져 있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 이외에서는 행복이라는 것을 더 이상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 내가, 전에는 그 얼굴에서 가장 작은 기쁨까지도 근절시키려 하는 미친듯한 집착을 보여, 예를 들어 쌩-루가 할머니의 사진을 찍어 드리던 날, 그리하여 챙 넓은 모자를 쓰시고 잘 어울리는 황혼빛 속에서 포즈를 취하시며 부리시던 거의 우스꽝스러운 애교의 유치함을 못 본 체하기 어려웠던 날, 나는 짜증 섞이고 모욕적인 말 몇 마디를 무심히 중얼거렸고, 그 말이, 할머니의 얼굴에 문득 나타난 수축 현상을 보고 내가 그것을 감지하였거니와, 할머니에게 명중하여 상처를 입혀 드렸는데, 수천 번의 입맞춤으로도 위로가 영영 불가능해진 이제, 그 몇 마디가 갈갈이 찢고 있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얼굴에 나타났던 그 일그러짐과 할머니의 가슴이 느낀 그 아픔, 아니 나의 가슴이 느낀 그 아픔을, 내가 영영 지울 수 없으리니, 죽은 이들은 오직 우리의 내면에만 존재하는지라, 우리가 그들에게 가했던 타격을 고집스럽게 상기할 때 우리가 조금도 늦추지 않고 후려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그 아픔이 아무리 혹독하다 할지라도 나는 나의 모든 힘을 쏟아 그것에 집착하였으니, 그 아픔들이 곧 내가 할머니에 대하여 간직하고 있던 추억의 결과이며, 그 추억이 정말 나의 내면에 있다는 증거임을 분명히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픔을 통해서만 할머니를 진정으로 상기할 수 있을 것이라 직감하였고, 따라서 할머니의 추억을 나의 내면에 밀착시키던 그 못들이 더욱 단단하게 깊숙이 박히기를 원하였다. 나는 그 아픔을 완화시키거나 미화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사진(쌩-루가 찍었고 내가 간직하고 있던) 에—우리들과 헤어졌으되 하나의 개인으로 살아가고 우리를 잘 알며 일종의 파기될 수 없는 조화를 통해 우리와 연계되어 있는 어떤 존재에게 그러듯—말을 건네거나 기도를 올림으로써, 나의 할머니께서 부재중이시라 잠시 사람들의 눈에 띄시지 않는 것뿐이라는 기색으로 가장하려 하지도 않았다. 내가 결코 그러지 않은 것은, 내가 그 아픔을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문득 내가 감내하였던 내 아픔의 독특성을 존중하는 것 역시 중시하였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는 나의 내면에 뒤섞여 있는 존속과 망각이라는 그토록 기이한 모순 현상이 도래할 때마다, 그 아픔 고유의 법칙에 따라 계속 그 아픔을 감내하고 싶었다. 그토록 고통스럽고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그 인상, 물론 그것으로부터 언젠가는 약간의 진리를 추출해 낼 지 알 수 없었으나, 만약 그 약간의 진리를 혹시 내가 추출해 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그토록 특이하고, 그토록 자발적이며, 나의 지성이 제시한 지침을 따르지도, 나의 소심함에 의해 완화되지도 않은, 반면 죽음 자체가, 갑작스러운 죽음의 발견이, 마치 벼락이 그랬을 것처럼, 초자연적이고 비인간적인 어느 도표에 따라 나의 내면에 신비한 이중의 밭고랑처럼 깊숙이 파 놓은, 오직 그 인상으로부터일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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