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동: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1. 2. 23.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 김호동 지음/까치 |
머리말
제1장 사제왕 요한
제2장 동방으로
제3장 초원의 십자가
제4장 꺼져가는 불꽃
제1장 사제왕 요한
최초의 소식
1144년 서구의 십자군은 전략적 근거지인 에데사(현재 터키 동남부의 우르파)가 무슬림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1099년에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이래로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지중해 동부 연안의 레반트 지역에 크고 작은 왕국들을 건설한 뒤, 그런대로 주변의 무슬림의 압력에 잘 대처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12세기 초 십자군은 크게 네 세력권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거점은 무슬림 세력을 몰아낸 뒤 예루살렘에 세운 왕국이었다. 가장 북쪽에는 안티오크가 있었고, 동북쪽으로는 에데사가 백작령으로 독립해 있었으며, 그 중간에 트리폴리에 또다른 십자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에데사를 함락시킨 주인공은 젱기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투르크족 노예 출신이었으나 셀주크 왕조의 술탄으로부터 1127년에 시리아 북부 모술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셀주크는 이미 지방에 대한 강력한 통치권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레반트 지역의 무슬림들은 큰 도시를 중심으로 할거하며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단일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내분까지 벌이던 십자군들이 그나마 거점들을 상실하지 않았던 것도 실은 적진의 이와 같은 분열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젱기는 오히려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주변의 무슬림 세력을 병합하는 동시에 십자군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젱기는 에데사 공략에 앞서 먼저 1128년에 알레포를 손에 넣고 이어서 하마와 힘스마저도 함락시켜 무슬림 세력의 통합을 이루어 나갔다. 거기에서 더 남하한 그는 1139년 12월에 마침내 다마스쿠스를 포위했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무슬림들은 서구의 예루살렘 왕국과 연합하여 대항하기 시작했다. 완강한 저항을 꺾을 수 없어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갑자기 공격의 방향을 동북방으로 돌려 십자군이 주둔하고 있던 에데사로 향했다. 이 도시는 한달간 포위당한 끝에 마침내 1144년 12월 말에 무슬림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예루살렘에서 지원군이 도착했지만 이미 성채는 적의 수중에 들어간 뒤였다. 그 디음 해에 젱기가 암살되어 십자군이 에데사를 잠시 탈환하는가 싶더니, 젱기의 아들 누르 앗 딘에 의해서 1146년 11월에 다시 함락되었고, 성 안에 있던 4만 5천 명의 기독교도들은 학살되거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에데사의 함락으로 당장 위험에 처하게 된 곳은 안티오크였다. 지원군이 곧 도착하지 않으면 함락은 시간 문제였다. 그곳의 영주는 서둘러 교황청과 유럽의 국왕들에게 사람을 보내 긴급한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이때 파견된 사절 가운데 하나가 위고라는 사람이었다. 원래 프랑스 태생인 그는 당시 베이루트에서 북쪽으로 30 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조그만 항구도시 자발라의 주교였다. 그러나 위고 주교가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는 로마에 없었다. 그는 교황권에 도전하는 로마 시내의 소요로 인해서 중부 이탈리아의 소도시 비테르보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1145년 11월에 위고 주교는 비테르보에 머물고 있던 교황을 찾아가서 레반트 지방에서 벌어진 급박한 상황을 보고했다. 사태의 위중함을 깨달은 교황은 즉시 새로운 십자군의 소집을 알리는 칙서를 발표했다.
그때 마침 비테르보에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방 프라이징 출신의 오토라는 역사가가 있었다. 그는 위고 주교가 교황에게 보고하는 내용을 듣고 그것을 자신의 저서인 『두 도시의 역사』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 이 책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은 그가 인류의 역사를 선과 악의 투쟁과 선의 궁극적인 승리로 보고 천지창조부터 1146년에 이르기까지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세계사이다. 제목의 '두 도시'란 신의 도시인 예루살렘과 악마의 도시인 바빌론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이 책에 그는 1145년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술하면서 바로 위고 주교가 전해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삽입했다.
(위고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 너머 극동지방에 사는 요하네스라는 사제왕이 있는데, 그는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비록 네스토리우스 교도이기는 했지만 기독교를 신봉했다. 그런데 불과 몇 해 전 그가 페르시아와메데스를 지배하던 사미아르디 형제와 전쟁을 벌였다. 그는 앞서 말했듯이 그들 왕국의 수도인 엑바타나를 공격했다. 이 왕들이 페르시아, 메데스, 아시리아 군대를 이끌고 그와 맞서 사흘 동안 싸웠는데, 양측 모두 도망치지 않고 목숨을 걸고 겨루었지만, 결국 사제왕 요하네스가 승리를 거두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처참히 도륙되었고 (나머지는) 도망치고 말았다. (주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승리를 거둔 요하네스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진군했는데, 티그리스 강에 도착했을 때 군대를 데리고 강을 건널 만한 배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북방으로 올라갔다. 그것은 겨울에 추위로 인해서 강이 모두 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에서 몇 해를 머물며 결빙되기를 기다렸으나, 따뜻한 날씨 때문에 강이 얼지 않았다. 그는 낯선 기후 때문에 많은 군대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복음서에 언급된 동방박사들의 후예이며 그들이 다스렸던 사람들을 지배하며, 오직 에메랄드로 만든 홀만을 사용할 정도로 영광과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구유에 참배하러 왔던 그의 조상들을 본받아 그 자신이 직접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지만, 앞에서 말한 연유로 성공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제왕 요한에 관한 서구인 최초의 기록이다. '사라센’의 거센 공격 앞에 언제 성지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다급한 처지에 있었던 유럽인들에게 이것은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인도에 기독교도가 있다는 소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바르다이산(154-222) 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유다-도마행전』에는 예수가 처형된 뒤 그의 사도 가운데 하나였던 도마가 선교를 위해서 인도로 가서 그곳의 왕을 개종시켰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4세기의 역사가인 에우세비우스도 『교회사』라는 책에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사제 판태누스가 인도에 전교를 하러 갔다가, 이미 자기보다 먼저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인 바르톨로메오가 그곳에 와서 히브리어로 된 마태복음을 전해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한 바 있다. 1122년에는 인도에서 온 한 사제가 교황을 방문하여, 마드라사에 있는 사도 도마의 성당에서 일어나는 이적 ━ 일 년에 한 번 도마의 시신이 다시 살아나 예배를 주재한다는 주장 ━ 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식은 일종의 설화처럼 크게 신빙성은 없어 보였고,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아주 적은 수의 기독교도들 정도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위고 주교가 전해준 소식은 완전히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었다. 동방세계 아주 먼 곳에 '사제왕'을 칭하는 요한이라는 사람이 거대한 기독교 왕국을 통치하고 있고, 그가 대군을 이끌고 와서 서구인들이 두려워하는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엑바타나를 점거했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더구나 그가 십자군을 돕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티그리스 강까지 왔다가 돌아갔다는 사실은 위기에 처한 그들에게 흥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과연 사제왕 요한이란 누구이며 그의 왕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슬람권 너머에 있는 동방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던 유럽인들은 이렇게 해서 요한의 왕국을 찾아 나서는 길고 험한 모색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과정은 그들이 알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모험에 찬 탐색이었고, '암흑'의 중세를 빠져나오기 위해서 필요한 시련이기도 했다. 1145년 사제왕 요한에 대한 소식이 처음 전해진 지 300년 만에 비로소 그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꿈, 즉 요한의 왕국을 찾으려는 소망은 마침내 실현되었지만, 그들이 찾아낸 것이 기대했던 결과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러나 그동안 들였던 노력의 대기는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침내 동방세계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대항해의 시대로 들어가는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점은 사제왕 요한에 대한 환상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중세 유럽인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 하는 것이다. 어떠한 역사적 조건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 이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당시 유럽인들이 직면했던 교황권과 세속권의 대립이라는 내적인 분열상, 무슬림들의 위협에 시달리며 허우적거리던 십자군들의 상황, 그들의 지리적 무지함을 자양분으로 자라난 유토피아의 환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환상을 가능케 했던 역사적 사건들, 또 그 사건들을 사제왕 요한과 결부시켜 전설의 왕국을 영속화 시키려고 했던 사람들의 실체 등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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