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5 - 게르망뜨 쪽 1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1. 2. 14.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5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게르망뜨 쪽 1부 · 7
옮긴이 주 · 468
11 이른 아침에 들려오는 어린 새들의 지저귐도 프랑수와즈에게는 즐겁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위층 ‘하녀들’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소스라쳤고, 그녀들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불편해져, 그 소리가 무슨 곡절인지 궁금증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우리가 새로운 거처로 이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옛집 ‘7층’ 하인들이 덜 부산스러웠던 것은 아니나, 그녀가 그들을 잘 알고 있었던지라, 그들의 부산한 오고 감도 그녀에게는 우정 어린 무엇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가 고요함에조차 괴로운 관심을 쏟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새 동네가, 전에 살던 동네를 스치고 지나는 대로가 시끄러웠던 것과는 정반대로 조용해 보였던지라, 어떤 행인의 노래가(오케스트라 연주곡의 주제처럼 나지막하지만 멀리서도 선명히 들리는) 유배 상태에 놓이게 된 프랑수와즈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리게 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든 이들로부터 그토록 존경 받던’ 건물을 떠나게 된 것이 애석하여, 꽁브레의 습속에 따라 눈물을 흘리면서, 그리고 그때까지 살던 집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집들보다 훌륭하다고 선언하면서 이삿짐을 싸던 그녀를 내가 놀렸지만, 반면, 과거의 것들을 쉽사리 내동댕이치되 새로운 것들에는 몹시 어렵게 적응하던 나였던지라, 아직 우리를 모르던 건물 수위로부터 그녀의 충분한 심적 섭생에 필요한 예우를 받지 못한 집에 이사하게 된 것이 그녀를 거의 고사상태에 처박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우리의 그 늙은 하녀에게서 친밀감을 느꼈다. 오직 그녀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이해할 수 있었을 사람이 분명 그녀의 어린 심부름꾼은 아니었다. 꽁브레와 전혀 이질적이었던 그에게는, 이사를 하여 다른 동네에 거주한다는 것이 마치 휴가를 즐기는 것과 같았을 것이고, 그곳에서 조우하는 매사의 새로움이 여행지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휴식을 그에게 주었을 것이다. 그는 따라서 자신이 어느 시골에 여행 삼아 온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또한 이사한 동네에서 코감기에 걸리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유리창 제대로 닫히지 않은 열차 안에서 쏘인 한 가닥 ‘바깥 공기’처럼, 자기가 그 고장을 구경하였다는 감미로운 인상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또한 코감기 때문에 재채기를 하게 될 때마다, 여행 자주 하는 주인 모시기를 열망하였던 터라, 자기가 드디어 멋진 일자리를 얻었다고 기뻐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내가 프랑수와즈에게 곧바로 새 집에서 느끼던 괴로움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옛 집 떠나는 것에 무심했던지라 내가 그녀의 눈물을 비웃었던 것처럼, 그녀는 나의 슬픔에 공감하였던지라 그것에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신경질적인 사람들의 이른바 ‘감수성’이라는 것과 함께 그들의 이기주의도 증대된다. 그리하여 자기들의 점증되는 관심 대상이 된 불편함을 다른 이들이 과시하듯 드러내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자기가 느끼던 괴로움들 중 가장 경미한 것조차도 간과하지 않던 프랑수와즈였건만, 내가 괴로워할 경우, 그녀는 나의 괴로움이 동정을 받거나, 하다못해 누구의 눈에 띄는 기쁨조차 나에게 돌아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예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곤 하였다. 그녀는 내가 우리의 새 집에 대해 말을 꺼냈을 때에도 즉시 그렇게 처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사한지 이틀 후, 옛 집에 잊고 남겨둔 옷들을 가지러 가더니, 이사 후유증으로 내가 아직 ‘신열’에 시달리고, 이제 막 황소 한 마리를 삼킨 보아처럼, 나의 눈이 ‘소화시켜야’ 할 긴 시골풍 찬장 하나 때문에 나의 몸에 울룩불룩 혹이 솟은 듯 괴로워하고 있건만, 프랑수와즈는 훼절한 여인들처럼 돌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살던 동네 옆 대로에서 자기가 질식해 죽는 줄 알았고 ‘길을 잃어’ 헤매었으며, 그 옛 집의 층계들처럼 불편한 것들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노라고 하면서, 이제는 누가 ‘제국 하나를 준다 해도’ 그리고 자기에게 수백만 금을 준다 해도—개연성 없는 가정들이다—그곳에 돌아가 살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이(즉 부엌과 복도에 관련된 것들이) 우리의 새 집에 훨씬 잘 ‘배열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 새 집이 게르망뜨 저택에 딸려 있던 아파트였다는 사실을 밝혀야 할 것 같다(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져 더 맑은 공기가 필요했던지라 우리가 그곳으로 이사하였으며, 그 이유를 할머니에게는 철저히 함구하였다).
어떤 명칭들이, 전에 우리가 그것들 속에 첨가하였던 불가지한 것의 영상을 우리에게 제공하면서 동시에 실재하는 어느 장소를 가리키고, 그러한 작용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그 장소를 우리가 첨가하였던 영상과 동일시하지 않을 수 없게 하여, 어느 도시가 비록 실제로 내포할 수는 없으되 그 도시의 명칭으로부터 우리가 더 이상 축출할 수 없게 된 하나의 영혼을 찾으러 떠날 지경이 되는 나이에 이르면, 그 명칭들이, 우의화들이 그러듯, 도시들이나 강들에게만 하나의 개별성을 부여하지 않고, 즉 물리적 세계만을 상이함들로 알록달록하게 치장하며 경이로움으로 가득 채우지 않고, 사회적 세계 또한 그렇게 만든다. 그러면 각각의 성들과 유명한 저택들 혹은 궁정들 또한, 숲들이 자기네 정령들을 그리고 강과 바다가 고유의 신들을 가지듯, 자기네의 귀부인 혹은 요정을 갖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요정이, 그러한 이름 속에 숨겨진 채, 자기에게 자양분을 제공하는 우리 상상력의 삶과 뜻에 따라 변신한다. 나의 내면에 존재하던 게르망뜨 부인을 감싸고 있던 환경 또한, 여러 해 동안 환등 유리 한 조각의 혹은 교회당 그림 유리창의 반사광에 불과하다가, 전혀 다른 몽상들이 그 환경에 급류들의 거품 이는 습기가 스며들게 하였을 때, 그렇게 자기의 그 색깔들을 흐릿하게 지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어느 명칭에 상응하는 실존 인물 곁으로 우리가 다가갈 경우, 그 명칭 속에 숨어 있던 요정은 시들어 버리는 바, 그러면 명칭이 그 인물을 반사하기 시작하건만 그 인물이 요정다운 그 무엇도 간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그 인물로부터 멀어지면 요정이 부활할 수도 있으나, 만약 그 인물 곁에 머물 경우, 요정 멜뤼진느가 사라지는 날 뤼지냥 가문의 혈통이 단절되어야 했던 것처럼, 명칭 속에 있던 요정이 영영 죽어 버리고 요정과 함께 그 명칭도 죽는다. 또한 그러면, 그 명칭에 끊임없는 덧칠을 가하여, 우리가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었을 낯선 여인의 아름다운 원래 모습을 결국 다시 발견할 수는 있을 것이로되, 그 명칭은, 우리 앞으로 지나가는 어떤 사람이 우리와 아는 사이인지, 그리하여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참고해야 할, 사진 곁들인 단순한 신분증에 불과하다. 하지만 예전 어느 해에 경험한 하나의 느낌이—연주를 맡았던 서로 다른 음악가들 고유의 음색과 주법을 보존하는 기록 장치 갖춘 악기들처럼—우리의 기억력에게, 우리들로 하여금 그 시절 우리의 귀에 들리던 특유의 음색 갖춘 그 명칭을 다시 듣게 해주도록 허락할 경우, 그 명칭이 겉보기에는 비록 변하지 않은 것 같아도, 우리는 그것의 동일한 음절(소리 마디)들이 우리에게 여러 시기에 걸쳐 연속적으로 환기시켜 주던 몽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느낀다. 그리하여 한 순간, 그 명칭이 어느 옛 봄날에 간직하고 있던 새들의 지저귐을 다시 들으면서, 그 지저귐으로부터, 작은 그림 물감 튜브들에서처럼, 우리가 회상하였다고 믿은 그 옛날의 정확한, 망각하였던, 신비한, 그리고 생생한 색조들을 이끌어낼 수 있건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변변찮은 화가들처럼, 하나의 같은 화포 위에 펼쳐 놓은 우리의 과거 전체에, 임의적 기억이 가지고 있는 상투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색조들이나 부여한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우리의 과거를 구성하고 있는 순간들 각각은, 유일한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최초의 창조를 위하여,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그 당시의 색깔들을 사용하였고, 그리하여, 예를 들자면, 어떤 우연 덕분에 게르망뜨라는 명칭이 그토록 오랜 세월 후, 오늘의 것과는 전혀 다른, 뻬르스삐에 아가씨의 혼례식 거행되던 날 나의 귀에 들리던 음색을 한 순간이나마 다시 띠면서, 젊은 공작 부인의 부푼 스카프가 벨벳처럼 부드럽게 보이도록 해주던 그토록 포근하고 화려하며 신선한 그 연보라색과, 하늘색 미소가 햇살처럼 어린 그녀의 두 눈을 마치 다시 피어났으되 채취할 수 없는 빈카꽃인 양 나에게 돌려줄 경우, 그 색깔들이 나를 문득 황홀경에 들게 한다. 또한 그 시절에 듣던 게르망뜨라는 명칭은, 산소나 다른 어떤 기체를 넣어 둔 작은 풍선들 중 하나와 같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것을 터뜨려 그 속에 있는 것이 분출되도록 하는데 성공할 경우, 나는, 그 해 바로 그 날, 광장 한 구석에서 일던, 그리고 비가 내릴 조짐이었던 그 바람에 실려 나부끼던 산사나무꽃 향기 섞인 꽁브레의 대기를 다시 호흡하곤 하는데, 그 시절 바람은, 햇빛이 먼지처럼 날아올라 흩어지게 하다가는 다시 교회당 제의실에 있던 붉은 양모 융단 위에 내려앉아, 제라늄의 분홍색에 가까운 화려한 살색으로, 그리고 이를테면 바그너적이라 할 수 있는 다정함으로, 즉 환희 속에서도 축하연에 그토록 고결함이 감돌게 하는 다정함으로, 그 융단을 감싸도록 내버려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죽어 버린 음절들 속에서 최초의 실체가 파르르 떨면서 본래의 형태와 자기 고유의 섬세한 끌 자국이 되살아나게하는 것을 우리가 문득 느끼곤 하는, 그처럼 희귀한 순간들 이외의 경우에도, 즉 명칭들이, 너무 빠르게 회전하여 회색으로 보이는 무지개빛 칠한 팽이처럼 색체를 몽땅 잃어, 순전히 실용성밖에 갖지 않게 된 일상생활의 현기증 일으키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몽상에 잠겨 곰곰이 생각하고, 과거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우리를 휩쓸어 마구 이끌어가는 끊임없는 움직임의 속도를 늦추거나 잠정적으로 중단시키려 노력할 경우, 우리는, 하나의 같은 명칭이 우리의 생애 동안에 차례차례 우리에게 보여준 색조들이, 나란히 놓였으되 각각 완전히 분별되는 상태로 우리 앞에 다시 조금씩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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