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보이스: 조로아스터교의 역사

조로아스터교의 역사 - 10점
메리 보이스 지음, 공원국 옮김/민음사


이 책을 읽기 전에
옮긴이의 말
서문
약어표

1부 다신교적 배경
1장 개괄
2장 다신교 시절 이란의 신들
3장 악마와 악행, 전설적 동물들, 최초의 인간들과 영웅들
4장 죽음, 내세 그리고 장례 의식
5장 세계의 성격과 그 기원
6장 다신교 숭배 의식

2부 조로아스터와 그의 가르침
7장 조로아스터
8장 아후라 마즈다, 앙그라 마이뉴 그리고 자비로운 불사자들
9장 두 가지 상태와 세 개의 시간

3부 역사 이전 시기의 신앙
10장 기록되지 않은 세기들
11장 조로아스터와 그 아들들에 관한 전설들
12장 순결법

부록 조로아스터교의 장례 의식

 


 

서문

서구에서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행해진 지는 겨우 20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연구가 조로아스터교의 성서집으로서 집합적으로 아베스타라 불리는 책의 해석에 기반을 두는데, 이 책이 18세기 후반까지 조로아스터교 공동체 밖으로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조로아스터라는 이름은 지식인들에게 전설적인 동방의 성자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베스타가 학자들의 손에 쥐어지자 그들은 이 책에서 그 명성을 정당화할 가르침들을 열심히 찾았다. 그때 유럽의 지식인들은 기독교와 이성이라는 이중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고, 기독교의 권위는 아직 과학적 진보의 도전을 받지 않은 터였다. 그리고 조로아스터의 신앙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교사들 중 한 명에 의해 제창되었으므로 이성적인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이리라 기대되었다. 하지만 그렇기는커녕 조로아스터교 경전들이 많은 면에서 동떨어지고 생소한 것임이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우선 조로아스터 신앙은 최고신(God) 아래 수많은 하위 신격을 인정했으며, 이들은 풍부하고 복잡한 의례와 예식을 통해 숭배되었다. 유럽에서는 기독교와 그리스 신화에 대한 지식이 결합하여 다신교는 인류의 유치한 과거의 유산에 속하며, 그 건은 모든 선구적인 민족 사이에서 일신교로 대체되었다는 확신을 만들어 냈다. 더욱이 개신교는 유일신을 숭배하면서도 의례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로아스터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 있는 전통(전승)의 도움으로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서구인들에게 버거운 일이었다. 그로인한 딜레마의 해결책이 결국 뛰어난 문헌학자 마르틴 하우그에 의해 19세기에 발견되었다. 고생스러운 연구 끝에 그는 가타(Gathas, 열일곱 개의 고대 찬가 (Hymn) 묶음)를 아베스타 가운데 조로아스터 자신의 언급으로 여겨질 수 있는 유일한 부분으로 분리해 냈고, 성실함을 다하여 조로아스터 추종자들의 실제 믿음이나 관행과는 별도로 이 원시적이고 극히 어려운 문서를 해독해 나갔다. 그는 그들의 선조들이 일찌감치 자신들의 예언자의 가르침을 변질시켰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우그는 개척자로서 이 난해한 찬가를 들고 씨름하다 마침내 조로아스터가 유대 예언자들의 것보다 오히려 더 엄격한 일신교를 설파했음을 이해했는데,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은 기도 이외에는 어떤 희생이나 숭배 의식도 배격하는 것이었다. 하우그는 이렇게 가정했다. 즉 고대 이란의 예언자는 이성적이며 윤리적인 유신론을 지녔고, 이 신념은 그의 민족의 관습이나 통념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어서 그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그 가르침의 엄격함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어 곧 가르침을 비틀었고, 얼마간 기존의 믿음과 방식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로아스터의 메시지를 단순화한 결과 중 하나는 후대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에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친 메시아 교리 및 종말론적 교리의 형성에 그가 기여한 결정적인 역할을 인정하기를 지연시켰다는 것이다. 하우그는 그 예언자의 명성을 높이려 했으나 실은 그가 인류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감소시켰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은 조로아스터교 연구의 강력한 발전 요인이었고, 심지어 오늘날 조로아스터교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에서 이 주장은 학계의 수많은 거장들에 의해 채택되었는데, 그들은 이로써 자신들의 시대와 문화가 용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로아스터를 바라볼 수 있게 되자 기뻐했다. 그리고 1860년대에 하우그는 인도에서 몸소 자신의 주장을 상세히 설명했는데, 그곳의 조로아스터교 집단 중 하나가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이 집단은 봄베이(뭄바이)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이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하우그의 이론에서 그때껏 그들을 괴롭히던 문제에 대한 즉각적이고 급진적인 해결책을 찾았다. 그 문제란 그들의 공경스러운 신앙의 정교한 교리와 관습을 19세기의 과학적 사고와 조화시키고 개신교 기독교 선교사들의 공세에 대항하여 그 권위를 지켜 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조로아스터가 이원론자(그들을 개종시키려는 기독교인들이 혐오하던 교리적 입장)도 아니었고 모든 의례주의나 교리의 세부 사항으로부터 자유로운 단순한 신념을 가르쳤다는 하우그의 생각을 열정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므로 그의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단지 이를 기반으로 기존의 종교를 개혁하기만 하면 됐고, 이는 다시 한번 무신론자가 아니면서 이지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로아스터교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개혁주의자들은 정력적으로 과업에 착수했는데, 대개 영어로 의사를 표출했기에 서구에는 주 로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순환적 과정에 의해 그들의 목소리는 서구에서 그들의 고대 신앙에 대한 확고한 학문적 해석으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는 지식인과 단순한 사람들 모두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는데, 반대자들은 유럽인의 책상머리에서 새로 강의된 종교를 위해 조상들의 관습과 신념을 기꺼이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유럽에서도 합리적 유신론에 대한 강경한 비판자들이 있었는데, 비판자들 중 일부는 반대편의 극단까지 가서 초기 조로아스터교에서 베다 시절 인도와 그리 다르지 않은 전통적 다신교를 보았다. 인도 조로아스터교도의 일파인 파르시 사이의 종교적 논쟁과 마찬가지로 19세기의 학문적 논쟁은 20세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공통의 기반을 찾기가 어려워 유럽과 인도 모두에서 항상 새로운 해석이 만들어졌고, 그 해석 중 일부는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이나 전승의 실상과 기이하게 동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학계는 당연히 관행보다는 문헌, 경건한 신앙 생활보다는 교리와 신화에 더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러한 한계로 인해 환상이 더 쉽게 무제한의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20 세기에 조로아스터교에 관한 이론이 크게 늘었다. 한편 문헌학자와 역사학자, 고고학자, 화폐학자들의 작업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 세기의 박해에서 비롯된 조심스러운 태도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의례와 관습을 기술하고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2차 문헌들을 출판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유산을 외부 세계와 공유한 조로아스터교도 학자들에 의해 모든 방면의 실제적인 지식도 그만큼 늘었다. 그러나 서구 학자들이 이런 책들을 이용하기가 언제나 쉽지만은 않았고, 특히 제의를 상술한 책들을 이용하기는 더욱 어려웠는데, 이런 책들은 비조로아스터교도에게는 생소한 기본 지식과 종교적 태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부는 실질적으로 연구되지 않은 채 남았고, 그리하여 초기의 오해들은 새로운 자료원들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았다.

조로아스터교의 최근 발전을 평가하는 시각을 얻는 동시에 오늘날 이용 가능한 초기 조로아스터교에 관한 중거 무더기를 통제하는 수단을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예컨대 이란에서 파르티아의 지배 500년이나 이슬람교가 도래한 후 첫 1000년 동안 조로아스터교의 역사처럼 상상으로 너무나 쉽게 건너뛸 수 있는 커다란 간격을 허용하지 않고 예언자 시대에서 지금까지 계속 이어진 신앙의 역사를 쓰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료가 부족해 그런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의 어려움은 그야말로 가공할 만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작업이 더 이상 불가능하지 않을 정도의 자료가 축적되었다. 이 과업에 착수하면서 필자는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은, 설교한 지 수천 년 후 처음에는 조로아스터의 가르침과 순전히 지적으로 싸우기 위해 온 완전히 다른 문화와 종교적 유산을 가진 학생들보다는 자신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에게 더 잘 이해되었으리라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이 책은 전반적으로 조로아스터교의 전승에 상당히 의존할 텐데, 이 전승은 처음부터 19세기 중반 유럽에 충격이 가해지던 시절까지 상당히 강고하며 일관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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