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4 - 피어나는 소녀들의 그늘에서 2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4 - 10점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2부 고장들의 명칭-고장 · 9

옮긴이 주 · 468




11 두 해 후, 할머니와 함께 발백으로 떠났을 때에는, 질베르뜨와 관련하여 내가 거의 완전한 무관심에 도달해 있었다. 내가 새로운 얼굴이 발산하는 매력의 영향력 밑에 놓여 있었을 때, 그리하여 다른 소녀의 도움을 받아 고딕식 대교회당들과 이딸리아의 궁전들이나 정원들을 깊이 알게 되리라 기대하였을 때, 나는 우리의 연정이라는 것이, 특정 여인에게로 향한다는 그것의 특성상, 아마 실재하는 그 무엇이 아닐 것이라는 구슬픈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왜냐하면, 유쾌한 혹은 괴로운 몽상들의 다양한 연상이 한동안 그 연정을 어떤 한 여인과 연계시킬 수 있어, 심지어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이 필연적으로 그녀에 의해 우리에게 고취되었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우리가 그 연상으로부터 의도적으로 혹은 자신도 모르게 벗어났을 경우, 그 연정이, 마치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에서 비롯되는 듯, 스스로 다시 태어나 다른 여인에게로 향하니 말이다. 하지만 발백으로의 그 출발 순간에는, 그리고 그곳에 머물던 초기에는, 나의 무관심이 아직은 간헐적일 뿐이었다. 내가(우리의 삶이 하도 연대순에 따르지 않고, 연속되는 날들 속에서 날짜 착오를 일으키는지라), 떠나기 전날이나 그 전날보다 더 오래된, 질베르뜨를 사랑하던 날들 속에 처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러한 경우에는, 그녀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사랑하던 시절에 그랬을 것처럼 문득 괴로워졌다. 일찍이 그녀를 사랑하였던 나의 자아가, 이미 다른 하나의 자아로 거의 완전히 대체되었건만, 불쑥 다시 모습을 드러내곤 하였고, 그것이, 어떤 중요한 것보다는 하찮은 것에 의해 훨씬 더 자주 나에게 되돌려지곤 하였다. 예를 들어, 노르망디 지방에서의 체류에 대해 미리 이야기하거니와, 발백의 방파제 위에서 어느 날 나와 마주쳐 지나간 어떤 낯선 사람 하나의 입에서 ‘체신성 장관 비서실장 가족’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당시에는 그 가족이 나의 삶에 장차 끼칠 영향을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그 말이 나에게는 하찮게 여겨졌을 것이 당연하건만, 오래전부터 대부분 파괴되어 사라진 나의 자아 하나가 느끼던, 질베르뜨와의 결별에 기인했던 격렬한 괴로움을 야기시켰다. 즉, 질베르뜨가 내 앞에서 자기의 아버지와 ‘체신성 장관 비서실장’의 가족에 대하여 나누던 대화를, 내가 전에는 단 한 번도 다시 뇌리에 떠올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사랑의 추억들도 기억의 보편적 법칙에서 예외적으로 벗어나지 않으며, 기억의 보편적 법칙 또한 습관의 더 보편적인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습관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약화시키는지라, 우리에게 하나의 존재를 가장 생생하게 상기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가 망각한 것이다(그것이 하찮은지라 우리가 그것의 내재적 힘을 몽땅 그대로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유로, 우리 기억의 가장 훌륭한 부분은 우리의 밖에, 빗줄기 오락가락하는 바람결 속에, 어떤 방의 곰팡이 냄새 혹은 모닥불이 처음 타오를 때 풍기는 냄새 속에, 우리들 자신 중 우리의 지성이 쓸모없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을, 그러나 우리 과거의 마지막 비축물이며 따라서 가장 소중한, 우리의 눈물이 고갈된 듯했을 때에도 우리로 하여금 아직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그것을, 우리가 다시 발견하게 되는 모든 곳에 있다. 우리들 밖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들 속에, 그러나 우리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 비교적 연장된 망각 속에 숨겨진 마지막 비축물이다. 우리가 가끔 옛날의 우리를 다시 발견하고, 옛날의 그 존재가 그랬듯이 사물들과 마주하며, 그러면 우리가 더 이상 현재의 우리가 아니라 옛날의 존재이며, 따라서 지금은 우리에게 무관심한 것을 그 존재가 좋아하는지라, 우리가 다시 고통스러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망각 덕분이다. 습관적인 기억의 밝음 속에서는 과거의 영상들이 차츰 창백해져 지워지고, 그것들 중 아무것도 남지 않아, 우리는 그 과거를 영영 다시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혹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다시는 접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는 어떤 책 한 권을 국립도서관에 기탁하듯, 어떤 단어들이(‘체신성 장관 비서실장’과 같은) 정성스럽게 망각 속에 숨겨져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 과거를 되찾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질베르뜨에게로 향한 사랑의 괴로움과 그 사랑의 소생은 꿈속에서 겪는 것들보다 길지 않았고, 이번에는 반대로, 발백에 그것들을 지속시킬 옛날의 습관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 습관의 그러한 효능이 모순적인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습관이 다양하고 복잡한 법칙에 복종한다는 뜻이다. 빠리에서는 내가 습관 덕분에 점점 더 질베르뜨에 무심해졌었다. 그러나 발백으로 떠났을 때에는, 그 습관의 변화가, 즉 그 습관의 일시적인 중단이, 그 습관이 시작한 일을 완성시켰다. 습관은 모든 것을 약화시키되 그것들을 안정시키고, 붕괴를 초래하되 그 상태가 무한히 지속되게 한다. 나는 여러 해 전부터 날마다 전날의 기분을 틀로 삼아 그럭저럭 그날의 기분을 주조하였다. 하지만 발백에서는, 그 곁으로 아침마다 빠리의 것과는 다른 조반을 나에게 대령하는 새로운 침대가, 질베르뜨에 대한 내 사랑이 양식으로 삼던 사념들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칩거가 흐르는 날들을 정체시키는지라, 장소를 바꾸는 것이(상당히 드문 것은 사실이지만) 시간을 버는 최선의 방법인 경우가 있다. 나의 발백 여행은 외출을 감행하고서야 자기의 병이 치유되었음을 간파한 회복기 환자의 최초 외출과 같았다.




308 엘스띠르가 나에게 그녀의 이름이 알베르띤느라 하였고, 그가 거의 머뭇거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상당히 정확하게 내가 특징들을 묘사한, 그녀와 무리를 이루었던 다른 친구들의 이름도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순간 그녀들의 사회적 신분을 추측함에 있어 내가 오류를 범하였음을 깨달았고, 그 오류는 내가 발백에서 흔히 저지르던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곳에서는, 어느 상점 주인의 아들들이 말을 타고 나타났을 때, 그들이 왕자들인 줄 알지 않았던가! 그녀들이 관련된 이번 경우, 공업이나 상업 등 기업가들의 세계에 속하는 매우 부유한 하층 중산층의 딸들을 내가, 고약한 냄새 풍기는 수상한 계층의 딸들로 여긴 오류를 범하였다. 그 부유한 계층은 애초부터 나의 관심 밖에 있었으니, 내 눈에는 그 계층이 일반 노동자 계급의 신비도, 게르망뜨 가문 같은 상류사회의 신비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틀림없이, 해변 휴양지 생활의 부박하고 눈부신 공허에 의해, 선입관에 기인한 매력이 경탄한 내 눈 앞에서 그녀들에게 부여되지 않았다면, 그녀들이 큼직한 도매업자들의 딸들에 불과하다는 상념을 내가 성공적으로 극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는 그녀들을 바라보면서, 프랑스의 중산층이, 가장 다양한 조각품들을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작업실이라고 그저 찬탄할 수밖에 없었다. 뜻밖의 유형들이 얼마나 많으며, 얼굴들의 성격이 얼마나 독창적이며, 그 윤곽들은 얼마나 과감하고 신선하며 순박한가! 그 디아나들과 뉨파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인색한 중산층 사람들이 내가 보기에는 가장 위대한 조각가들 같았다. 그 소녀들의 사회적 변신을 내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오류의 발견과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관념의 수정이란 화학 반응에 못지않은 즉각성을 가지고 있는지라—내가 처음 경륜 선수나 권투 선수들의 정부들일 것이라 여겼던 그 소녀들의 불량스러워 보이던 얼굴 뒤에, 그녀들이 우리가 잘 아는 이러저러한 공증인의 가문과 친밀할 수도 있다는 상념이 어느새 자리를 잡았다. 나는 알베르띤느 씨모네라는 소녀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녀 또한 자기가 훗날 나에게 어떤 사람이 될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내가 해변에서 우연히 들은 씨모네라는 성씨조차도, 혹시 누가 그것을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면, 나는 ‘n’ 철자 둘을 사용하였을 것이고, 그 가문이 그 철자를 하나만 사용하는 것에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회적 사다리의 밑으로 내려갈수록, 태부림 속성이, 아마 귀족의 고귀함이라는 것만큼이나 무가치하되 더 미미하고 각 개인에 따라 더 독특한지라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하는, 그런 부류의 하찮은 것들에 매달린다. 아마 사업에서 큰 손해를 보았거나 그보다 더 나쁜 일을 겪은 씨몬네라는 가문이 있었던 모양이다. 여하튼 씨모네 가문 사람들은 혹시 누가 자기네의 철자 ‘n’을 중복해 쓸 경우, 그것이 마치 하나의 험담인 양 화를 냈던 모양이다. 그들은 철자 ‘n’을 중복 사용하지 않고 하나만을 쓰는 유일한 가문이라는 사실에, 몽모랑씨 가문 사람들이 프랑스 제일의 세도 가문이었다는 사실에 그러는 것만큼이나 자긍심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엘스띠르에게 그 소녀들이 발백에 사느냐고 묻자, 몇몇은 그렇다고 그가 대답하였다. 그녀들 중 하나의 별장은 백사장 끝, 까납빌 절벽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그 소녀가 알베르띤느 씨모네와 절친하다고 하였던지라, 할머니와 산책하던 중 마주쳤던 그 소녀가 틀림없이 알베르띤느 씨모네라고 내가 더욱 믿게 되었다. 물론 해변에 수직으로 이어지고 유사한 모퉁이를 이루는 좁은 길들이 하도 많았던지라, 그것이 어느 길이었는지 내가 정확히 명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정확한 추억을 갖고자 하나, 영상이 다시 나타날 순간에는 그것이 이미 흐려져 있다. 하지만 알베르띤느와, 자기 친구의 집으로 들어가던 그 소녀가,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나는 거의 확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골프 치는 갈색 머리 소녀가 나에게 드러낸 무수한 영상들이, 그것들이 서로 그토록 다르건만, 중첩되어 있고(그 영상들이 모두 그녀의 것들임을 내가 알고 있으니), 내가 내 추억의 실을 따라 거슬러 올라갈 경우, 그녀라는 확실한 신원의 엄호 아래 그리고 내면의 통로와 같은 곳에서, 그 같은 인물을 이탈하지 않고 모든 영상들을 회상할 수 있는 반면, 할머니와 함께 산책에 나섰던 날 마주쳤던 소녀까지 거슬러 올라가려 할 경우, 나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소녀가 알베르띤느임을, 친구들과 해변을 따라 산책하던 중에 그녀들 가운데서 자주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수평선 위로 모습이 선명히 떠오르던 바로 그 소녀임을 확신하지만, 그녀가 나의 눈에 충격을 주던 순간에 내가 모르던 하나의 신원을 그녀에게 돌이켜 부여할 수 없는지라, 다른 모든 영상들이 그 순간의 영상과 분리되어 있었고, 따라서 확률론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좁은 길이 해안과 교차하는 그 모퉁이에서 나를 그토록 과감하게 바라보던, 그리고 내가 믿거니와 나에게 연정을 품었을 수도 있을 볼 통통한 그 소녀를, ‘다시 본다’는 단어의 엄격한 의미대로 말한다면, 영영 다시 보지 못하였다. 


작은 무리를 이루던 소녀들 모두, 처음 나의 마음을 뒤흔든 집단적인 매력을 각자 조금씩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 다양한 소녀들 사이에서 내가 드러내던 망설임이, 훗날, 심지어 내가 알베르띤느를 열렬히 사랑하던(나의 두 번째 사랑이었다) 시절에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간헐적이고 지극히 짧은, 일종의 자유를 허락한 그 원인들에 가세하였던 것일까? 그녀를 향해 확정적으로 방향을 정하기 전에 그녀의 모든 친구들 사이에서 방황한 탓에, 나의 사랑이 가끔 자신과 알베르띤느의 영상 사이에 얼마간의 ‘느슨함’이 유지되게 하였고, 그 느슨함이, 마치 제대로 조정되지 않은 조명 장치처럼, 나의 사랑이 그녀에게 되돌아와 고정되기 전에 다른 소녀들 위에 머물 수 있게 해주었으며, 따라서 내가 느끼던 마음의 고통과 알베르띤느와 관련된 추억 간의 관계 또한 나에게는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니, 내가 나의 고통을 아마 다른 사람의 영상과 결합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현상이 나에게, 번개가 명멸하는 짧은 동안이긴 하지만, 현실을, 질베르뜨에게로 향하던 나의 사랑에서처럼 객관적 현실뿐만 아니라(나는 그 사랑을, 오직 나 자신으로부터만 독특한 자질과 내가 사랑하던 존재의 특별한 성격과 나의 행복에 그 존재가 불가결하도록 해주던 모든 것을 내가 이끌어낼 수 있을, 하나의 내적인 상태라 여겼다), 심지어 내면적이고 순전히 주관적인 현실까지도 자취를 감추게 하도록 허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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