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11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11, 12, 13장

❧ ⟪고백록⟫ 첫 문장
“Magnus es, Domine, et laudabilis valde.” ‘마그누스 에스, 도미네, 에트 라우다빌리스 발데.’ — ‘위대하시도다 당신은, 주여, 그리고 찬양 받으실 만 합니다 크게.’(1,1,1) — 고난을 이겨내고 신의 섭리를 알게 된, 확신에 가득찬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찬미


❧ 신을 떠남과 신으로 돌아감
in te에서 in te로: 내가 신 안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최초의 in te, 신을 떠남(abs te), 신으로 향함(ad te), 다시 신 안에 있음을 확신하는 in te.
“시작과 끝은 같다. 그러나 시작과 끝은 다르다. 정신의 자각, 회심을 한가운데 두고 그 둘은 질적인 차이를 가지게 된다. 바깥 세상은 어찌 되든 우리의 마음이 변함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졌다.”


❧ 신적 입장에 올라섬의 의미
“신은 인간의 거대서사가 극한으로 투사된 존재이다. 회심 이후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신의 입장에 올라서서 자신에 대해 말한다.” 이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이다.

 

 

2021.05.25 숨은 신을 찾아서 —11

⟪숨은 신을 찾아서⟫ 11장부터 읽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자기가 어떤 일을 다 겪은 다음에 인생을 회고하면서 쓴 것이므로, 지금 보니 신이 처음부터 있었네, 어떤 목적, 소명을 주었구나를 나중에야 깨닫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기정당화, 자기변론(변명)이다. 신이 나에게 임해있구나를 모르는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그냥 그 살마이 전진하는 과정에서 쓸 때는 아 진짜 힘들어, 고통스러워라고 쓸 것이다. 그런데 다 겪어 본 다음에 쓰는 사람은 첫머리에 내가 잘나가고 있어, 신께서 이 소명을 주신거야, 그러니까 첫머리에 신이 위대하도다를 쓸 것이다. 이 책 자체가 위대한 책이기는 한데 속된 마음에서 읽어보면 왜 첫 문장에서, 첫 문장을 보면 "Magnus es, Domine, et laudabilis valde.” 마그누스 에스, 도미네, 에트 라우다빌리스 발데 이렇게 썼는지를 알 수 있겠다는 말이다.

신을 찬양한다고 하는 것, 얼마나 신에게 감윽되었으면 이렇게 하겠는가. 굉장히 연악하고 미약하고 그런 사람, 파스칼은 아무런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신을 찬양하는 것이고, 이것은 이미 다 이룬 경지에서 신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이것은 확신에 가득 찬 안심의 빛이 자기에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정말로 미약하고 하찮은 것을 느껴서 "위대하시도다 당신은, 주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신이 들어왔으니까 찬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즐거운 마음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일들도 지나가고 보니까, 즐거운 것이 된다. 

ⅩⅠ 이제부터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보충일 뿐이다.

깨닫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으니 제멋대로 살았으니 신을 떠났다. abs te. 그런데 신의 눈으로 보기에는 떠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익히 겪어본 일을 너무나 빤한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 일을 누군가가 그러고 있을 때. 그래서 신을 떠다는 aversio, 원래는 in te, 신을 떠났다가 abs te, 몸 전체를 돌려서 신으로 향한다. ad te. 그러고 나서 conversio, 돌아온다. 결단하는 의지의 회심이 생겨난 다음에야 비로소 개종이라는 최후의 회심이 가능한 것이다. 처음의 in te와 ad te 신을 향해서 돌아왔을 때의 in te, 시작과 끝은 같지만 질적인 차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게 변증법이다. 끊임없이 나아갔다가, in te, ad te하고 갔다가 오고 하는 것이다. 세상은 그대로이고 나도 그대로인 것 같지만 계속해서 나의 정신 속에서 떠남과 회심과 자각이 일어나면서 이전의 자각, 회심, 되돌아옴이 쌓인다. 중첩적이라고 한다. 이런 과정들이 정신속에서 계속 일어나고 이게 바로 정신의 변증법적 과정이다 라고 말한다. 변증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신으로 돌아오는 과정만 보면 신학인데 이것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나를 생각하면 '세계성'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철저하게 고립된 개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 속에 있는 나이다. 나의 의식은 곧 세계에 대한 의식이다.

ⅩⅡ 우리는 본래 신 안에 있었다. 우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 제멋대로 살았다. 제멋대로 사는 것은 신을 떠난(abs te) 것이다. 

ⅩⅡ 결단하는 의지의 회심이 생겨난 다음에야 비로소 '개종'이라는 최후의 회심이 가능한 것이요, 이때 우리는 신 안에 있음을 자각적으로 알게 된다. 'in te'에서 'in te'로, 시작과 끝은 같다.

13장은 회심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검토한다. "회심이 결정적 계기이려면, 회심 이전은 고통스러운 것이어야만 한다. 나중에 돌아보면 안심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들이었다고 정당화할 수 있겠지만 고통을 겪는 순간에는 나중에 그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신 뿐이다," 중요한 말이다. "신은 인간의 거대 서사가 극한으로 투사된 존재이다." 나름 신에 대한 규정을 내려본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기독교의 창조론은 것은 의미부여론이라고 했다.

ⅩⅢ 회심이 결정적 계기이려면, 회심 이전은 고통스러운 것이어야만 한다. 나중에 돌아보면 안심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들이었다고 정당화할 수 있겠지만 고통을 겪는 순간에는 나중에 그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신뿐이다. 신은 인간의 거대 서사가 극한으로 투사된 존재이다.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기 시작할 때, 좋은 의미로 신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가 되어버리면 자아가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진 사람의 생각이다. 그것이 극한으로 투사되어서 신을 저기다가 상정하고 그 신과 나를 연결지어서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여기에 있다해도 신을 상정하고 신과 나의 관계 속에서 내가 하는 일, 내 눈 앞에 펼처진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신의 입장에 올라서서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회심 이후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신의 입장에 올라서서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 그래서 그것은 자기를 신의 섭리의 전제해서 해석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실존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서 고통스럽다고 외치는 것이라면, 그 단계를 거쳐서 신의 입장에 올라서서 말하는 사람은 신의 섭리를 전제해서 사태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회심이라고 하는 것의 다른 의미가 되겠다.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있게 자신의 과오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거칠 것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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