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10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10장

❧ ⟪고백록⟫의 구성
“⟪고백록⟫은 신앙으로 가는 길을 간명하게 도식화한다. 죄에 물들어 있는 상태-회심 단계-신을 향하는 단계. 이 단계들에는 잘 배합되어 들어간 삶의 타락한 국면들, 그의 어머니 모니카라는 극적인 인물 등이 제시되고, 고백 다음 단계에는 창조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시간론, 악의 기원, 구원의 은총과 같은 추상적인 신학적 사변들이 무겁게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신에 대한 사랑과 찬미’가 감싸고 있다. 완전한 구성을 갖춘 책이다.”


❧ 주관적 관념론과 객관적 관념론
“내가, 바로 내가 신을 향한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관적 관념론이다. 나도 그러하다. 내가 정한 의미를 향해서, 그것이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어도, 나 자신이 나아간다. 이것이 나의 주관적 관념론이다.”
“플라톤은 형상形相이라는 불변의 실재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저기에 있다. 인간은 그것을 알아내서 그것을 모방(mimēsis)하여야만 한다. 그것을 알아내지 못하면 형상닮은 것, 즉 파라다이그마paradeigma라도 알아내서, 그것이 하늘에 바쳐져 있다고 간주하고 그것이라도 모방해야만 한다.”

 

 

2021.05.22 숨은 신을 찾아서 —10

⟪숨은 신을 찾아서⟫를 철학개론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아우구스티누스가 들어있는가. 이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이고 좀 더 규정적으로 얘기하면 그냥 기독교를 믿는 사람에게나 어필할 만한 사람인데 철학개론에 잔뜩 들어갈 일인가. 분량도 꽤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책 전반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나온다. 우리는 데카르트가 철학자라고 하는 데에는 주저없이 동의한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무시하고 자기철학을 전개했다고 말한다. 《철학고전강의》에서 데카르트의 《성찰》을 다룬 부분을 다시 살펴보면 《성찰》은 자서적인 이야기이다. 그 구성을 살펴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은 사람은 기시감이 든다. 다시 말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어떤 학자들은 근대적 주관성의 출발점이라고 얘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5세기 사람인데 1200년 후 17세기 근대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면 정말 시대착오적인 이야기겠다. 그런 식으로 철학자들은 전통을 저 먼데서 끌어오는 경향이 꽤 있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주관적 관념론을 보고 있으면 정말 기시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여러차례 얘기했듯이 어떤 사람을 철학자로 규정하고 철학사에서 다루고, 어떤 사람은 신학자로 생각해서 기독교 신학에서만 다루는 것은, 처음에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어느 정도 공부의 성취를 넘어가려면 골고루 읽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지난 번 제9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이 전진적 배진적 구성을 성취하였다고 말했다. 

Ⅸ 아우구스티누스처럼 회고적으로 서술하면서도 하나의 목적에 따라 전진적 배진적 구성을 성취하게 할 것이다.

데카르트의 《성찰》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만큼 그 구성이 탁월하지는 않다. 데카르트의 《성찰》을 돌이켜 보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간다. 믿을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그것을 생각하는 나를 철학의 제일 출발점이라고 하는 코기토,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명제에 이른다. 그리고 나서 그것이 내가 생각한 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 감지되었을 때 신을 찾아 나선다. 그 신이라는 존재가 틀림없다고 할 때 데카르트에게 신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신이 있다는 것을 자기가 확신하는 것 이외에는 사실 아무런 존재 증명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존재 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로부터 데이터가 들어와서 짜맞춰야 하는 것인데 데카르트에서 신존재증명은 그냥 나는 있다, 그리고 내가 신을 믿는다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확신한 다음에 대상 세계에 대한 앎으로 나아간다. 그 구조가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지는 않다. 어떤 점에서는 주관적 관념을 근대에 와서 되살려 낸 것에 불과하지 그게 데카르트가 굉장히 치밀한 수사학을 구사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바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철학을 공부할 때는 데카르트를 먼저 공부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전혀 읽지 않은 상태로 끝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고전 텍스트가 만들어진 순서를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먼저다. 1200년 먼저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읽고나서 데카르트를 읽으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증 방식이 나오는 것을, 기시감을 느낄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내 안에 신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먼저 확신하고 나서 그런 다음에 그 신에 대한 신앙, 확신을 가지고 세계와 우주의 창조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와 같은 방식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데카르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증 방식을 취하고 있다.

앞서 제9장에서 전진적 배진적 구성을 이루었다고 했는데 이 부분부터 이야기해보겠다. "《고백록》은 무엇보다도 치밀한 자기정당화, 즉 '자신의 생에 대한 변론'(apologia pro vita sua)이다."부터 보겠다.

Ⅹ 《고백록》은 무엇보다도 치밀한 자기정당화, 즉 '자신의 생에 대한 변론'(apologia pro vita sua)이다.

《고백록》이 어떤 책이냐고 누가 물어보면 그냥 일차적으로는 자기 생에 대한 변론이다. vita는 '생'이고, sua는 '자기', pro는 '에 대한', apologia는 '변론'이다. 1장부터 9장까지는 자기 인생이 흘러갔는가를 정리한다. 그래서 《고백록》는 신앙으로 가는 길을 간명하게 도식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죄에 물들어 있는 상태-회심 단계-신을 향하는 단계" 이렇게 세 단계로 자기 인생을 도식화한다. 그것 안에 사람들이 감동할 만한 삽화, 요소들을 집어넣는다. 얼핏 보기에는 죄에 물들어 있다가 메타노이아를 하고 신을 향했구나,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신에 대한 사랑과 찬미가 감싸고 있다. 완전한 구성을 갖추게 했다. 그게 바로 1권부터 9권까지이다. 그런 다음에 10권을 보면 성한용 교수의 번역을 보면 "기억의 신비" 라고 되어 있고, 성염 교수의 번역을 보면 "하느님을 찾고 인식하여'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10권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주님 저는 있는 그대로 당신께 드러나 있습니다." 10권까지는 전진적 구성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1권에서 9권까지가 한 덩어리, 10권이 한 덩어리, 그리고 11에서 13권이 한 덩어리이다. 불균형처럼 보이지만 10권에서 전환점에 이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죄에 물들어 있는 상태-회심 단계-신을 향하는 단계를 갔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게 내 안에 있더라. 신이 나에게 예비해 둔 것이다. 그런 얘기를 10권에서 한다. 그러면 신이 나에게 들어있다는 것을 10권에서 확신하는 단계에 이른다. 데카르트 《성찰》의 단계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11권부터 13권에서 보여준다. 

Ⅹ ⟪고백록⟫은 신앙으로 가는 길을 간명하게 도식화한다. 죄에 물들어 있는 상태-회심 단계-신을 향하는 단계. 이 단계들에는 잘 배합되어 들어간 삶의 타락한 국면들, 그의 어머니 모니카라는 극적인 인물 등이 제시되고, 고백 다음 단계에는 창조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시간론, 악의 기원, 구원의 은총과 같은 추상적인 신학적 사변들이 무겁게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신에 대한 사랑과 찬미’가 감싸고 있다. 완전한 구성을 갖춘 책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주관적 관념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굉장히 중요한 철학적인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신을 향한다는 것이 주관적 관념론이다. 내가 뭔가를 정해서 가는 것, 그리고 내 안에 진리가 있다. 이렇게 보면 주관적 관념론이다. 내가 옳다고 믿으면 그것이 관념적인 것이면 주관적 관념론이다. 어떤 사람은 소크라테스가 주관적 관념론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내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 그에 비하면 플라톤은 객관적 관념론이다. 객관적 관념론의 출발은 플라톤이다. 그게 진리이다, 뭐가 진리인가, 형상이라는 불변의 실재가 있다. 있는데 저기에 있다. 진리가 여기에 있다고 하면 주관적 관념론이고, 진리가 저기에 있다고 하면 객관적 관념론이다. 

Ⅹ 내가, 바로 내가 신을 향한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관적 관념론이다.

객관적과 주관적의 차이는 나한테 있는가 저쪽에 있는가의 차이다. 객관적 관념론, 에이도스, 불변의 실재가 저쪽에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받아야 한다. 본 paradeigma를 모방 mimēsis한다. 그런데 문제는 객관적 관념론은 괴롭다. 모방을 얼마나 했는지 알 수 없다. 끝없이 저쪽을 향해 가야 한다. 상승을 해야 한다. 그런데 주관적 관념론은 속편하다. 내 안에 있다고 말하면 된다. 나에게 안심을 주는 것이 주관적 관념론이라면 나에게 불안을 주는 것이 객관적 관념론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주관적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 둘 다 말이 되는 것 같은데 둘 다 만족스럽지 않다. 그런데 저쪽에서 있는 에이도스를 내가 당겨와서 완전히 내 것으로 했다는 자기 확신, 그것을 합하면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것을 합하면 좋겠다. 그 확신을 가지게 되면 절대적 관념론이라고 말한다. 대개 철학사에서는 헤겔이 절대적 관념론을 성취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출발점은 내가 진리를 갖고 있다가 아니고 나는 무지하다 이고 진리는 저쪽에 있다 이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헤겔도 객관적 관념론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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