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09
- 강의노트/라티오의 책들 2021-24
- 2021. 6. 3.
라티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팟캐스트 주소: https://ratiopress.podbean.com/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9장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의 형이상학적 의의
고대 희랍의 자연철학,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형이상학이 쇠락한 시기인 로마 시대에 목적론적 세계관을 학적으로 재정립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의 실존철학적 의의
자신의 삶을 이교도(Pagan)의 삶과 기독교도(Christian)의 삶이라는 요소들로써 교직시켜 설명하면서 전진적前進的·배진적背進的 구성을 성취
2021.05.18 숨은 신을 찾아서 — 09
⟪숨은 신을 찾아서⟫ 9장을 읽는다. 분량은 적은데 내용은 만만치 않다. ⟪철학고전강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하고 곧바로 데카르트로 넘어갔다. 사실 그 사이에 최소한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정도는 형이상학의, 형이상학은 혁신이 없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고통스러워 했었고 그보다 더한 또는 덜한, 고통의 양은 비교할 수 없고, 그냥 고통스러운 것. 기후가 변했다 해서 지구라는 곳에서 숨쉬는 호흡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생물적 실존 자체가 변화하지는 않았다. 좀더 아플 뿐이고 빨리 죽거나 늦게 죽을 뿐이다. 생명의 유무관계는 변함이 없고, 지구를 포함한 우주라는 것은 우리가 몰랐을 뿐이고 그저 있었다. 형이상학은 변함이 없다. 형이상학을 배울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안배우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한번은 배운다. 원래 강의를 할 때는 ⟪철학고전강의⟫ 책으로 출간할 때 말고 강의를 할 때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의 원리들》을 읽었다. 그리고 데카르트를 갔다. 《자연의 원리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제시했던 뒤나미스와 엔텔레케이아, 즉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개념을 가지고 신 존재 그리고 우주, 인간에 대해서 설명을 한 것이어서 일단 한번 중간 단계가 있다. 바로 스콜라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뼈대로 하고 그 위에 기독교의 신을 가져다 놓고 형이상학 체계를 구성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쓰는 과정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부분을 뺐었다.
그런데 ⟪숨은 신을 찾아서⟫ 9장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자의 책들도 있었다.'로 시작한다. 9장, 10장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배경설명이다. 그리고 11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첫 문장을 얘기한다. 그러니까 《고백록》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은 11장이고, 9장, 10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형이상학과 인간 실존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Ⅸ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자의 책들도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는데, 중요한 부분이 이것이다. 기독교의 신앙을 갖는다고 할 때, 신이라는 존재가 있을 때, 불교도 마찬가지이고, 하나의 초월적인 인간이 도대체 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는 것들과 하찮은 인간 존재와의 관계를 어떻게 엮을 것인가가 고민이 될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어떤 역할을 한다. 엮어지는 과정이 고백록에 들어난다. 그래서 9, 10장이 초월적인 신과 유한한 실존과의 관계 문제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초월적인 신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플라톤의 에로스는 상승하려는 욕구이다. melete, 날마다 연습하면 닿을 수 있다. 그것이 소포스, 현자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이 신적인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것이니까 그것을 놓고 굉장히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생을 자기가 돌이켜볼 때 너무나도 엉망으로 살았다. 그러니 엉망이었던 삶이 생각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신으로 갈 수 있을까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희랍사람들은 굉장한 낙관론을 가졌던 것에 반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가 살았던 시대도 그런지 몰라도 굉장한 비관에서 출발해서 신으로 가는 그런 도정을 밝혀 보인 점에서는 서구적 실존 철학의 중요한 거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동양적 실존철학은 붓다가 있다. 그리고 실존철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고통의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세계의 고통이라는 기본값을 그대로 인간이 가져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고통 속에서 타고난다. 그런데 날마다 징징대면서 살 수는 없다. 좋은 성격으로 스스로 탈바꿈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다. 현실의 실상이 이 모양이다. 이를 두고 막 살 수는 없으니 어떻게 할 지 고민하는 것이 철학이다. 두 번 생각하고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실존 철학이다. 그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지표가 하나님이라는 것으로 설정한 것. 부처님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고 가는 것. 그래서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철학이고, 모든 철학은 실존철학이다. 적어도 형이상학은 실존철학이다. 그래서 현대 실존철학의 출발점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이데거인데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학의 맥락에서만 중요한 사람인 것 같지만 사실은 형이상학에서도 중요하다. 8장이 아우구스티누스 개인의 삶에서 전환점을 얘기했다면 곧바로 ⟪고백록⟫으로 갈 수는 없고, 9,10장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9,10장은 ⟪고백록⟫의 형이상학적 맥락을 밝혀 보인다. ⟪숨은 신을 찾아서⟫ 내에 이론적으로 까탈스런 부분이 9, 10장이다. 왜 ⟪고백록⟫이라는 텍스트가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을 전공한 사람이 왜 읽는가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자의 책들도 있었다." 그런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성서라는 것이 있었고,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뭔가를 주기에는 너무 머나 먼 고대 희랍의 철학자들이었다. 더군다나 고대희랍의 자연철학자들의 세계인식은 아무 의미가 없을 테다. 자연철학자들은 세계에 어떤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에 반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는, 또는 세계에는 목적이 있다고 같다. 그것이 바로 궁극적 실제인 형상과, 그런 형상적인 목적의 세계와 그냥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것 같은 자연세계를 이어 붙여서 연속체로 만들려고 했고, 완전하게 그 체계를 만들어 낸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것이 내재적 목적론이다. 자연물들은 저마다 목적을 가진 무엇으로 변형되고 종국은 신을 향하게 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이라고 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과는 다르다. 그런데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눈 앞에 보이는 사물들과 신이 하나의 단절도 없이 이어붙였다는 점에서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에게는 굉장히, '그 철학자'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래서 "자연철학자들의 세계인식을 무너뜨린 거대한 목적론으로써 희랍의 사유가 연결되고, 로마가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이런 목적론적 사유를 하지 않는다.
Ⅸ 자연물들은 저마다 목적을 가진 '무엇'으로 변형되고, 종국에는 신을 향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신이 최고의 위치에 놓인 거대한 우주만물의 연쇄를 만들어낸다. 그러하니 그가 중세 스콜라학자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철학자'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Ⅸ 자연철학자들의 세계인식을 무너뜨린 거대한 목적론으로써 희랍의 사유가 연결되고, 로마가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의 로마는 기독교들의 세상인데, 이 세상이 되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살고 있던 세상은 세계의 목적을 탐구를 하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도 아니고 자연세계에 대한 학문적인 호기심이나 탐구는 전혀 발휘되고 있지 않은 그런 시대였다. 화려한 도시의 삶,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의 전반구가 제국의 젊은이의 흔한 삶이라면, 그런 삶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철학자들 같은 순진한 탐구욕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목적론적인 형이상학적 탐구욕도 없는 젊은이의 삶을 살았다. 이를 기독교들은 이교도의 삶이라고 부른다. 이교도라는 말은 굉장한 경멸의 말이다. 이교도는 크리스찬의 반대말이 아니고, 그냥 기독교를 안믿는 사람이다. 페이건과 크리스찬을 대비어로 만들어 버리면 이교도는 철딱서니 없는 삶, 개판으로 사는 삶이 된다. ⟪고백록⟫으로 들어가는 이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실존적으로 하느님에게 가는 삶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양에서 자연철학자들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이 단계를 한꺼번에 뛰어넘어버리는 단계다. 페이건으로 살았던 삶과 기독교로 사는 삶이 겹쳐지고 이교도에서 기독교도로 이행하고 이행한 다음에 기독교도의 삶이 이교도의 삶을 굴복시키는 과정이다. 즉 이론적으로만 보면 형이상학적 전환이 보이는데 그것이 동시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들로 명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존철학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Ⅸ 그의 전반부 생애가 제국의 젊은이의 흔한 삶이었다면, 그의 후반부 생애는 제국의 열렬한 기독교도의 삶이었다.
Ⅸ ⟪고백록⟫은 이교도의 삶을 벗어 던지고 신을 향해 가는 중간 과정을 회고적으로 서술한다. ⟪고백록⟫은 구 개의 삶이 겹쳐지고 이행하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굴복시키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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