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05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5장

❧ 바울로의 말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로마서, 9:16)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에페소, 1:5)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Ⅱ디모테오, 1:9)

 

❧ 기독교도가 된다는 것 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 물어야 한다. 신을 갈망할수록, 인간을 물어야 한다. 신의 위대함을 알아차리고 싶다면, 인간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새겨야만 한다.

 

 

2021.05.04 숨은 신을 찾아서 — 05

⟪숨은 신을 찾아서⟫ 제5장은 아테나이의 신에 이어서 예루살렘의 신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제3장은 서구의 신인 아테나이의 신과 예루살렘의 신에 대해서 다루고, 제4장이 아테나이의 신, 제5장이 예루살렘의 신이다. 기독교 신학의 기본적인 내용과 그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신념 체계인데, 27페이지에서 "기독교도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제6장이 신이 없는 삶에 대한 철학적인 태도를 다루고 있으니 꼭 신이 아니라 해도 근원적인 근본적인 제일원리에 대한 이해가 없을 때 무엇이 가능한가를 따져보고 있는데, "기독교도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꼭 기독교도를 얘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절대적 인격적 신을 믿는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Ⅴ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면서 신의 섭리도 말하였거니와, 그 섭리는 스토아주의자들이 말한, 바로 그 말이었다.


그런데 뜻이 달랐다. 그리고 새로운 가르침은 전혀 낯선 것이었다. 앞서 얘기했듯이 스토아의 신, 섭리는 주재적인데 기독교의 신은 주권적이다. 그래서 로마서를 보면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로마서, 9:16) 이는 예정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비를 기다리라는 것 말고는 없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에페소, 1:5) 신의 주권을 얘기하는 여러가지 교설들이다. 그리스도가 된 예수가 우리를 구원해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Ⅱ디모테오, 1:9) 


예수 그리스도는 일회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재림 예수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 재림 예수라고 얘기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에 따르면 말그대로 사이비인 것이다. 목사, 신부는 성서를 읽어주는 사람들이다. 그저 교사에 불과하지 그들은 일체의 구원에 관한 신의 계획에 관여할 수 없다. 자녀가 되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기독교도가 된다는 것은 기독교라는 신념체계에 의하면 인간은 지극히 무기력화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노예의 도덕'을 만들어내는 아주 근원적인 교설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아테나이의 신을 마주한 인간에게는 할 일이 있었던 반면에 바울로가 전해주는 예루살렘의 신을 보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할 일이 없으니까 절대적으로 무력한 존재가 도출된다. 무너짐으로써 완전히 자기를 신 앞에서 버려야 하는 것, 이것은 기독교가 만들어 놓은 것이라기 보다는 유대교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라고 생각된다. 아케다 사건을 생각해보면 무기력의 원형이다. 아브라함의 종교를 신봉하는 모든 이들은 아케다 사건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서구의 실존주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완전히 무화된 상태에서 시작하는 사조이다. 기본적으로 동아시아 세계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철저한 무기력함에 대한 감각 자체가 없다. 따라서 서구적 의미의 실존주의라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발견되기 어렵다. 철저한 자기절멸, 자기학대, 완전한 자기무화가 신앙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를 완전히 무너뜨릴 때 안심하는 것이다. 철저한 비합리적 니힐리즘, 니힐리즘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다. 무화된 상태.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신이 가지고 있는 이력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그 어떠한 유산도 다 버린 상태, 그러면 아버지가 바뀐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서, 8:15) 인간적인 상태에 있을 때, 인간으로서의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 그게 노예이고, 성령의 힘에 힘입어 거듭났을 때 진정한 자유인이고, 인간으로서의 나를 완전히 버렸을 때 아버지를 바꾸었을 때 그때부터 새로운 종류의 자유가 된다. 


기독교가 그래서 철저한 또는 처절한 자기 무화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거의 완벽한 자기충족으로의 탈바꿈, 개종이라는 것이 그런 것을 말한다. 이 종교 자체는 적당히, 중간이라는 것이 없다. 극단에서 극단으로의 신념체계가 된다. 


그러면 기독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신념체계를 실천하는 것, 나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나를 무너뜨려서 없애야 한다. "기독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나를 무너뜨려서 없애버리는 종교다."

 

Ⅴ 기독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나를 무너뜨려서 없애버리는 종교다.


Ⅴ천국 가는 일을 인간의 입에 담아서는 안된다고 강하게 입막음하는 종교다. 기독교는 바깥으로 나가는 모든 시선을 거두어서 오로지 자기에게만 집중하라는, 철저한 주관성의 가르침을 확고하게 전제하는 종교이다.


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데카르트에게 이어지는데, 데카르트가 근대철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완전한 무기력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 모티브, 발상의 근거는 기독교적인 것. 근대적 주관성이라고 하면서 자기를 발견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고대와 비교해볼 때 그렇지만 본래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에서 살펴보면, 기독교가 그때는 종교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기독교만큼 강력한 삶의 방식과 신념 체계는 없었으니, 그 사람에게는 기독교적인 모티브가 있는 것. 그래서 데카르트를 읽을 때는 파스칼하고 같이 읽어야만 한다. 서양에서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몰라도 적어도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는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와 구별되지 않는다. 실존철학이라고 하는 것도 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했다고 하는데, 완전히 폐해가 된 상태, 거기서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광경을 보았던 것.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나아간 것. 실존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키에르케고르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사상 운동으로서의 위력을 갖추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이다.

 

V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봉자들은, 신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 버려야 한다. 사랑하는 아들도 죽여야 한다. 이들의 신앙은 신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처절한 자기 절멸, 철저한 자기 학대, 완전한 자기 무화가 신앙이다. 완전한 무화라는 이 심성에서 신앙이 확증되고, 자기 학대에서 안심에 이르고, 자기 절멸은 곧바로 순교에 가 닿는다. 순교는 엄청난 믿음에서 결행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기 확신에서 스스로를 툭 놔버릴 때 결행된다. 그 순간에는 '내가 신을 의심할 자격이나 있는가'라는 의심까지도 머릿속에서 지워져야만 한다━철저한 비합리적 니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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