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03
- 강의노트/라티오의 책들 2021-24
- 2021. 5. 24.
라티오 출판사에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팟캐스트 주소: https://ratiopress.podbean.com/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3장
❧ ‘아테나이의 신’과 ‘예루살렘의 신’의 대면 ⟪신약성서⟫, 사도행전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몇몇 철학자들은 바울로와 토론을 해보고는 “이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하기도 하고 바울로가 예수와 그의 부활에 관하여 설교하는 것을 보고는 “다른 나라의 신들을 선전하는 모양이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17:18) “그들은 바울로를 아레오파고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가르치는 그 새로운 가르침(kainē didakhē)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줄 수 없겠소? 우리가 듣기에 당신은 생소한 말을 하는데 어디 그 설명을 들어봅시다.””(17:19-20)
❧ 아테나이의 앎(gnosis)과 예루살렘의 믿음(pistis) 앎은 합리적인 설명을, 믿음은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는 것
2021.05.04 숨은 신을 찾아서 — 03
목차에 따르면 2장은 신에 관한 일반적인 표상들이다. 신에 관한 일반적인 표상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탐구하도록 촉구한다. 3장은 서구에서 신에 관한 논의가 ‘아테나이의 신’과 ‘예루살렘의 신’이라는 테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3~6장이 한 묶음이다.
오늘은 3장에 대해서 읽겠다. ‘아테나이의 신’과 ‘예루살렘의 신’, 사도행전 17장이다. 사도 바울로는 골수 유대교도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살아 생전에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던 사람이다. 자기는 일종의 사도 컴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다. 인간 바울로는 재미있는,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었나 한다. 자기가 사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에 분명하게 말을 한다. "나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교회까지 박해한 사람이니 실상 사도라도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런데 더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 사도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 서간을 읽어보면 열등감과 자부심의 그런 기묘한 정서들의 복합체라는 느낌을 강력하게 준다. 사도행전 15,17장이 왜 재미있는 부분인가 하면, 일단 사도 바울로의 편지들은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문헌들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이 부분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서양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테나이 철학에서 시작해서 중세 철학을 건너뛰기 마련이다. 그런데 중세 천년을 신학으로만 치부할 수만은 없는 굉장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플라톤, 신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융합한 사항, 기독교의 사유가 희랍철학을 받아들이면서 뭔가 변용시킨 것에 대한 논의를 무심코 지나가버리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17장은 아테나의 신과 예루살렘의 신, 즉 아테나이 전통에서 중요하게 여겨온 진리에 대한 논의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진리에 관한 논의가 서로 만난 지점이다. 따라서 서양철학에 관한 입문서에는 이 부분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로가 아테나이에 갔을 때에는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의 몇몇 철학자들과 토론을 하게 된다.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는 로마철학 아닌가? 로마의 식민지인 아테나이에서 그 얘기가 오고 가는데, 말하자면 희랍철학의 흐름 속에 있는 학문들이다. 바울로가 예수와 그의 부활에 관하여 설교하는 것을 보고는 "다른 나라의 신들을 선전하는 모양이다."라고 얘기를 한다. 이런 것들을 통약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와는 기본적인 사고방식 자체가, 출발점 자체가, 제일원리가 다른 그런 이야기구나 할 때 '다른 나라'라고 얘기한다. 그 다음에 다른 나라의 "신들"이라고 말한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유일신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다. 그 사람들은 "신들"이라고 말하고, 신이라는 하나의 법칙을 이야기한다. 벌써 여기서 충돌이 생긴다. 바울로는 신을 말하고,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은 신들을 말한다. 말하는 대상 부터가 다르다. 그리고 처음에 만나기로는 아고라 광장에서 만났는데, 본격적인 대화는 아레오파고 법정에서 가서 물었다. "당신이 가르치는 그 새로운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줄 수 없겠소? 우리가 듣기에 당신은 생소한 말을 하는데 어디 그 설명을 들어봅시다." 만나기는 했는데 설명을 들어보는 지점이 아레오파고이다. 아레오파고는 중간 지점이다. 다시 말해서 신전이 있는 곳이 아크로폴리스이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고라이고, 그 중간지점이 아레오파고 법정이다. 삼단 지점이 중요한 지점이다. 인간이 있을 수 없는 곳이 아크로폴리스이고, 인간만이 있는 곳이 아고라이고, 그 다음에 인간과 신, 영원한 법칙과 인간이 만나는 곳이 아레오파고 법정이다. 아주 분명히 장소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상징들을 살펴가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유념해야 하는 지점이다. 경전들을 읽을 때에는 그런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상징성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아이스퀼로스의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오레스테스가 자기 어머니를 죽였던 바로 그곳에서 심문이 벌어진다. 따라서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사도 바울로를 그곳으로 데려간 것은 그냥 대화와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심문을 하는 것이다. "그 설명을 들어봅시다"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전도해주시오가 아니라 설명을 들어보자고 한다. 설명은 인과관계를 밝혀서 얘기하라는 것. 바울로는 신학자이기도 하고 선교사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인데 설명이 되겠는가, 그냥 믿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쪽은 설명을 요구하고 다른 쪽은 무조건적인 믿음을 갖기를 요구하니까 서로 겹치는 지점이 없었겠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바울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새로운 가르침(kainē didakhē)"이라고 불렀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에서도 고발을 당한 죄목이 '새로운' 신을 믿는다는 것. '새로운'이라는 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가르침"은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러 이 세계에 왔고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것이다. 새롭다는 것은 기존에 우리가 사용하는 상품이 있는데 개량된 무언가가 나왔다는 말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가르침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 17장은 철학과 신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당신이 가르치는 그 새로운 가르침(kainē didakhē)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줄 수 없겠소?"라고 묻는다. 희랍 아테나이의 세계에서 이것은 도대체 받아들여지지 않는 지점. 바울로는 예수가 사람이었는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면 희랍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설명이 안된다. 바울로에 따르면 예수는 신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신이고 동시에 인간이다. 희랍적인 사유에서는 모순이다. 다시 이 지점에서 나중에 삼위일체 교리에서 생겨나게 될 수많은 모순이 충돌하는 것. 삼위일체 교리는 단순화해서 말을 해보면 예루살렘의 신과 아테나이의 신, 즉 예루살렘의 가르침과 아테나이의 가르침이 만났을 때 도대체 화해가 되지 않는 지점이 바울로가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 사람들을 아테나이에서 만났을 때 생긴 것과 똑같은 화해불가능한 사태가 있었다. 그러한 사태를 어떻게 해서든지 기독교의 신앙의 입장에서 봉합하고, 그렇기 때문에 니케아 공의회, 나중에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이 되고, 그래도 조금 남은 문제가 있었을 때 451년 칼케돈으로 가게 된다. 거의 500년 가까이 걸쳐서 논쟁을 거쳐서 만들어 낸 삼위일체 교리, 그것이 사실은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이 바로 사도행전 16장이다.
아테나이 철학자들에게는 알 수 없는 존재이고, 가르침은 낯선 것이었고, 그래서 그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앎을 가지고자 했다. 그런데 바울로 원인과 결과를 따져서 설명을 해주지 않으니 예수에 대한 앎을 가질 수 없었다. 바울로는 앎(gnosis)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믿음(pistis)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희랍사람들은 pistis를 고급의 앎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철학은 어쨌든 이치를 따져서 설명을 하려는 학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치를 따져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섣불리 신앙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도 없고 늘 고민인데, 그런 고민들이 최초로 문헌기록으로 등장했던 장면이 사도행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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