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04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4장

❧ 아테나이적 ‘앎’(gnosis)

- 에피쿠로스 학파: 정신의 쾌락, 마음의 평정심, 아타락시아ataraxia 추구

- 스토아 학파: 우주 만물에 관철되어 있는 섭리, 프로비덴치아providentia. 우주에 관철되어 있기 때문에 주재적主宰的이나 우주 만물에 권력을 행사하여 어기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아니므로 주권적主權的이지는 않다.

 

❧ 소크라테스Sōkratēs와 플라톤Platōn

- ‘영혼을 돌보는 것’

- 좋음에 근거하여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

 

 

2021.05.04 숨은 신을 찾아서 — 04

제4장은 희랍 형이상학에 있어서의 최고존재, 즉 신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것이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서서 어떻게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인 전제로 변형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철학고전강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에 대해서는 다루었는데, 그것이 기독교 신학과의 접점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철학고전강의⟫에서는 없었다. 철학에서는 신학에 관한 얘기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오늘날 우리들은 아주 분명하게 절대 다수는 인격적 신, 즉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신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다시 말해서 신에 대해 정당화를 하려면 '믿어라'라는 말만해서는 분명하게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지점에서 철학에서 어떤 개념들을 가져와서 그 신을 정당화하는 논변들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게 된다. 그러한 논변들을 초대 교회들의 사도들에 이어서 전개되온 논변들을 최종적으로 집대성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이다. 많은 교회사가들과 신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 기독교, 오늘날 로마가톨릭이라고 부르는 그 종파, 교파를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단순화해서 말하면 로마가톨릭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우쿠스티누스의 종교다. 그만큼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종교라는 것은 불변한다고 생각을 이쯤에서는 버려야 한다. 시대적인 상황과 교리 자체의 변형, 이런 것들이 종교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흔히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말하는데 초대교회 어디로 돌아가자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몇몇 사람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즉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그런 얘기는 자칫 잘못하면 비웃음이 되고 말 것이다.


제3장에서 아테나이 사람들은 바울로에게 저 사람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테나이를 비롯한 지중해는 예수 믿는 사람들로 가득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쓰던 때가 되면 더이상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쓴 목적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기독교에 너무 젖어들어서 이제는 타성에 젖은 신앙 행태를 보이니 각성시키려고 한 점도 있다. 그것이 ⟪고백록⟫의 중요 저술 목적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로마도 그렇고 데살로니카 사람들은 기독교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오늘날의 그리스라고 부르는 지역 사람들은 그리스 정교회를 믿는다. 그러면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몇몇 철학자들은 왜 다 소멸해 버렸는가, 어디로 가버렸는가. 학문이 되었건 종교가 되었건 어떤 신념체계들이 서로 결합하면서 생겨난 새로운 파생물, 이런 것들을 탐색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몇몇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그노시스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 그노시스가 어떻게 변형되어 있는가를 살펴보기 앞서서 그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신념 체계이기도 하지만 삶의 방식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철학학파이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좀 더 편안하고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스스로가 정통이라고 여기는 철학자들은 이론적으로 따져 볼만한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여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를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흔히 쾌락주의자라고 알려져 있다. 마음의 평정심, 아타락시아ataraxia를 찾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쾌락이다. 혼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뜨락에서 친구들과 함께 얘기하면서 찾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철학이다. 분명히 시대가 그런 편안함을 필요로 했겠다. 그에 비하면 스토아 학파는 좀더 이론적이다. 수도원적인 분위기가 있다. 삶의 방식으로까지 이어진다고 했는데 이 부분은 스토아 학파가 더 강력하다. 개개인에게 호소하기 때문에 삶의 방식 modus vivendi으로 자리잡게 된다. 스토아주의자들은 법칙이 있다고 말한다. 그 법칙을 섭리, 프로비덴치아providentia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갑자기 나타난 말이 아니라 프로비덴치아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그런데 스토아 학파 사람들은 이 '섭리'를 우리 인간이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다르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것이고, 인간에게 하나님이 알려주는 섭리는 '계시'라고 부른다.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즉, 그 하나님의 섭리를 기독교에서는 알 수 없으니까 그저 믿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스토아주의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 우주의 섭리다. 우주의 섭리와 인간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은 없는 셈이다. 스토아주의자들의 로고스, 우주의 법칙,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연의 법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 알고 마음을 평화롭게 가지면 평온을 얻을 수 있다. 곧바로 이 둘을 엮여서 스토아주의는 이론과 실천을 통일시킨다. 조금 불안하면 친구를 만나면 된다 그러면 에피쿠로스주의자가 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그렇게 큰 이론적인 차이나 삶의 방식의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이다. 


특별히 자신이 법칙을 모른다고 해서 벌을 받거나 그러지는 않는데, 우주의 법칙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우주에 관철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재적主宰的이나 우주 만물에 권력을 행사하여 어기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아니므로 주권적主權的이지는 않다. 대체로 철학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삶의 방식을 주재하는 법칙, 그것이 바로 스토아주의에 해당한다. 개인의 취향으로는 스토아주의가 썩 좋다. 이 스토아주의를 삶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태도로 받아들이려고 늘 노력한다. 


아테나이의 신은 궁극적으로 법칙이다. 물론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내면의 영혼이 어떠한가에 대해서 스토아주의자들은 각자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테나이 사람들은 별로 내면 같은 것은 잘 살펴보지 않았다. 그냥 인간이라는 존재는 필멸의 존재이고 그래서 사람의 한계를 넘어버리면 안되는 것이고, 넘어서는 순간은 휘브리스이다, 고대의 철학자 중에서도 아테나이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인데 이 둘이 아테나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생각은 아니다. 이 부분을 조심해야 한다. 이들은 아테나이 사람들의 신념체계와 삶의 방식을 질타하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이론을 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나이 사람이 아닌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조금 다르다, 그들의 삶의 방식을 보고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이 그러했을 것으로 생각하면 착각이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그냥 우리는 필멸의 존재이고, 불멸을 추구할 수 없고, 그런 불멸에 닿으려는 노력,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 조차도 휘브리스라고 생각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목격한 플라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만 발휘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러면 인간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역할, 그것만 다하면 안되고 초월적인 좋은 것들에 대해서, 사실 그래서 플라톤의 이야기가 아테나이 사람들에게는 사도 바울로가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이었듯이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플라톤의 논변들은 새로운 가르침, 낯선 이야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재미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신학자들이 아테나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져다가 신학적인 논변을 뒷받침하려고 했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테나이 출신이기는 한데 플라톤의 이야기를 가져오니까 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토아주의 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보면 법칙을 알 수 있다는 것까지 갔다. 그러면 이것도 한 번 가는 데까지 가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그러한 부분이 나온다. 따라서 스토아주의에서는 법칙이 주재적이기는 할지 언정 주권적이지는 않지만, 그 법칙에다가 주권적이라는 성격을 부여하면 그게 기독교의 하나님과 어느 정도 통하는 지점이 생긴다. 따라서 플라톤이 아테나이 사람인데 어떻게 해서 신플라톤주의에 의해서 보존되고 기독교 초부 교부들에게 흘러 들어갔을까를 생각해보면 플라톤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앎에 대해서 이야기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의 개념을 만들어 낸 부분에 있어서 플라톤은 굉장히 중요하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데 있어서 플라톤을 모르면 신앙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필요한 선행지식인 것은 사실이다.


에피쿠로스주의와 스토아주의, 플라톤, 기독교 이러한 신들을 둘러싼 논의들이 어떤 지점에서는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고 어떤 지점에서 서로 어긋나는 지점이 있는지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바울로와 에피쿠로스주의, 스토아주의 사람들 간의 대화가 3장에서 서로 어긋나버렸다고 했는데 어느 지점에서 어긋났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4장의 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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