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08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8장

❧ 회심(metanoia)의 의미
- 회심은 2차 사유, 즉 반성, 새로운 의미부여, 개종이다.
- 이러한 의미부여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어떤 일이 옳다고 여겨는지를 판단하는 방식을 바꾼다.
- 의미부여의 궁극은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한 목적론적인 독해이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에서 본 그의 의의
- “신앙은 세속의 생활에 묻어 들어가 더 이상 긴장을 일으키지 않고, 우리는 하루의 욕망에 따라 산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의 로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2021.05.15 숨은 신을 찾아서 — 08

⟪숨은 신을 찾아서⟫ 8장부터 18장까지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다루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분량이 많아 보인다. 그런데 21장을 보면 데카르트, 22장도 데카르트, 24장부터 32장까지가 데카르트, 이후가 파스칼, 근대철학자들을 다루고 있는 부분도 많이 있다. 사실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에이해브를 결론 바로 앞에 배치하여 37장에 결론을 향해 가고 있고, 38장에 에이해브를, 39장이 결론인데 에이해브를 배치하면서 에이해브에 강한 선호를 나타내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나 데카르트 모두 신에 얽매여 있는 사람인데 그 신을 툭 털고 가버리는 사람이 에이해브이다. 


⟪숨은 신을 찾아서⟫의 숨은 신이 꼭 기독교적 인격신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에이해브가 신을 떨쳐버리고 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인격신을 배척한 것이냐는 말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아마 우리가 불변의 것이라 여겨지는 초월적인 세계관, 이런 것들 전체를 내팽개친 것이 아닌가, 저자의 해석이다. 그렇게 보면 굉장히 강력한 사람이다. 그것을 읽었을 때 철학적인 의미의 책들, 흔히 말하는 철학사에서 거론되는 책들을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도 크지만 에이해브를 읽었을 때 충격도 굉장했다.

9장부터 18장까지가 아우구스티누스인데 긴 얘기를 굉장히 압축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이 책을 해설을 해야 겠다고 생각할 때는 간단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용어 하나들이 많은 설명을 요구하는 것들이 있다. 8장을 촘촘하게 읽어보겠다.

처음 문단은 《고백록》 8권 12장 29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이 일어나는 부분이다. 로마서 13장 13~14절을 읽었다는 것이다. "확신의 빛이 내 마음에 들어와 의심의 모든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냈습니다." 바로 이어서 설명해 두기도 했듯이 과연 이것을 읽고 회심이 일어났는가, 사실 강력하게 의심한다. 왜냐하면 《고백록》은 정말로 일어난 사건을 그때그때 메모를 해두었다가 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니라 하나에서 열까지 짜맞춰진 것이다. 《고백록》을 읽을 때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이것은 짜맞춰진 것이다, 정말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일어난 일이기는 한데 그 일이 있는 그대로 순서가 맞춰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서 13장 13~14절을 읽고 회심을 하게 되었는가, 이것도 의심을 해볼 수 있다. 피터 브라운도 다큐멘터리로 보면 안된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 당시에는 기독교가 이미 주류 종교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정신차리라고 하는 교훈서로 쓰인 것이다. 기억을 가져다가 좋은 의미에서 저작된 것이다.  로마서 13장 13~14절을 보면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방탕, 술취함, 음란, 호색, 쟁투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심을 하기 이전에 그 사람이 주로 했던 일들을 집약하고 있는 구절이다. 다시말해서 메타노이아 이전과 이후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주기 위하여 로마서 구절을 가져온 것이다.

평전은 쓰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관점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해도 평전과 자서전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 이 책은 분명히 자서전이다. 자서전이기 때문에 "확신의 빛이 내 마음에 들어와" 메타노이아가 일어난 순간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히 극명한 대비를 위하여 창작된 것이다. infusa cordi meo. infusa는 굉장히 중요한 표현이다. infusa는 뭐가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어나게 되면, 확신의 빛이 내 마음에 들어오게 되면, metanoia는 희랍어고, infusa cordi meo는 라틴어. 메타는 두번째라는 것이고, 노이아는 생각이다. 두번째 사유, 회심이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일차적 의미는 반성이다. 자기 마음에 확실함과 안심이 들어왔는데, 확실함과 안심이 동시에 들어온 것으로 보고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서 2차 사유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마음이 바뀌었다는 정도가 아니다. 회심을 겪은 이들에게 세계는 다르게 보인다. 지금까지 세계에 대해서 A라는 의미를 부여했다면 메타노이아를 거친 다음에는 B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앞서 창조는 의미부여론이다라고 말했다. 창조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메타노이아가 일어나면 자기가 지금까지 살고 있던 눈앞의 세계가 다르게 해석되고 자기자신이 해석되고 그게 바로 거듭남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전까지만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얘기를 헛소리로 생각하다가 에반게리움이 되는 것이다. 의미를 다시 부여하는 것. 그렇게 되면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보면 공동체의 삶, 빵과 포도주와 물과 기름, 이런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성화, 성스럽게 되는 것, 이것이 메타노이아가 가지고 있는 의미이다. 두번째 생각은 첫째 뜻은 반성이고, 두번째 뜻은 다른 종류의 의미를 부여한다, 즉 다른 종류의 전망, 관점을 가지고 사태를 본다. 그것이 바로 메타노이아가 가진 의미이다. 그리고 그래서 개종이라고 한다. 세번째가 개종, 자신의 신념 체계를 바꾸는 것. 

Ⅷ 이들은 첫째가 되었다. 이들이 '옳다고 여기는 방식'은 공동체의 삶, 빵·포도주·물·기름 같은 사물들을 통해 행해지는 예배의 형식,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헌신을 통해 지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현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다르게 말하면 ecclesia, 교회이다. 교회라는 것은 무엇인가. 희랍어 ecclesia는,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 두 개가 있는데 kyrie 주 예수 그리스도로, church라는 말도 교회이고 ecclesia라는 말에서 파생된 로만스어들, 즉 이탈리어아, 에스파냐어들. 아테나이에서 ecclesia는 민회를 가리켰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특정한 건물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모여있는 것을 교회라고 했다. 즉, 공동체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 body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받드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형상화된 것.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는 그리스도 성인의 전형이다. 그리고 《고백록》은 일반적인 의미의 자서전은 아니다. 《고백록》을 읽다 보면 착각을 하게 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우리를 쓰려고 하는구나 생각을 하게 된다. 목적론이라고 하는 것이 궁극의 의미부여론이다. 

Ⅷ 그의 자서전으로 알려진 《고백록》은 자서전이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고백"이다. 그러나 《고백록》 읽기는 알게 모르게 우리를 그의 삶에 대한 목적론적 독해로 이끌어 간다.

목적론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바로 그 이유가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53페이지를 보면 43세때 자신의 삶에 정당화를 마련하고 싶은 시기, 회심 이전의 모든 사건을 회신 이후로 종속시킨다. 회심을 한 지 11년 지난 후이니 32살 때 회심을 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성취가 일어나게 되면 그때쯤이면 자기를 돌아보면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43살 때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을 때 죽을 때까지 유지가 될까. 

Ⅷ 그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시기는 회심한 지 11년이 지난 후 그의 나이 43세 때였다. 자신의 삶에 대한 정당화를 마련하고 싶은 시기였다. 그는 회심 이전의 모든 사건을 회심 이후로 종속시킨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 써 놓은 이런 의미들이 각인될 만한 시대는 아니었다. 55페이지를 보면 "아무런 신앙심도 없는, 우주와 자연의 우연한 떨어짐과 모음, 모임과 흩어짐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인 사람은 그러한 혼합물들이 저절로 스스로의 떠밀림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거들에 어떠한 목적을 부여하는 것을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라 여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 《고백록》을 읽고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밀어붙여서 고 《고백록》을 썼다는 것이다. 대단히 광신적인 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다.

Ⅷ 아무런 신앙심도 없는, 우주와 자연의 우연한 떨어짐과 모음, 모임과 흩어짐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인 사람은 그러한 혼합물들이 저절로 스스로의 떠밀림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거들에 어떠한 목적을 부여하는 것을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라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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