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14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19, 20장

❧ 불교라는 신념 체계
“불교 수행자들은 육체를 폐기하고, 육체에 깃든 생각을 폐기하고, 생각을 폐기했다는 것마저도 폐기하고, 저절로 멍한 상태로 들어간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몸을 버리는 것은, 소중한 몸뚱아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비롯한 일체의 사물에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 중세 체제와 세속도시
중세 체제에 의미를 부여하는 제일원리가 신의 세계창조이다.
세속도시는 인간의 계약(contract) 위에 세계를 구축하지만 그 바탕에는 신약信約(covenant)이 있다.
신약은 ‘유사-계시’, ‘계시닮은 것’으로서 국가를 원천적으로 정당화한다.

 

2021.06.05 숨은 신을 찾아서 —14

⟪숨은 신을 찾아서⟫, 18장까지가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이야기를 상대적으로 많이 했다. 서양철학 개론서를 의도하고 이 책을 썼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일반적으로 서약철학의 개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얘기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많이 한 것은 그동안 철학공부를 해 오면서 거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취향과 선호가 개입되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오늘은 19장과 20장을 읽는다. 19장은 불교라는 신념 체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불교라는 신념 체계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육체와 관련된 부분, 육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불교라는 신념 체계 안에서도 왜 육체와 관련된 부분을 19장에 갑자기 집어넣었는가. 아우구스티누스와 관련이 있어서 비교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서 넣었다. 14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이야기할 때 사랑은 사랑인데 육신의 사랑에 들어갔었다고 했다. 그래서 《고백록》 3권에서 육신의 정욕을 다뤘다. 

ⅩⅣ "나는 드디어 카로타고Carthago로 왔습니다"(Veni Carthaginem)(3,1,1)

"나는 드디어 카로타고로 왔습니다" 유명한 말이다. 강의할 때도 여러 차례 말했었다. 라티움어로 Veni Carthaginem. 카로타고라고 하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 3권 1장에서 써서 유명해진 말이다.  이때 카르타고는 온갖 정욕의 상징이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상징적인 것을 가리킨다. 엘릿엇의 시인 황무지에도 있듯이, 온갖 육신의 욕망을 다 충족시키러 왔다는 말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 텍스트가 아주 오랜 시간 이후에 다른 시인에게 읽히고 그 시인이 받아들이고, 또 다른 사람들이 읽고 이해하는 과정들을 거친 다음에야 "나는 드디어 카로타고로 왔습니다" 이 말이 의미가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육신의 정욕을 충족시키는 삶을 추구했다고 해서 신에게 되돌아 갔을 때 육체를 버려야 한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3,4권에서 욕망을 충족시켰다고 할 때에도 나중에 정욕을 정화시킨다. 그게 바로 불교에서는 색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불교는 완전히 폐기시켜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점이다. 

ⅩⅨ 불교에는 부정관이라는 수행법이 있다. 정결하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다. 특히 몸의 더러움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육신을 아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3,4,권에서 얘기를 할 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모르고 그런 것이다. 불교에는 부정관이라는 수행법이 있다. 정결하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다.  특히 몸의 더러움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육신을 아낀다. 더러운 것을 보고나서 육신이라는 것이 하찮은 것인가, 그것을 보고 나서 그것을 떠난다는 것이다. 떠나니까 다시는 아껴줄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렇지 않다. 신이 주신 몸이구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ⅩⅨ 박상륭은 《죽음의 한 연구》에서 이렇게 쓴다. "해골을 볼 일이다. 그리고 살에 관해 험담하기나 찬양하기나,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그래서 해골을 볼 일이다." 

ⅩⅨ 그 해골이라는 물체에서 덧없음이라는 생각으로 진전한다. 그러고 나서 그 깨달음도 내 몸뚱이라라는 더러운 것 안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내 생각까지도 버린다.

험담도 찬양도 다 덧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해골이라는 물체에서 덧없음이라는 생각으로 진전한다. 그러고 나서 그 깨달음도 내 몸뚱이라라는 더러운 것 안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내 생각까지도 버린다. 일체를 폐기해서 무념무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몸을 버린다고 말하는 것은 소중한 몸뚱아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비롯한 일체의 사물에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주의 참다운 근원으로 들어설 수 있다. 불교는 그렇게 하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주의 참다운 근원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우주의 참다운 근원이다, 그렇지만 육체를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20장의 첫 문단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육체를 버리지 않는다. 자신이 신 안에 있음을 알지 못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육체로써 세상을 살아갔다. 그가 끝내 자신이 신 안에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면, 그는 육체로써 성취한 것들을 찬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신 안에 있음을 깨닫고 신 안으로 되돌아간 다음에도 육체를 버리지 않는다. 이제 그 육체는, 그 물체는, 육체와 맞닿는 세계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 전의 의미 체계에서 기독교의 의미 체계로 옮겨진 육체, 그 육체는 외형은 그대로이나 내용은 전혀 다른 것으로 거듭난다. 

ⅩⅨ 몸을 버리는 것은, 소중한 몸뚱아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비롯한 일체의 사물에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ⅩⅩ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육체를 버리지 않는다. 자신이 신 안에 있음을 알지 못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육체로써 세상을 살아갔다. 그가 끝내 자신이 신 안에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면, 그는 육체로써 성취한 것들을 찬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신 안에 있음을 깨닫고 신 안으로 되돌아간 다음에도 육체를 버리지 않는다. 이제 그 육체는, 그 물체는, 육체와 맞닿는 세계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 전의 의미 체계에서 기독교의 의미 체계로 옮겨진 육체, 그 육체는 외형은 그대로이나 내용은 전혀 다른 것으로 거듭난다.

여러차례 말했듯이 ⟪숨은 신을 찾아서⟫에서는 기독교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체계로 환원시키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본인의 해석인데, 그게 의미를 다시 재창조한다고 하는 것, 그래서 깨끗한 것이다. 자신이 신 안에 있음을 알게 되면 그 육체는 깨끗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만난 다음에는 정결하지 못했던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불교라는 신념 체계에서는 애초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되돌아오는 것, 신이 깨끗하게 해줬다는 것이다. 불교수행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이 있다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버릴 수 없는 출발점이고, 이로써 세계는 신이 창조한 것이요, 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점이 불교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기독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버리고 떠나는 것이고, 불교는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ⅩⅩ '신이 있다'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버릴 수 없는 출발점이다. 이로써 세계는 신이 창조한 것이요, 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중세의 기독교의 세계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한다. 왜 중세의 레짐을 우리가 의미있는 것으로 얘기하고 연구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중세적 체계라도 하면 어둡고 칙칙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사상사적으로 보면 중세의 레짐이 결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세속의 권력자들이 아무리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중세 로마 가톨릭 교황을 이겨낼 수 없는데, 그 체제에 의미를 부여하는 제일원리가 신의 세계창조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교황들은 무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뜻이 있다 없다를 판별해주기 전에는 정당성을 획득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뭔가 법을 만들어서 통치를 한다 해도 그 법의 합법성마저도 신의 정당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의심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중세 레짐의 특징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에서도 법률에 맞는 것이면 국가가 하는 통치 행위도 정당화되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것이 일정한 정도의 정당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합법성도 무의미하다. 그러면 정당성의 근거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그것이 항상 레짐의 고민스러운 지점이다. 따라서 중세 레짐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공화국, 지나간 옛날 얘기다라고 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것을 벗어난 세속도시에 살고 있다해도 이른바 근대국가에서 성립하는 과정에서도 간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불교는 세속도시를 아예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불국정토라는 것이 내 마음에 있다고 말해버리니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ⅩⅩ 세속의 권력자들은 아무리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교황과 그의 조직을 이겨낼 수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을 극복해내는 것이 근대의 세속도시론이다. 신이 없으므로 신이 아닌 제일원리를 찾아야만 한다. 사회철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근본적인 정당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속도시는 인간의 계약(contract)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사람이 사람을 못믿는 세상에서는 간단하지 않다. 또 하나 그러면 그 계약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신약信約(covenant)이라고 하는데, 믿을 신을 번역어로 쓰고 있지만 내용은 신의 약속이다. 계시를 닫은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이 절대주권의 국가를 얘기한 홉스이다. 홉스가 기독교를 굉장히 비판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홉스가 말하는 contract와 covenant의 구별은 결국 중간단계 이론이다. 즉 하느님이 주신 영원한 법이 있고 그 영원한 법에 따라 자연법이 성립하고, 그 자연법 위에서 국가의 법이 있다고 하는 것이 이를테면 중세의 체제이론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영원한 법은 세속 군주는 알 수 없고 교황이 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이슬람 세계는 샤리아라고 하는 이슬람 율범이 만들어 진다. 그게 이슬람 체제가 중세적인 체제이다. 

ⅩⅩ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거나 "신이 무슨 소용인가'가 제일원리로 받아들여지면, 그 세계는 세속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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