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첫 시간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 철학: 세상에 있는(존재하는) 모든 것을 탐구하는 학문, 즉 존재론.

 

❧ 존재론의 탐구 영역: 인간을 포함한 모든 대상 세계, 존재 자체의 실재성(본질), 대상 세계의 변화를 지배하는 원리 — 가장 근본적인 것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제일철학’이라 불리기도 한다.

 

❧ 존재론의 분류

형이상학: 감각 능력을 넘어선 대상을 탐구.

(좁은 의미의) 존재론: 감각 능력에 닿아오는 것.

언젠가 알 수는 있겠지만 아직은 알지 못하는 것들의 영역과 영원히 알지 못할, 즉 지성을 넘어서는 것들의 영역, 이 둘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이 둘은 형이상학의 탐구 대상이지만 존재론의 탐구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구분 또한 불분명하다.

 

❧ 읽는 텍스트와 철학자들

희랍 우주론과 자연철학: 헤시오도스 / 파르메니데스 / 헤라클레이토스

‘좋음’, 인간과 공동체: 플라톤

형이상학 체계: 아리스토텔레스

주체로서의 인간: 데카르트

인간의 한계와 형이상학: 칸트

신적 입장과 인간: 헤겔

 

❧ 고전적 존재론과 주관적 존재론

대상이 나(주관)에 앞서 있는가, 아니면 내가 대상에 앞서 있어서 대상은 나의 의식의 산물이거나(데카르트, 칸트), 의식의 지향적 상관자(후설)이거나 의식의 관심에 의해서야 비로소 실존하는가(하이데거).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첫 시간

고전강의 시리즈는 4권인데 《철학고전강의》, 《역사고전강의》, 《문학고전강의》 이 세가지 고전들을 두루두루 읽은 것이 《인문고전강의》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역사고전강의》를 출간했고, 그다음에 《철학고전강의》, 《문학고전강의》를 출간했다. 철학전공자인데 그리고 형이사항 분야가 철학에서 세부 전공 분야인데 철학이라는 제목이 들어간 책을 《철학고전강의》 이전에는 써본 적이 없다. 조심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철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쓴다면 본격적이고 흔히 하는 말로 전통적인 책을 써보고 싶었다. 그래서 《철학고전강의》가 다른 고전강의 책에 비해서 조금 순정한 또는 순도가 높은 책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철학고전강의》만큼은 일종의 사후 서비스로 해설강의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은 첫 시간 부분을 읽는다. 철학이라고 하면 어떤 학문인가를 물어보면 일단 기본학이라고 한다. 기본이 무엇인가.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가.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 다시말해서 세상에 있는 건에 대한 탐구. 이것이 철학이다. 이것이 왜 있는가, 어떻게 있는가, 계속 있는 것인가, 있다가 사라질 것인가, 있는 것이 나에게 무슨 쓸모가 있는가 이런 것들을 따지는 것이 존재론이다. 과학도 존재론이다. 특정한 식물에 대해서 연구하면 식물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물리적인 현상이 있으니 물리존재론, 심리학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연구하니 마음존재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 존재론이고 바로 그것에서 철학이 시작되었다. 

세상이라고 할 때 눈을 딱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 내 눈 앞에 보이는 것,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던 것이 세상이다. 일단 세상을 보는데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좀 접어두고 이 존재보다는 나 이전에 먼저 있었던 것, 바깥 세상에 대해서 궁리를 해보자는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이게 바로 객관 존재론이다. 저 바깥의 세상에 대해서 따지기 시작한 것이 서양철학에서는 고전적 존재론이라고 부른다. 저 세상이, 저 대상이 나보다 앞서 있다는 것이다. 내가 세상을 겪기 전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객관세계에 대해서 따져 물으니까 객관적 존재론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책 《철학고전강의》 내에서 데카르트부터 시작이 되겠는데, 세상이 어떻게 있던 간에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면 세상은 무의미하다, 덧없다고 생각하면 주관적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객관적 존재론부터 시작하지만 오늘날 근대 철학 이후에 현대 철학자들은 주관적 존재론자들이 많다. 나의 의식의 산물이다를 내세운 사람이 데카르트이고, 자신이 없으니까 정말일까 스스로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내 이성적 판단이 틀림없어 라고 스스로 보증하기 힘드니까 신을 보증인으로 내세우고, 또 경험이전에,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뭐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대상세계에 대해서 판단해서 만들어 내놓은 것이 세상이다 라고 생각한 사람이 칸트이다. 대체로 주관적 존재론의로의 전환을 이룩한 사람들이 데카르트와 칸트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다보니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내 의식이 저 곳을 향해간다, 대상은 의식의 지향적 상관자다. 대상은 나의 의식의 산물이거나 의식의 지향적 상관자이거나 아니면 내가 관심을 가져서 그제서야 비로소 실존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주관적 존재론이다. 우리의 탐구는 고전적 존재론부터 주관적 존재론까지 간다. 

《철학고전강의》의 목차를 보면 희랍 우주론과 자연철학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 첫번째, 플라톤이 두번째, 아리스토텔레스가 세번째 여기까지가 고전적 존재론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다음에 주체서로의 인간, 인간의 한계, 즉 데카르트와 칸트가 대체로 주관적 존재론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서 고전적 존재론에 해당하는 얘기가 세 개, 주관적 존재론에 해당하는 얘기가 세 개로 되어 있다.

I 희랍 철학의 시작: 세계에 전체에 대한 통찰
II 플라톤: ‘좋음’ 위에 인간과 공동체를 세우려는 노고
III 아리스토텔레스: 희랍 형이상학의 체계적 완결
IV 데카르트: 주체인 인간의 세계 구축
V 칸트: 인간의 한계 자각과 ‘장래의 형이상학’
VI 헤겔: 신적 입장으로 올라선 인간

주관적 존재론의 일종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종교에서는 불교라고 할 수 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만들어진다고 얘기한다. 그게 바로 불교의 이야기이다. 심지어 그것을 덧없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까지도 덧없다. 그래서 그것을 그런 물질적인 객관 세계가 늘 있으리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 상을 버린다고 해서 상이 없다, 무상이다. 이것은 엄청난 비관적인 것 같지만 굉장히 인간이 강한 힘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것이다. 가끔 서양에서 선을 수양하는 스님들을 보면, 서양의 대상세계에 집착하는 굉장한 고전적 존재론, 객관적 존재론의 세계에 살다가 그거 답 없어 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게 진리이구나 하고 들어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본인은 헤겔 철학을 전공했으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데, 일단 서구철학을 전공했으니까 객관적 존재론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이라고 이해를 해두면 좋겠다. 그런데 이 세상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다르게 말하면 《철학고전강의》를 읽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냥 휙 지나가버리는 세상이 아니다. 내가 오늘 만나는 사람, 물체, 세상은 어제의 세상과도 다르고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서 달리 보이는 세상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탐구한다.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경계를 해야 하겠지만 어떤 의미를 가진 것들이 저기에 있다, 그런 것들이 모여있는 것이 세상이다 라는 태도를 가지고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종교적인 입장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있는 그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존재 그 자체를 들여다본다는 태도, 객관적 세계를 객관적 태도로 본다는 것이 존재론을 공부하는 기본적인 사유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냥 지나가는 세상이 아니고 그것 자체로 의미를 가진 것들이 모여있는 세상이다 라고 생각해보면 존재론이라는 학문 자체가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존재론에 대해서 공부를 하자고 말하면 구체적인 탐구영역이 있을 것이다. 인간을 모든 포함한 모든 대상 세계가 탐구의 대상이 되겠고, 그러면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만들어 내놓은 제도, 무형의 제도인데 우리에게 위력을 미치는 정신적 실체, 인간이 만들어 놓았지만 객관적인 위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뭔가 압박을 가하기도 하고 족쇄가 되기도 하는 것. 대상 세계의 변화를 지배하는 원리가 무엇인가. 사태는 변화했는데 그 변화를 만들어내는 힘을 따져묻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학문이라고 부르는 그런 것들이 다 존재론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론은 다 하는 것인가. 원래는 다 했다. 고대 희랍세계의 자연철학자들은 다 따져물었다. 그런데 분과학문이 발전하면서 점차 그런 것들이 빠져나갔다. 그러면 철학에게 뭐가 남았는가. 빌덴발트는 모든 것을 나누어진 리어왕 같은 학문이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탐구한다. 변화 자체에 대한 탐구가 잘 되고 있는가,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져 묻는다. 그래서 존재론은 가장 근본적인 것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제일철학’이라 불리기도 한다. 사실 형이상학과 존재론과 제일철학은 전공자들도 어느 정도 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존재론의 분류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형이상학은 우리 인간의 감각 능력을 넘어선 대상을 탐구한다. '신'이런 것. 그러면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그런 것들은 뭐하러 탐구하는가, 그런데 그럴 수 잇다. 언젠가는 알 수 있겠지만 아직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우리의 인지능력을 넘어서는 영역은 영원히 알지 못한다. 넓은 의미에서 존재론이라고 하면 형이상학이나 제일철학이나 존재론이나 다 똑같은데, 좁은 의미의 존재론은 우리의 감각 능력에 맞닿아오는 것을 가리키고, 형이상학을 우리의 감각능력을 넘어선 것을 탐구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이 둘이 지금, 즉 영원히 알지 못하는 것과 언제가는 알 수 있는 것의 경계가 모호하다. 따라서 그것이 좁은 의미의 존재론의 탐구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구분이라고 하는 것 또한 불분명하다. 그렇게 보면 뭘 그런 것들을 따져 묻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이나 굉장히 야망에 가득 찬 학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분들도 그냥 한번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야망을 가지고 책을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첫시간 17 넓은 의미의 존재론에는 두 가지 하위 영역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형이상학과 좁은 의미의 존재론입니다. 여기서 형이상학과 좁은 의미의 존재론, 이 두 영역의 대상은 타 온타(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 중에 인간의 감각적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초월적인 것'이라 합니다. 이것을 형이상학이 다룹니다. 좁은 의미의 존재론은 초월적인 것을 제외하고 감각적인 것을 따져 묻습니다. 이는 감각에 근거하여 탐구하는 것이므로 자연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감각적인 것, 초월적인 것은 '신'이라고도 불립니다. 그것을 탐구하는 학문은 신학 또는 철학적 신론이라 합니다.

어떤 책과 어떤 철학자들을 읽는가. 우선 희랍 우주론과 자연철학자 헤시오도스와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를 읽는다. 그런데 첫시간의 첫머리를 보면 "진리의 흔들리지 않는 심장",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인용했다. 이것이 바로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학문을 하고 있다는 태도를 가지라는 의미에서 이 얘기를 했다. 

첫시간 15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빌리면 "진리의 흔들리지 않는 심장"을 견지하겠다는 태도 그 자체만을 의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철학의 탐구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 철학은 탐구방법이나 태도만을 가리킬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헤시오도스는 왜 집어 넣었는가. 신화라고는 할 수 있지만 이런 출발점들이 있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서 왜 저렇게 있을까,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이런 얘기들을 처음에는 언어가 없으니 신화의 언어들을 빌려서 설명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헬라스 세계에 희랍의 자연철학자들을 보면 그런 신화적인 표현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헤시오도스라고 해서 형이상학에 집어넣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적어도 존재론 안에는 우주론이 있고, 인간론이 있고,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적인 것을 희랍사람들은 테오스, 신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신론이 있다. 헤시오도스 안에는 분명하게 우주론이 있다. 그리고 우주론 안에서 인간의 모습은 자세하게 나오지 않지만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헤시오도스를 넣었다. 헤시오도스부터 읽기 시작하면 형이상학이 저 먼 옛날에 신화적인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헤시오도스의 우주론이 하이데거의 실존철학보다도 낫지 않나 가끔 해본다.

그 다음에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를 넣은 것은 서양 존재론의 2대 조류이다. 큰 흐름이다. 즉 불변의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이다. 이를테면 야훼 하느님, 여호와, 성부 하느님. 불변이다. 그 불변의 존재가 있어서 변화하는 세계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의 형이상학에서 생각해보면 불변의 존재로부터 변화하는 존재가 나올 수 없다. 불변의 존재가 있다고 전제할 때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변화는 있을 수 없다.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헤라클레이토스를 말한다. 그래서 서양 존재론의 2대 기둥이라고 하면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믈 말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다루는 사람은 플라톤이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와는 다르게 소크라테스부터 시작된 인간에 대한 탐구로 전환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플라톤은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공동체, 정체에 대해서 다룬다. 그것이 첫번째로 중요하다. 인간에 대해서 다루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으로 탐구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존재라고 하는 것은 저 세계에 있는 것인데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 즉 인간 정신의 산물들도 존재의 대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플라톤 형이상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다. 인간학으로의 전환이 첫번째로 중요하고, 헤겔의 용어를 빌리면 객관적 정신의 세계, 즉 정치체제의 세계에 대해서 존재론적으로 탐구했다는 것이 중요하고, 세번째로는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즉 이전의 자연철학자들과는 다르게 플라톤은 진짜로 불변하는 것이 '좋음'이라고 하는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것이 불변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가치 형이상학을 세웠다는 것이다. 사실 형이상학에서 중요한 것이 다 나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체계를 보면 오히려 물리적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책을 보면 자연학이 있다. 자연학에 대해서 탐구하고 그 다음에 형이상학 체계를 쓴다.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인 원리가 테오스, 신이다 라고 말한다. 그래서 형이상학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학이라고 부른다. 오히려 플라톤이 중요하게 여겼던 정치학나 윤리학에 대해서는 이론학에 넣지 않는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객관적 정신의 형이상학은 없다고 하는 것이 맞다.

본래 강의에서는 다루었으나 책에는 집어넣지 않았다고 한 것이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객관적 세계의 형이상학을 따질 필요가 없었다. 신이 만든 세계,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따져 물을 필요가 없었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나 자연학을 빌려다가 자연세계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은 객관적 정신의 형이상학은 부족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데카르트와 칸트는 인간의 의식이 어떠 한가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다. 다시말해서 인간주의가 드러나는데 인간의식 중심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그런 중세적으로 말하면 신적인 것, 고대 희랍의 얘기로 말하면 우주론적인 것, 이런 것들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발터 슐츠, <근대 형이상학에 있어서의 신>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을 보면 데카르트나 칸트,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 사람들이 신에 대한 것을 놓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지막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헤겔. 신적 입장으로 올라선 인간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인간이라는 하는 존재가 유한자임에는 틀림없는데 인간은 자신의 사유를 통해서 무한자를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사유를 통해서 신의 입장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것이 헤겔이 가지고 있는 태도이다. 《철학고전강의》의 부제가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이다. 이게 존재론을 보는 기본적인 구도이다. 헤겔의 기본적인 생각은 사유하는 유한자인 인간이 그 사유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무한자로 올라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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