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16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22장

❧ 근대의 절차적 정당성
근대 민주정 체제의 근간. 절차의 준수가 인격성(personality)의 척도가 된다.


❧ 칸트
“칸트 이후의 시대는 신 없이 살 수 있다.” “공동체가 합의한 규약과 절차를 어기지 않는한.”
그러나 인간의 본질(physis) 규정은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사는 존재’이다.

 

2021.06.12 숨은 신을 찾아서 —16

⟪숨은 신을 찾아서⟫, 22장이다. 앞에 목차를 보면 숫자가 없다. 22장도 데카르트에 속하는 부분이고, 23,24장이 목차에 있다. 22장의 분량은 적은데 내용이 쉽지만은 않다. 데카르트를 중세의 막내이자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얘기했는데 서양 근대라고 하면 여러가지가 많이 있어서 그냥 '저건 근대적이야'라고 말하면 딱히 뭐라고 규정하기가 어중간하고 어렵고, 그런 것을 근대적이다 이렇게 말하기가 쉬운 것 같다. 그렇게 말하면 그냥 근대적이구나라고 사람들이 받아들여서 그것을 지나가버리는 것 같다. 이를테면 예전에 90년대 박사학위를 받고 칸트 학회, 헤겔 학회 들을 가보면 또는 그 뒤에 철학 전공자들을 만나면 대개 자기가 주로 전공하는 철학자들을 말한다. 석사과정에서는 홉스를 전공했고, 박사과정에서는 헤겔 철학으로 학위를 했는데 이런 경우는 드물다. 늘 말하지만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그래서 답을 할 때 서양근대철학을 전공했다고 말을 한다. 그러면 근대철학 안에는 뭐가 들어가는지 참 말을 해놓고 나서도 세부적으로 말하기가 하자면 끝이 없고, 안하고 있으면 뭘 말했는지 전혀 전달이 되지 않는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를 보면 근대철학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데카르트는 근대인이다 라고 말하는데, 사실 근대라고 할 때 모던이라는 말 안에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생각이 인간의 자기 주장이 확실한 시대를 말하는 것 같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을 얼핏 들으면 내 생각이 최고야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독자적인 나라는 것은 세상에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당장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생물학적 부모들이 있다. 굳이 표현한다면 부모에게는 생물학적으로 빚이 있는 것이고, 그 다음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빚이 있다. 금전적인 빚이 있고, 마음의 빚도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태어나고 그런 그물망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철저하게 독자적인 남들과 분리되어 있는 그런 존재는 있을 수 없다. 데카르트는 그러니까 생각한다, 존재한다고 했을 때 방법론적인 것이다. 방법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다고 가정한다는 말이다. 

근대인들은 '그렇다고 가정하고' 방법론적인 회의도 아니고 그냥 자기가 독자적이라고 주장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근대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계속 밀고 나아가면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다.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그물망은 네트워크라고 하는 것인데, 그런 곳에서 살고 있다. 관계의 그물망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식도 신의 보장도 필요하지 않은 세계를 가상으로 세우는 것이다. 거짓으로 virtual이 아니라 거짓으로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것은 결국 현실 세계에서 작동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근대인이라고 해도 이 사람이 막 나가지 않았다 라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 어디냐 하면 신의 보장이라고 하는 것을 얘기하고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신이 나를 보장한다. 즉 신까지도 배제한 나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이 사람이 아주 막 나간 근대인은 아니다. 거짓 세계를 세우려던 사람은 아니다 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보다 더 막 나간 사람은 칸트다. 막 나간 근대인들은 자기의식도 신의 보장도 필요치 않은 세계를 만든다. 그들은 서로의 내면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것은 '양심의 자유'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ⅩⅩⅡ 데카르트는 신의 보장을 가진 자기의식을 내세웠지만 영리한 근대인들은 자기의식도 신의 보장도 필요치 않은 세계를 만든다. 그들은 서로의 내면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것은 '양심의 자유'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내면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 좋은 것이다. 좋은 것인데 어느 순간에는 궁금해지긴 하겠다. 그래서 근대인이 만든 세계는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법적 개념으로 지칭되고 근대 민주정 체제의 근간이 된다. 그러한 절차를 준수하고 있는가가 인격성의 척도가 된다.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다라고 하면 절차적 정당성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마지막까지 절차적 정당성을 최종적인 판단의 근거로 삼고 있는 사람을 근대에서는 인격 있는 사람으로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근대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도들은 자신의 영혼에서 신을 만난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야 말고 근대적인 종교다. 프로테스탄트를 포함해서 근대인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따지지 않고 내면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묻지 않고 사회적 규약인 절차를 잘 지키면 인격을 가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근대인이다.

ⅩⅩⅡ 이것은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법적 개념으로 지칭된다. 이는 근대 민주정 체제의 근간이 된다. 내면에 대한 고민이 인간성의 척도가 아니다. 절차의 준수가 인격성(personality)의 척도가 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출발점은 그렇게 잡고, 신을 찾아가기는 하는데, 그것을 가지고 바깥 세상을 재단해 좀 보려고 한다. 그렇지만 데카르트의 사회철학은 없다. 사회가 이래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는 데카르트도 철저하게는 아니어도 근대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차라리 칸트가 가깝다. "바로 그런 까닭에 다른 이들과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전적으로 사적인 체험이다." 근대인이다, 내가 모던한 사람이다 라고 하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거짓 세계라고 얘기했지만 적어도 우리가 16세기 이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태도는 일단 갖추고 있어야 한다. 신을 믿지 않아도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로만 가톨릭은 신의 질서를 사회적인 질서로까지 밀고 가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은 길 다니면서 '예수 믿으세요 그래야 천국갑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교리가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그러면 안된다. 개신교는 근대의 종교이다. 신앙은 전적으로 사적인 체험이고 고백은 은밀히 이루어져야 하고 신을 믿지 않아도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ⅩⅩⅡ '신이 있음'은 경험 데이터로써 검증되지 않고, 바로 그런 까닭에 다른 이들과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전적으로 사적인 체험이다. 고백은 은밀히 이루어져야만 한다. 신을 믿지 않아도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다. 칸트는 이들 영리한 근대인들 ━이들은 스스로 '계몽철학자'라 불렀다━의 생각에 철학적 정당화를 부여하였다. 데카르트는 여전히 신을 찾아 갈등하는 사람이고, 칸트는 싸늘하게 신을 버린 사람이다. 칸트 이후의 시대는 신 없이 살 수 있다.

칸트는 이들 영리한 근대인들의 생각에 철학적 정당화를 부여하였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신을 내면에서 찾았다는 점에서는 근대의 단초를 가지고 있는데, 그래도 여전히 신을 찾아서 갈등을 하는 사람이기는 하다. 그런데 칸트는 무신론자였던 것 같다. "칸트는 싸늘하게 신을 버린 사람이다. 칸트 이후의 시대는 신 없이 살 수 있다." 그래서 형이상학 역사에서 칸트는 중요한 사람이다. 칸트의 철학이야말로 정말 싸늘한 철학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모르고, 좋음에 대한 물음 없이 살고, 좋음에 대한 답은 각자의 내면에서 각자가 내려가면서 사는 것이고, 자신의 삶의 궤적이 곧바로 자신의 삶의 정당화 근거가 되는 것이고, 그게 바로 근대인의 삶이다. 제22장에는 옆에다가 "근대인의 삶"이라고 적어두면 된다. 당연히 외롭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관계의 그물망 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관계의 그물망 속에 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 규정이다. 그런데 근대인들은 관계의 그물망이라고 하는 것을 공동체가 합의한 규약과 절차로 국한시켰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내면속으로 간직하라고 한다. 그게 시작하는 지점은 데카르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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