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바다의 문들 ━ 상처입은 세계와 하느님의 구원

 

 

바다의 문들 - 10점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지음, 차보람 옮김/비아

들어가며
1. 세계의 조화
2. 하느님의 승리

부록
1. 의문의 미진
2. 하느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해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가 그리는 오래된 미래

 


 

1. 세계의 조화

27 하느님을 인간과 같은 하나의 윤리적 행위자로, 제한된 정신을 지닌 인격체로 축소한 것이다. 물론, 이 논증에는 어떤 정서적 힘, 심지어 도덕적 힘이 있다. 그러나 논리적 힘은 없다. 만물의 시작과 끝을 보지 못하는 한, 모든 시간 위에 있는 신적이고 영원한 지점에 있지 않은 한, 하느님의 자유와 피조물의 자유 사이의 관계의 정확한 본성을 알지 못하는 한, 무한한 지혜를 헤아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어떤 유한한 경험에서 하느님 안에 있는 전능성과 완전한 선의 일치에 대한 결론을 끌어낼 수 없다. 누군가는 세상에서 겪는 고통 때문에 하느님을 증오하는 길이나 의지하는 길, 혹은 거부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없다고 입증" 할 수는 없다.

43 이 수많은 견해 사이에는 차이도 있지만, 그만큼 간과해서는 안되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두 하느님께서 완전히 의로우시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임의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의 폭력,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고난, 결핍, 상실 이면에는 하느님의 계획이 있으며 저 일들의 총합, 저 모든 일의 의미를 한데 묶어 해명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충동이다. 분명 그리스도인은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역사에서 선한 결말을 끌어내기 위해 하느님의 초월적 섭리가 작용한다고 확언할 수 있다. 그러나 (볼테르도 이해했듯) 섭리는 역사에 어떠한 여지도 남기지 않는 사건들의 단순한 '총합'이나 '무한방정식'이 아니다. 

48 누군가는 원죄가 우리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불행을 맞이하든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받아야 할 것 이상의 벌을 받는다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각기 다른 미래가 우리가 한 행동의 보상이나 형벌로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원, "대차대조를 맞추는 것"과는 거리가 먼,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구원은 무의미 해진다.

52 물론, 나는 여러 비참한 죽음을 사랑과 지고지선의 하느님과 연결하려는 이들의 기본적인 취지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했다(상대적으로 가톨릭 신자들의 견해가 다른 신자들의 견해와 견주었을 때 조금 더 정교회의 감각에 들어맞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대다수 견해는 창조와 구원의 질서에 부조리한 측면, 무의미의 여지란 없음을 변호하려는 나머지 신약성서에 담긴 매우 중요한 논의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 견해들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과도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한 은총, (바울이 로마인들게게 보낸 편지 6장에서 말한) 구원이라는 "거저 주시는 선물",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와 무관하게 동일한 보상을 베푸는 "불공정한" 사랑, 우리가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한 하느님의 은혜롭고 너그러운 무심함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아무리 강조해도 충분치 않은) 복음의 승리주의(죄와 죽음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를 거두셨다는 기쁜 소식), 바울과 요한이 그리는 영적, 우주적 전쟁 심상들에 대해서도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55 이반이 동생 알렉세이(혹은 알료샤)에게 말하는 악은 비인격적인 자연의 행위가 아니라 분명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인간의 행위다. 하지만, 달리 보면 인간은 지진이나 홍수 못지않게 자연 질서의 일부며 악에 휩쓸리는 인간의 성향은 (지진과 쓰나미라는) 물질세계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끔찍한 재해 못지않게 형이상학적 낙관론의 양심을 건드리는 걸림돌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인간이 저지르는 총합은 (어떤 종교의 가르침을 제외하고 생각하면) 인간 본성의 어떤 지극을 받아 이루어지는, 야수 같은 충동과 방향을 잃은 의지라는 보이지 않는 샘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 세계의 상수constant다.

56 그에 따르면 하느님은 (하느님께서 존재한다면) 인간에게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에 얽매인 유한한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신을 주셨기에 인간은 하느님의 초월적 설계, 즉 만물이 하느님과의, 그리고 만물을 이루는 요소들의 궁극적 조회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 그렇게 하느님께서 만물을 인도하는 것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반은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정신은 오직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관련해서만 의미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이반은 하느님께서 존재한다는 것, 심지어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이 완성될 때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을 믿는다고 이야기한다. 이반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이 세계, 즉 창조세계다.

2. 하느님의 승리

82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의 그리스도교 형이상학 전통에서 하느님은 선하실 뿐 아니라 선 그 자체이며, 참되고 아름다우실 뿐 아니라 무한한 진리이며 아름다움 그 자체다. 만물의 근원이자 목적이며 모든 존재의 무한한 원천이신 하느님 안에서 모든 초월적 완전성은 하나다. 그러므로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다. 그분은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시므로, 달리 말하면 모든 유한한 존재를 넘어선 (동시에 모든 유한한 존재를 존재케 하는) 초월적 풍요로움 가운데 계신 존재 그 자체이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한, 전적으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91 우리가 타락이라는 시원의 재앙으로 인한 오랜 후유증 가운데 살고 있다는 교리만큼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충격적인 교리, 견딜 수 없는 교리는 없을 것이다. 이 교리에 따르면 이 세계는 부서지고 상처입은 세계이며 우주의 시간은 진정한 시간의 환영이고 인간은 충만한 상태의 창조와 창조가 이루어진 무 사이에 있는 그림자 같은 중간지대, 중간기에 살고 있으며 우주는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를 적대하는 "권세의 천신들"과 "능력의 천신들"에 사로잡혀 고통받고 있다.

99 이러한 영광을 믿든 믿지 않든, 영광의 날이 최후에 도래함을 믿든 믿지 않든, 죽음과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외라는 베일을 통해 지금 이를 "볼" 수 있든 없든 (나는 우리가 모두 때때로 이를 본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내적 성향이 우리가 본다는 것을 인지하도록 허락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하느님의 영광은 우주 혹은 인간의 역사에서 곧바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영광은 역사 앞에, 역사와 나란히, 역사 너머에, 혹은 지연된 상태로 있다.

101 영광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하느님의 위대한 계획"에 대한 진부한 확신으로 전락시킴으로써 고난이라는 걸림돌을 완화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는 가당찮은 일이다. 그러한 확신은 신약성서가 묘사하는 영적 세계를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다. 

104 악을 행할 수 있다는 것, 즉 악행을 저지르거나 악과 마주해 이에 영향을 받는 능력이 하느님에게는 없다. 악에 대한 "능력"capable 이 있다는 것, 즉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나 악과 마주해 이에 영향을 받는 것은 하느님에게 있어서는 사실 하나의 무능력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데 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느님을 하느님보다 덜한 무언가로 만드는 것이다. 하느님의 의지가 향하는 대상은 자신의 무한한 선이며 이는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114 십자가는 고난받지 않는 하느님께서 죽음에 승리를 거두신 사건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한없고 변함없는 사랑이 고난 및 죽음과 마주해 변화, 수정, 한정되지 않으면서, 이들을 끌어안아 이들의 힘을 파괴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써 고난과 죽음을 "이겨내고도 남는"(로마 8:37) 이들이 된다.

114 부활은 "이 세상 통치지들"(1고린 2:8)을 완전히 물리친 사건,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내린 선고를 뒤집은 사건,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심판했던 모든 종교, 정치, 공공 세력이, 더 나아가 우주적 세력이 폭압이고 거짓이며 불의임을 드러낸 사건이다.

118 하느님의 무한한 현실태와 여기에 참여하는 피조물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목적이기 때문에 그 무엇도 하느님에게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만물은 무에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그분의 선을 지향하며 나아감으로써 존재한다. 유한한 생성, 사유, 혹은 욕망의 모든 사례는 비존재 밖으로 나와 하느님이라는 무한한 경이로 들어가는 '자기 초월적 운동'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섭리는 피조물의 참된 자유를 배반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피조물은 근원적으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갈망하기에 의지를 갖고 자유로운 운동을 할 수 있다.

128 세계가 하느님과 구별되며 하느님에게 의존하나 하느님의 자유와 유사한, 고유한 실제 자유를 갖고 있지 않다면, 만물은 그저 신적 의지의 파편일 뿐이며 하느님은 단순히 존재하는 모든 것, 발생하는 모든 것의 총합일 뿐이다. 여기에 창조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신이라는 순수한 힘의 기이한 범신론적 표현만 있을 뿐이다. 이쯤 되면 '이중 예정'과 '제한 속죄'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뒤집힌 프로메테우스주의, 즉 피조물이 되기를 거부하는 욕구, 신의 고독하고 독단적인 의지에서 나오는 행위, 한없이 타오르는 불길에 (자신이)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는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어떠한 경우든 그러한 선, 즉 의지 그 자체이기만 한 신은 무한한 동어반복의 신, 그러므로 무한히 따분한 신에 지나지 않는다.

141 이제 우리는 역사와 자연에 내재한 원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기뻐할 수 있다. 하느님은 역사의 무수한 가닥을 모아 하나의 거대한 종합을 이루시지 않는다. 그분은 역사의 많은 부분을 거짓되고 비난받아야 하는 것으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분은 타락한 자연의 숭고한 논리를 드러내지 않고 피조물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는 족쇄를 끊어버리실 것이다. 그분은 어둠 속에서 고통받은 소녀가 흘리 눈물이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데 필요한지를 보여주시기 보다는 소녀를 일으켜 세우셔서 그녀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그때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때에 옥죄에 앉으신 분은 말씀하실 것이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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