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시학 강독 1-1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4
- 2024. 4. 19.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시학 강독」을 듣고 정리한다.
2024.04.17 🎤 시학 강독 1-1
[1강. 시학 또는 창작의 기술 개요]
일시: 2024. 4. 17. 오후 7시-9시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672
강의 자료: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20240417-suwon
이번에 4월부터는 8번에 걸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여러분과 해보려고 한다. 고전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 간단하게, 그것도 《시학》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하면 지난번에 1월~3월 특강을 할 때도 얘기했듯이 일단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이 말하는 것이다. 말을 잘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옛날에 그리스 시대에도 그랬지만 사실은 공자도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말을 그만하라고 하는 것은 사실 노자이다. 예전에는 노자의 《도덕경》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자연주의적인 삶을 추구하는 텍스트로서 널리 이해가 되었는데, 그것이 의외로 잘못된 해석이고, 말하자면 독재자의 정치 철학을 담고 있는 텍스트다 라고 하는 게 주된 해석으로 알려져 있다. 말을 잘한다고 하는 건 번지르한 말을 잘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은 정신의 표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언어로써 그 정신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가 수원시 글로벌평생학습관에서 강의하는 것은 작년에도 그렇고 올해도 그렇고, 내년에는 할지 안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제가 할 수 있는 한까지는 명료한 언어를 통해서 그 언어를 만들어내는 정신을 정돈하고 그렇게 해서 훌륭한 민주시민이 되는데 목적이 있다. 훌륭하다라고 하는 것은 내면의 덕을 닦아서, 방구석에 앉아서는 훌륭함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방구석에서 훌륭함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훌륭함이다. 불교의 덕이라고 하는 것이, 선불교가 특히 그러한데, 저 깊은 산속에서 암자에서 혼자 도를 닦으니까 바깥에 나오면 참으로 참혹한 모습을 많이 보이게 된다. 결국에 우리가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의 훌륭함을 얘기한다.
그러면 이제 지금 그것은 알겠는데, 지난번 특강을 한 정치라든가 수사학이라든가 이런 것이 《시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사실 고대 그리스의 《시학》은 드라마에 관한 얘기인데, 고대 그리스에서 이 드라마는 넷플릭스에서 혼자 이렇게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 학습의 도구였다. 간단히 말하면 시민들이 드라마를 꼭 보러 가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사실 public goods, 공공재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는 public goods이었다. goods이라는 단어에 선이라는 뜻도 있지만 재화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이것을 공공재라고 한다. 공통의 영역에서 서로 나누어 가지는 재화라고 해서 공공재라고 한다. 그러니까 public goods이라고 하는 말은 공동선이기도 하고 공공재이기도 하다. 재라는 말과 선이라는 말이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에서의 드라마라고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게도 혼자 방에 앉아서 즐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 공공의 사물이다. 수원시 글로벌평생학습관이라는 공공영역에서 공공기관에서 강의를 하니까 여러분 모두가 이것이 재미있는 것이고 공공재라고 알게 하는 의무가 있다. 공공영역에서 하는 것이니까 공공의 선에 기여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여러분들의 교양을 확장시키고 깊이 있게 만드는 데 기여를 해야 된다. 그게 이 강의를 하는 목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시라고 하면 전철역 스크린도어에 김소월의 시가 써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시라고 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사적인 것이다. 우리의 정서에 근거를 해서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서정시라고 한다. 인간의 정서에 근거를 두되 화려하게 꾸며야 한다는 것이 서정시의 기본적인 작법이다. 그런데 꼭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자와 제자들 간의 대화들을 묶어놓은 《논어》에 보면, 《논어》라고 하는 텍스트는 전체적으로 볼 때 정치 사상에 관한 텍스트인데, 시 삼백 수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무사思無邪라는 얘기가 있다.
논어 위정편爲政篇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자왈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무사
공자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교재가 있어야 되었을 텐데 공자의 교재는 무엇이었겠는가. 사서삼경四書三經에서 삼경이 공자의 교재이다. 삼경은 주나라 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서인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라는 시스템이 자리를 잡은 것은 송나라 때이다. 시경, 서경, 역경이 공자의 교재였다. 공자는 주역을 韋編三絶, 죽간의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읽었다고 하는데 많이 안 읽은 것이다. 왜냐하면 대나무를 가죽줄로 묶어 놓으면 금방 끊어진다. 공자가 책을 좀 험하게 다룬 것이라고 봐야한다. 우리가 공자님보다 생각이 짧아서 그렇지 자료는 많다. 서경은 주나라 때 정치 관련 텍스트들이고, 시경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시를 묶어 놓은 게 아니라 시사current issue이다. 시사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일을 음율에 맞춰서 적어놓은 것이다. 서경은 정부 문헌이고 시경은 current issues들을 묶어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시경에 들어있는 문헌이 삼백수라고 해서 시 삼백이라고 부른다. 시 삼백수를 쭉 살펴보면, 예전에 나온 일종의 시, 주나라 시대에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던 이야기들을 묶어 놓은 텍스트를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는 말이다. 나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사무사思無邪라고 하는 이 얘기는 공자가 만든 얘기가 아니라 시경에 나와 있는 얘기이다. 사무사思無邪라고 하는 것은 위정자가, 옛날에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정치가라는 말을 안 쓰고 위정자라고 썼다, 위정자라는 말이 논어에 나온 것이다. 옛날에 주나라에서 말을 들판에다 놓고 풀을 먹여야 되는데, 풀을 뜯게 하는 장소가 농사짓는 곳과는 좀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래서 누가 시를 읊었는데, 말에게 풀을 먹이는 장소가 전답에서 멀리 떨어져 있구나. 그러니 말을 키우는 것을 보니 위정자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는 걸 알겠다 라고 얘기를 했다. 그러니까 사무역 사마사작思無斁 思馬斯作, 말을 생각하는 것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위정자의 생각에 나쁜 게 하나도 없구나, 말을 생각하는 것이 이와 같다니 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공자가 생각하기에 시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정치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기에는 시라고 하는 건 김소월의 시, 김영랑의 시 이런 것인데, 물론 중국의 시에도 그런 것이 있다. 이를테면 지난 번에 읽은 만당기의 이상은의 시, 유미주의적인 시도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세계에서도 시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원래는 이런 것에서 시작을 했다. 이것은 그러니까 서정시도 아니고 서사시도 아니고 시사시, current issue에 관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내용은 이러한데 시라고 하는 것을 작법을 어떻게 만들어야 훌륭한 시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한문학과에서 하는 것이다.
헤시오도스의 《일과 나날》호메로스의 서사시도 시이다. 《일리아스》 1권의 "분노를 노래하소서, 시의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로를"도 시이다. 고대 그리스의 젊은 청년들은 음유시인들이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읊어주면 그걸 들으면서 나도 아킬레우스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뒷세이아》를 들으면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공공재로서 소비가 되는데 이제 그런 서사시가 조금 더 발전해서 우리가 아는 소포클레스라든가 에우리피에스라든가 아이스퀼로스라든가 이런 사람들의 드라마가 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는 이 드라마 중에서도 일단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최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사람이 아니라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인 마케도니아 사람이다. 플라톤은 헬라스의, 발칸반도의 아테나이 귀족 집안의 자식이다. 플라톤을 이해하는데 귀족 집안의 자식이라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자기가 뭔가 뜻을 가지고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가 개판이구나 라고 생각을 해서 잘 만들어보고 싶은데 잘 안 되었다. 그리고 자기의 선생인 소크라테스는 전쟁터에 다 나간 아테네에서 1등 시민이다. 아테나에서 전쟁터에 나가서 살아 돌아와서 전공을 세운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그리고 공적영역에서 무슨 의장도 했었다. 소크라테스는 1등 시민이다. 1등 시민인데 자기가 생각하기에 여러분들은 이렇게 가면 안 됩니다 라고 말을 했을 뿐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아테나이는 혈통에 의한 뭔가는 이제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말 그대로 각각의 개인이 시민 공동체에 기여한 바에 따라서 인정받는 사회였다. 그렇게 보면 소크라테스가 1등 시민이고, 플라톤은 옛 전통의 귀족 집안의 자제인데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고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여기 소크라테스가 있다. 이 사람들은 어쨌든 정통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테나이의 정통파들은 곁눈질을 안 한다. 앞으로 전진만 하는 사람들이다. 여기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여러분들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정한 정도 당시 자기가 살고 있던 아테네라고 하는 동네에 대한 현실적인 집착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버린 사람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는 걸 알고 있는데, 어떤 지점에서는 원래 소크라테스가 한 얘기가 아닐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원래 무슨 말을 했는가를 알아보려면 사실은 플라톤의 대화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텍스트를 읽는 게 더 빠르다. 이른바 소크라테스 학파라고 알려진 사람들의 책을 읽어보면, 즉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록》과 같은 것들이 훨씬 더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잘 알려준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저렇게 읽어보니까 소크라테스의 그 가르침은 아테네라고 하는 동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인류 보편의 얘기에 훨씬 가깝다고 생각된다. 간단히 말하면 소크라테스의 얘기는 부처님 말씀이나 예수님 말씀에 가깝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 이야기보다는 자기 얘기가 많다. 이게 왜 그럴까 라고 생각해 보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다룬 텍스트인 《파이돈》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이제 나는 죽을 테니까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집으로 가십시오 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장면에 플라톤은 없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면 그 장면에 자기가 있는 게 마땅하다. 자기가 썼는데도 플라톤이 그 장면에 등장하질 않는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자기 스승의 임종을 쌩 깐 것으로 되어 있다. 왜 그랬을까. 답은 갑자기 미워져서에 가깝다. 요즘의 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자기의 생각이 조금 다른 것이라고 해석을 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가르침에 차이가 있다 라고 해석을 한다. 그러니까 플라톤의 대화편에 들어있는 얘기들은 아주 일관되게 진짜로 좋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를 하고 그다음에 그 좋은 것을 가져다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얘기하고, 그 좋은 것을 알아내는 사람은 철학자라는 얘기를 하고, 그것을 알아내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되고 그러한 얘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전체가 좋은 것은 무엇이고, 좋은 것은 어떻게 알 수 있고, 좋은 것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얘기한다. 플라톤의 대화편 전체는 좋음이라고 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이 좋음을 실현하고 알아내고 만들어내고 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좋음 일원론자이다. 이 사람은 좋음에 대해서만 얘기한다. 다른 거 얘기하지 않는다. 자기 인생에서 좋음 이외의 것에 신경 쓸 틈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한테 좋음을 알게 할 것인가 이런 것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냥 아테네 교외에다가 아카데메이아를 짓고 거기서 학생들한테 이걸 가르치기만 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아테네 시민들한테 잘 가르칠까를 궁리하지 않고, 배우러 오는 사람들한테만 가르친 것이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지식 엘리트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배운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하기를 원했다.
공자도 그랬던 것이다. 공자도 지식 엘리트이다. 《논어》는 공자 후대 삼전 제자, 그러니까 증자의 제자들이 편집에도 가담했다. 《논어》에서 가장 이쁨 받는 사람은 안회이다. 그런데 안회는 일찍 죽어서 제자가 없다. 그러니까 후대의 제자들이 아주 편안하게 안회를 높이 추켜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증자가 가장 찬양을 받는데, 기무라 에이이치가 쓴 책을 보면, 그러니까 논어가 어떻게 편집되었는가를 보면, 증자의 제자들이 상당 부분 《논어》 편집에 가담했다. 그러니까 자기의 직계 스승을 높이는, 공자에게 가장 칭찬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논어》을 읽을 때는 항상 조심해야 된다.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다르다. 좋음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플라톤이라고 하는 텍스트를 읽어보면 징그러울 정도로 좋음에 대해서 얘기한다.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것인가를 궁리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사람이다. 아테네 사람들이 보기에 마케도니아는 희랍어를 쓰고 있기는 한데, 그리스는 그리스인데 그리스 같지 않은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그리스를 정복했다. 이소크라테스가 그래서 저항을 했다. 그때 이후로 현실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는 지금도 원수이다. 그때의 원한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변두리에서 온 사람이다. 아테네에 공부를 하러 왔다. 변두리에서 온 사람은 응용력이 강하다. 변두리에서 왔지만 플라톤 시대에 아테네 사람들 못지않게 굉장히 탁월한 scholarship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내가 정통적인 것을 배워서 플라톤의 뒤를 이어야겠다 라고 살짝 생각을 했을 수는 있겠으나 잘 안되었다. 안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죠. 플라톤이 죽은 다음에 아카데메이아의 2대 원장은 당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났는데, 그러다가 마케도니아가 아테네를 정복한 다음에 다시 왔는데 아테네 사람들이 좋아하겠는가. 그래서 리케이온 학당을 하다가 다시 제 발로 떠났다. 아테네 사람들이 철학에게 두 번이나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 발로 떠난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후대 사람들이 만든 말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위대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을 보면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를 이어받지 못했다라는 것에 실망했다 라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실망했을리는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생각했다.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좋음이라고 하는 것을 따져 물어야 되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좋음을 따져 묻는 것인데, 플라톤은 이론적으로만 따져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좋은 것만 따져물을 수 없다. 그러니 날마다 시나브로 조금씩 찔끔찔끔 스텝 바이 스텝으로 좋은 짓을 하다 보면 좋음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적으로는 이게 좋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것을 가져다다 우리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아는 것과 그다음에 그것을 살아가면서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이 문제의 차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플라톤은 연극을 보러 다니지 말라고 얘기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연극을 꼭 끊어야만 되는 건 아니었다. 인간의 삶에 순전한 기쁨을 주는 것들이 좀 있지 않는가. 그런 기쁨을 누리면서, 그 쾌락hēdonē이라는 것이 꼭 마약이라든가 이런 것만이 아니라 순전한 의미에서의 감정을 가져다가 찜찜한 것을 털어냄으로써 우리가 명쾌하고 정화되어서 맑은 정신을 가지는 순간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면 그것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게 바로 드라마이다. 그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시이다. 시라고 하는 것은 그냥 문학 작품이 아니고 앎과 삶에 연결되어 있는 부분인 것이다. 이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는 것을 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을 한 것이다. 왜 이것이 없어지지 않고 있을까. 쓸모가 없는 것이 남아 있는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서 꼭 드라마라고 하는 것이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만은 아니고 도덕적으로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순수하게 어떤 감정이 이렇게 찢겨 내려가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와는 다르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국면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훌륭한, 오늘날에도 읽을 만한 텍스트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면 《시학》이라고 하는 것을 크게 보면 무엇인가. 도대체 지금 사람들이 쉴 새 없이 계속 보고 있는 저 드라마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길래 저렇게 사람들이 보고 있을까 하고 그 드라마의 본질적인 측면을 원리와 구성을 따져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문예이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문예이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잘 알며 어떻게 하면 드라마를 잘 만들 수 있을까도 연구를 할 것이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있는 것이다. 여기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라고 말하는 것은 드라마이다. 서사시도 아니고 서정시도 아니고 드라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드라마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따져묻고 그다음에 그 드라마를 어떻게 하면 잘 만들어서 최대한 사람들에게 감정의 정화purification를 일으키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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