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시학 강독 2-2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5
- 2024. 4. 30.
📚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시학 강독」을 듣고 정리한다.
2024.04.24 🎤 시학 강독 2-2
제2강 모방이란 무엇인가
• 일시: 2024. 4. 17. 오후 7시-9시 장소: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672
• 강의 자료: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20240424-suwon
앞서 모방의 기본 원리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이것을 꼭 여러분들이 알고 가는 게 좋다. 항상 깊이 있게 생각을 해봐야 된다. 우리가 과연 기계론적 인과만 가지고 모든 것을 다 온전히 설명해낼 수 있는가, 그건 어렵다는 것이다.
"❧ 무엇을 모방하는가"를 보겠다. 《시학》을 가진 사람들은 제1장을 펴면 된다. 무엇을 모방하는가. "성격(ēthē)과 감정(pathē)과 행위(praxeis)를 모방"한다. 책 1447a27에 있다. 이상인 씨가 번역한 것을 책은 65페이지 그리고 손명현 선생님의 책은 10페이지에 있다. 성격과 감정과 행위를 모방한다. 세 가지를 모방하는데 행위에의 성격과 감정이 나타나기 때문에 행위가 중요하다. 행위를 보면 성격과 감정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영화배우 누구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는 그 영화배우가 드라마에서 보여준 성격과 감정과 행위를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다. 성격과 감정과 행위를 모방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라고 하는 것에 성격과 감정이 표현된다고 말을 한다. 그래서 행위로써 성격과 감정을 재현한다 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모방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재현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재현이라는 말을 잘 안 쓰는 이유는 재현은 있는 그대로 베낀다는 뜻이 굉장히 강한다. 그런데 모방은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본질을 본받는 것이다.
질문을 하나 하면 역사라고 하는 것이 본질을 잘 드러내겠는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의미에서 시가 본질을 잘 드러내겠는가. 시와 역사를 비교해서 무엇이 더 진리에 가까운가 라고 하는 논의는 《시학》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가 사태의 본성physis을 모방한다고 말했다. 시가 훨씬 더 진리에 가깝다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는데 1905년 을사조약, 1965년 한일협정이다. 한국과 일본은 항상 을사년에 중요한 일이 있엇다. 내년이 을사년으로 120년의 기간이다. 재미있는 일이 또 있다. 발명가 에디슨이 장사를 해보려고 J.P. 모건한테 투자를 받아서 세운 회사가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그러니까 "전기에 관한 모든 것"이다. 제너럴 일렉트릭이 최근에 3개 회사로 나뉘면서 드디어 망했다. 120년 되었다. 그러니까 무렵에 나온 것이다. 1905년이라는 해가 되게 중요하다고 말하면 그건 역사적 사실이다. 역사적 진리historical truth는 아니고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라고 한다. 역사는 사실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사실들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진리를 말한다고 얘기한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목적론적인 어떤 전체 세계를 말해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할 때 진리는 기계론에서 말하는 진리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 생각한다. 인과관계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도 진리이다. 그러니까 아까 얘기한 것처럼 과학에서는 그것도 진리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할 때는 시가 더 진실에 가깝다고, 진실이라는 말을 쓴다.
성격과 감정과 행위를 모방한다는데, 성격은 ēthē이고 그다음에 pathē가 emotion, praxeis가 action이다. 행위를 보면 "고유한 내적 의미에서의 행동, 외부로 향하는 내적인 힘, 성격과 감정을 함축한다." 여기서 성격과 감정을 함축한다 라고 하는 말이 중요한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는 근대 드라마이다. 근대 드라마는 행위가 성격과 감정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행위가 성격과 감정을 드러내 보여준다 라고 하는 것은 고전 드라마,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따르면 그렇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멀쩡하게 가만히 있어도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근대 드라마이고, 고전 드라마는 부글부글 끓고 있으면 부글부글 끓는 짓을 해야 된다. 상응하는 행위를 해야 된다. 그래서 근대 드라마는 진정한 의미의 성격 드라마라고 부르고 고전 드라마는 행위의 드라마다 라고 얘기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보면 오이디푸스는 절망해서 자기 눈을 찌른다. 눈을 찔러서 장님이 된다. 희랍 세계에서 장님이 되는 것은 산송장이다. 그 세계에서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은 죽었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게 절망의 표현이다. 행동으로써 드러내 보여준다는 말이다. 어떤 행위와 그 내면의 성격ēthē, ēthē와 행위를 연결하는 그 연결고리들을 발견하는 게 작품을 이해하는 관건이다. ēthē와 pathē가 행위와 거의 일대일 대응해서 드러나는 드라마가 로맨틱 코미디이다. 그래서 내가 로맨틱 코미디를 열심히 본다. 로맨틱 코미디는 행위가 코드화되어 있다.
"창작은 예술적 모방의 한 형태이고 그것의 본질은 운문화韻文化가 아닌 이념의 모방이다." 운문화가 아닌 이념의 모방이다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학》 1장에 보면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든 은유를 갖춘 언어를 사용하든 여러 은유를 서로 혼합해 사용하든 한 종류의 운율만을 사용하든, 이런 은유를 가지고 하는 것들을 예술이라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모방이라고 하는 것은 이념을 모방하는 것이고, "창작물은 성격, 감정, 행동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이상화한 재현물이다." 이상화한 재현물 idealized representation, 여기서 포인트는 이상화된 것이다. 이상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념을 모방하는 것이다. 행동이라고 하는 건 이 연결고리를 꼭 봐야 된다. ēthē가 있는데 이 ēthē는 반드시 행위하고 연결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이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전제로 하면, 어떤 행위를 따라하다 보면 그대로 성격ēthē을 형성할 수도 있다. 이게 고전적인 윤리 이론이다. 이 얘기는 서양 철학이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게 아니라 공자님 말씀이기도 하다. 아침에 인사하고 저녁에 인사해라. 행동 똑바로 하다 보면 심성이 바로 될 것이다. 그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었건 선진 시대가 되었건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 비슷한 시기로, praxeis와 ēthē가 서로 연결돼 있다고 하는 것, 그 시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 행위를 따라 하다 보면 성격이 닮아간다는 얘기도 있을 수 있다. 선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선한 행동을 하라는 얘기가 아리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나온다. 맹자도 날마다 하라는 얘기를 한다. 맹자의 윤리학이 사실 그것이다. 한때 인문학에서 동양학을 하는 강좌들이 많았는데 불교와 유교를 퉁쳐서 동양학이라고 하면 안 된다. 불교는 동양학이 아니다. 불교는 굉장히 다른 종류의 사상이다. 날마다 행동을 뭔가 한다고 해서 성격이 바뀌어지지 않는, 한 방에 끝내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유가나 이런 쪽은 계속해서 행위praxeis를 통해서, 행위의 모방을 통해서, 습득을 통해서 ēthē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예술이론과도 연결되어 있고 윤리학과도 연결되어 있다. 정치학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하고 윤리하고 연결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면 한 번 좋은 정치를 경험해보면 그다음에 계속 좋은 정치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
그다음에 "모방은 참된 이념에 따른 창조이며, 창작자는 보편적인 것을 포착해야만 한다." 그래서 시인은 보편적인 것을 포착하고 역사가는 보편적인 것을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가 훨씬 더 진리에 가깝다. "모방은 보편적인 것을 본으로 삼아 질료를 질서(taxis)있게 짜넣어 조화를 만드는 일이다." 이게 창작이다. 보편적인 것을 본으로 삼아 여러 가지 재료를 거기다 질서 있게 짜 놓는다, 구성을 잘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어떤 재료를 쓰느냐, 언어는 어떻게 써야 되느냐 이런 것들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논의를 한다.
그다음에 "모방의 대상은 행위하는 인간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보면 제1장이 모방의 수단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제2장이 모방의 대상이고. 제3장이 모방의 방식이다. 모방의 대상은 무엇인가, 행위를 대상으로 한다. 행위하는 인간들을 대상으로 한다. 행위는 성격을 드러내므로 성격을 모방하는 것이며, 그에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의 대상인 성격을 상세하게 논의한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보다도 조금, 도덕적으로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수준이 좀 떨어지는 열등해 보이는 영구 같은 애들을 흉내내면 희극이 된다. 보통 평균의 인간보다도 조금 진지하고 자기에게 닥친 시련에 완전히 결연히 맞서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성격은 제2장에 보면 나오는데, 모방의 대상은 무엇을 모방하는가. 도덕적으로 탁월하다기보다는 우리보다도 월등한 성격을 모방한다. "창작자는 인간의 행위를 모방한다. 행위는 성격을 드러내므로, 결국 성격(과 감정)을 모방하는 것이며 그에 따라 모방의 대상인 성격을 세분하여 논한다." ēthē는 두 종류가 있는데 우리보다도 우월한 것이 있고 우리보다도 열등한 성격이 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해서 압도적인가 압도적이지 않는가이다. 우리가 열등한 인간을 갖다가 모방하면 코메디이고, 우월한 인간을 모방하면 비극이다. 이 중간에 우리와 비슷한 사람을 모방하는 것도 있다. 그래서 셋으로 나눈다. 성격이 우리보다 우월한 건 이상적인 인간들, 도덕적으로 우월한 건 아니다. 우리보다 열등한 인간들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풍자적인 것, 우리와 비슷한 인간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사실적인 것이다.
모방의 대상이 있고 모방의 방식이 있고 모방의 매체가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모방의 대상. 행위를 모방하는데 행위는 성격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런데 이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보다도 우월한 것이 있고 우리보다도 열등한 성격이 있다. 그런데 우월하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이 아니라 성격적으로 우월한 것이다. 고전 드라마에서는 행위가 성격을 드러낸다. 행위를 모방한다고 하는데, 이 행위라고 하는 것을 왜 모방을 해야 되는가. 그것이 성격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모방의 대상이 행위인데 파고 들어가면 성격이다. 성격은 크게 둘로 나누는데, 중간은 보통의 것이다. 그래서 우리보다 더 우월한 성격을 다루는 이상적인 것 그다음에 풍자적인 것 사실적인 것, 기법이다. 성격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서 이상적 기법, 사실적 기법, 풍자적 기법이다. tragodia는 비극, komodia는 희극, 희극은 풍자적인 것이다. 희극에는 반드시 모자란 사람들이 나와야 된다. 우리보다 모자란 애들이 등장해야 희극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셰익스피어 드라마는 이것이 안된다. 오셀로는 우리보다도 우월하지 않다. 그런데 비극이다. 그러니까 셰익스피어가 엄청난 사람인 것이다. 찌질한 사람을 가지고 비극을 만들어 내버렸으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고전 드라마와 근대 드라마, 셰익스피어와 소포클레스를 비교해보면 이것이 드러나 보인다. 이걸 알면 이제 기본적으로 드라마를 읽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드라마도 다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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