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ε. Gilson, God & Philosophy」를 듣고 정리한다.
2024.04.29 ε. Gilson(7), God & Philosophy, preface
에티엔 질송, ⟪철학자들의 신 - 역사적 개관⟫(God and Philosophy, 2002)
텍스트: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god-philosophy-preface
오늘은 preface를 마무리하고 다음에는 챕터 1을 본격적으로 읽어보려고 하는데, 오늘 읽을 부분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주제이다. 자신의 연구 과정과 그리고 강의 의도, 대략적인 주제를 천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연구 과정 부분이 재미있다. 완전히 이해가 안 된 부분이 좀 있는데, 제가 1900년을 전후한 프랑스 철학계가 무엇을 연구하고 어떤 것에 집중했는가에 대해서 그리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고, 지식이라기보다는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고 하기 때문에 설명이 미진할 수가 있다.
질송은 프랑스의 가톨릭 대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질송의 생몰연대를 보면 이때쯤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대학에 입학을 해서 철학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1900년이라고 하는 시기에 프랑스 철학은 질송도 거론을 하고 있지만 앙리 베르그송이 한참 이름을 날릴 때이다. 앙리 베르그송은 1859년이니까 질송보다는 한 세대 이전 사람이다. 지적으로는 동시대인이라고 할 수 있고, 질송이 지적하기를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유대-기독교 전통 신으로 향해 갔다라고 말하는데, 이 표현은 조금 중의적인 표현인 것 같다.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라든가, 베르그송의 텍스트들을 이렇게 읽어보면, 여기서 베르그송에 대한 저의 학습과 생각을 길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베르그송에 대해서 알고 있기로는 신적인 형이상학, 유대-기독교 전통의 신과는 무관해 보인다. 베르그송은 일단 생철학이라고 할, 그가 말하는 생철학은 신적인 것에 대한, 신적인 것은 정적이고 불변의 것에 대한 그런 사유인데, 베르그송은 아닌 것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글쎄 반드시 그렇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저도 이번에 질송의 지적을 보면서, 유대-기독교 전통 신을 향해 갔다 라는 생각은 사실 저는 안 해봤는데, 이 말을 질송이 의도적으로, 그도 알지 못하게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러니까 베르그송은 무신론적인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형이상학은 틀림이 없었는데, 생철학도 하나의 형이상학이다. 그런데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을 견지하고는 있었겠지만 사실은 그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베르그송은 어쩌면 신적인 형이상학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베르그송에 대한 질송의 평가는 베르그송을 옳게 평가한다 그릇되게 평가한다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한 번 좀 숙고해 볼 문제이긴 하다. 과연 우리가 베르그송의 생철학에서 어떤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를 넘어선 유대 기독교적인 신적인 계기를 발견할 수 있는가, 질송은 그걸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건 하나의 문제로 남겨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질송의 이 얘기를 여기다 빨간색 연필로 표시를 한번 해둘 필요가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저는 빨간색 연필은 중요한 것, 생각의 여지가 있고, 좀 더 공부를 해야 될 만한 그런 부분이 있기 때문에, 당장은 아니지만 베르그송의 생철학이 가지고 있는 유대-기독교적 전통 신으로 향해 나아가는 계기들이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를 가지고 표시를 해놔야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한다.
질송은 가톨릭 대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철학 교수가 빅토르 쿠쟁의 제자였다고 한다. 빅토르 쿠쟁은 어찌 보면 프랑스적 철학, '우리 프랑스는 이것이 우리 프랑스의 철학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제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데카르트를 프랑스의 철학자로, 저는 데카르트가 프랑스 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데카르트 당시에 프랑스라고 하는, 데카르트 자신이 내가 프랑스 사람이다 라고 하는 어떤 아이덴티티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적어도 자신이 국민국가로서의 프랑스라는 것에 대한 아이덴티티가 있을 때 프랑스 철학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쿠쟁은 시도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까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Scholasticism, 즉 스콜라주의, 김진혁 교수는 스콜라 철학이라고 번역했는데 스콜라주의라고 해야 마땅할 것 같다. 데카르트 시대 이후에는 스콜라주의라고 하는 것이 정신적 고고학의 단순한 조각이 되었다 a piece of mental archelolgy. 데카르트의 책을 읽어보면 스콜라주의에 대한 경멸 내지는 무시 이런 것들도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발로 밟고 있는 그림도 있고, 《철학 고전 강의》에서 제가 그런 부분들을 설명한 것도 있다. 그런데 스콜라주의를 경멸을 하면서도 데카르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신이다. 최후의 보증자로서의 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정초할 수 없다면 데카르트 철학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러니까 스콜라주의에서 단절하고 정신적 고고학의 단순한 조각으로 간주해버렸다고, 빅토르 쿠쟁의 제자한테 그렇게 배웠다는 것인데, 이때만 해도 질송은 아퀴나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던 상황이다. 데카르트 얘기를 뒤에서 하고 있는데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결론이 이해될 수 있는 유일한 맥락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라고 되어있다. 이건 정말 아주 타당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데카르트 자신은 스콜라주의에서 빌려온 용어와 문제들을 가지고 뭔가 철학적 사유를 했다. 데카르트가 난데없이 새로운 것을 발명해내고 그럴 수는 없었다. 앞서서 철학사에서 선행하는 데이터들을 가지고 문제를 결정하는 태도들에 대해서, 질송이 지적한 것처럼 데카르트 역시 의식적으로 방법론적 회의라고 하는 제시했지만 그건 헛된 노력이었고 데카르트가 가지고 있는 또는 그가 활용할 수 있는 그가 이용할 수 있는 길어올릴 수 있는 사상적 자원들 그런 것들은 당연히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니까 그런 스콜라주의를 벗어나려면 차라리 철저하게 스콜라주의를 가지고 작업을, 의식적으로라도 일부러라도 벗어나고 싶은 것들을 매달려서 작업을 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해보는데 질송이 이제 그 점을 지금 지적을 하고 있다. 이것은 꼭 유념해서 봐야 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질송은 빅토르 쿠쟁에게 배웠기 때문에 데카르트를 대학에서 굉장히 배웠을 것이다. 가령 어느 강의에서 우스갯소리로 얘기한 적이 있는데, 한국의 철학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아주 핵심적인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가령 독일 관념론을 가르친다고 하면 칸트부터 헤겔까지, 일단 독일관념론 철학이라고 하면 피히테, 쉘링, 헤겔 3명을 가리키고 칸트는 독일관념론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칸트부터 헤겔까지 남김없이 가르쳐줘야 하는 것이 독일관념론 철학인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독일 관념론 강의를 칸트 전공자가 가르친다. 일단 칸트 전공자는 독일관념론 철학의 전공자가 아니고 잘 가르치지 않는다. 독일관념론을 수강하더라도 피히테는 배운 적이 없으니까, 독일관념론에 대한 논의들에서 헤겔 중간에 피히테와 쉘링을 생략한 채 칸트와 헤겔만을 얘기하게 되는, 헤겔만 해도 그 선행하는 것들에 대한 것들의 이해가 없으면 이해가 곤란하다.
그리고 "뤼시앙 레비-브륄이 흄의 철학에 접근한 방식"을 가지고 해야 된다고 얘기를 했는데, 이것은 도대체 잘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일단 뤼시앙 레비-브륄이 흄의 철학에 어떻게 접근했는가를 잘 모르겠는데 흄의 철학이 있고, 뤼시앙 레비-브륄의 방법론, 철학적 접근 방법론이 무엇일까. 이 사람이 철학사를 연구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미개사회에서의 정신의 기능》, 이 책은 읽어보지는 않았는데 번역("원시인의 정신세계")되어 나오기도 했다. 뤼시앙 레비-브륄은 일단 사유 체계들 사이에 단절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원시적 사유와 근대적 사유가 있고, 원시적 사유는 근대적 사유와 서로 통역 불가능하다. 미개사회는 전 논리적, 논리 이전의 것이고 우리 문명사회에 사는 사람이 그들의 사유 체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의 방법을 가지고 이해할 수는 없고 좀 더 나아가면 그들의 사유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사유가 근원적으로 근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을 일단 동의하고 수긍해서 들어가야 한다 라고 하는 게 레비-브륄의 인류학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 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흄의 철학에 접근한 방식이 무엇일까를 생각을 해보면, 레비-브륄이 흄의 철학에 접근한다고 하면 어떻게 접근한다는 것인지는 상상을 해봐야 되는 문제인데, 최대한 이걸 해명을 해보자면, 질송이 이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해볼 도리가 없는데 최대한 상상을 좀 해볼 필요가 있겠다. 신과 근대철학을 보면 현대에서는 콩트의 실증주의라든가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굉장히 사태가 달라졌다고 하는 것을 얘기를 하는데, 레비-브륄도 물론 실증주의이다, 113페이지에 각주가 있다. "빅토르 쿠쟁의 해석 때문에 데카르트는 자기 자신의 유심론적 형이상학의 주창자로 여겨왔습니다." 그리고 "레비-브륄의 미출간 원고의 영향 아래에서 제가 쓴 다음 책에도 과학적 요소를 강조했습니다." "레비-브륄이 과학적 정신을 가진 데카르트를 가르치던 바로 그해, A.에스피나스는 변증론적 정신을 가진 데카르트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레비-브륄은 데카르트를 가르치기는 가르쳤는데 과학적 정신을 가진 데카르트 이런 식으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나중에 근대 철학을 할 때 데카르트를 어떻게 접근해 들어갈 것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서 다시 얘기를 하겠는데 "흄의 철학에 접근했다"고 하면 흄은 과학적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접근하지 않았을까. 과학적 정신을 가진 데카르트. 흄과 데카르트의 공통점은 회의주의이다. 흄은 데카르트보다도 훨씬 더 회의주의가 강력하다. 흄의 철학을 가르칠 때 회의주의라고 하는 것이 바로 과학적 정신이다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았을까. 그리고 실증주의적 연구 방법 이런 것들이 과학주의라고 하는 그런 것을 내놓았으리라고 짐작을 해보게 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레비-브륄은 실증주의적 연구 방법이다. 그런데 scientifism, 과학적이 아니라 과학주의,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만능 해결사다 라고 하는 이데올로기가 과학주의인데, 과학주의라고 일단 저는 제 주석을 달아봤다.
그다음에 질송 자신의 저작이 이런 것을 통해서 나왔다. 《데카르트에게서 자유와 신학》, 데카르트가 스콜라주의에서 빌려온 용어와 문제들이 무엇인가. 데카르트를 논박하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데카르트와 스콜라주의 연결고리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질송의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도 연구 방법론을 찾아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겠다. 그래서 거기서 나온 결론이 아퀴나스를 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는 헛된 노력이라는 것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이 이해될 수 있는 유일한 맥락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이다. 데카르트주의자들에게는 그리고 데카르트가 이전 시대와의 그 모든 것을 단절했다고 하는, 즉 데카르트의 사유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행하는 사유 체계들을 전혀 전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유일한 맥락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굉장히 충격적인 결론이다. 이것은 신과 근대 철학에서 데카르트를 다루고 있는 부분에서 좀 더 상세하게 확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질송은 자신의 결론을 내린다. 형이상학을 제대로 아는 이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제가 처음에 김규영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책을 읽었을 때 이 부분이 굉장히 저에게는 인상적이었다. 형이상학을 제대로 아는 이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이 약간의 지적 허영이 있기도 했지만,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적인 문제 의식을 정교하게 다듬고 가다듬고 또는 적어도 철학적 사유의 훈련을 하는 데 있어서는 형이상학 제대로 아는 이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 이것은 정말 굉장히 중요한 지상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느 것도 그 위에 설 수 없는 가장 위에 있는 최상위의 ultimate imperative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 질송이 질타가 이어진다. "현시대의 철학적 혼란은 우리가 몇몇 근본적인 원리들에 대한 지식을 놓쳐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그리고 "지적 자기 훈련에 대한 반항", 앞뒤 문맥을 딱 떼어놓고 보면 굉장히 좀 속된 말로 꼰대의 훈계로 생각될 수 있는데,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결론이 이해될 수 있는 유일한 맥락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이다 라고 하는 것을 선행하는 논의로 놓고 본다면 이것은 꼰대적인 발언이 아니라 공부의 올바른 방법론을 길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다음에 이것은 노트에 본문을 통해서 해명을 해야 되는 것들이다 하는 것을 적어두었다. 신존재 문제에 대한 형이상학적 함의 전체를 분명히 하게 한 것은 아퀴나스인데, 그것을 전제로 해서, 그렇다고 해서 토마스주의를 그냥 기계로부터의 신deus ex machina처럼 놓고 "이로써 오류는 제거되었다"하는 얘기를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이제 self-existence, 자기 존재적, 자존적, 신의 무한한 행위에 기인하여서 다른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 그다음에 주목해야 할 만한 말이 있다. "신에 관한 구체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인들이 결코 말한 적 없던 것들을", 희랍인들은 초월적 신이라는 주제를 사유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self-existence, 신의 무한한 행위라는 것은 희랍 사람들에게 없던 개념이다.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개념들 덕분에 기독교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개념적 사유를 전개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헬레니즘 세계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철학적 성과이다. 헬레니즘 철학 그러면 스토아주의, 에피쿠로스주의 이런 것들만 얘기하는데 그래서는 안 되고 이것이 상호 침투하고 융합된 지점, 이 지점이 기독교가 신학과 철학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기여했는가, 헬라스의 개념들이 어떻게 기여했는가, 그것은 분명히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이 사유 체계의 단절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사유 체제의 단절을 시도해서는 않았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한다. 질송이 preface에서 지속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게 그런 것이다. 선행하는 철학들에 대한 충분한 숙고, 그리고 그런 숙고 위에서 determine 해서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다. 사유 체계의 단절을 시도하지 않았고 선행하는 사회의 용어와 문제를 숙고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철학을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는 일부 과학자가 형이상학의 근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것을 과학의 반증으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는데 굉장히 고급스럽게 말을 했지만 사실은 무지無知를 반증反證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라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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