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베어: 그리고 신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신학이 시작되었다 | 비아 제안들 시리즈  | 존 베어 그리고 신학이 시작되었다 | 비아 제안들 시리즈 | 존 베어 - 10점
존 베어 (지은이),김준철,민경찬 (옮긴이)비아

 

약어표
서문
1. 십자가를 통하여 - 그리스도와의 만남
2. 성경들을 탐구하다
3. 이를 위하여 우리는 창조되었다
4. 동정녀 어머니
5. 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라 
후기: 근대 이후 시대를 위한 근대 이전의 신앙 인물 색인 및 소개

 



11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면서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신학을 처음 배운 방식을 충실히 따르려 한다. 이 일은 보기만큼 단순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초기 증인들에게 되돌아가 보면 신학을 대하고 다루는 방식과 어휘, 그리고 성경을 읽는 태도를 다시 생각해 보라는 도전과 마주하게 된다. 동시에 급진적일 뿐 아니라 놀랄 만큼 대담해 보이는 전망도 만나게 된다. 그 폭과 생동감의 측면에서 이 전망은 오늘날 우리의 제한된 시야를 한참 뛰어 넘는다. 

13 제자들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이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수난, 십자가 처형과 부활이 일어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겉으로 보기에는 예외인 듯한 베드로의 고백(마태 16장)은 오히려 이를 분명히 드러내며, 요한복음서는 이 부분을 더 깊이 성찰한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수난을 전제하고 고려해야만 가능한 '해석'이다. 성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높임받으신 주님에 대한 '고백'이다. 주님의 죽음이 있고 나서, 그 죽음에 관한 설명에서 유래한 용어들로 그분의 탄생을 이해한 것이다 

17 이 책에서는 조심스럽게 '근대 이후의 방식'으로 다시 '근대 이전의 관점을 취한다. 이러한 시도는 최근 수백 년간 신학이 빠져 있던 진흙탕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할 것이다. 나아가 신학이라는 학문이 지닌 온전함과 통일성을 다시 음미하고, 신학이 제시하는 전망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자리로 인도할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면 여기서 제시하는 그리스도교 신학 이야기가 기존의 관행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보게 된 과정, 즉 십자가를 통해 수난을 해석하며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방식을 다루며 논의를 시작한다. 

130 교회를 핍박하던 시절, 바울은 교회가 선포하는 그 구세주가 자신에게 필요하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필립 3:6)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바울은 자신을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건져줄 구세주를 기다리지 않았다. 하다못해 제자들조차 당시에는 이스라엘에 왕국을 되찾아 줄 정치적 메시아를 바랐다(루가 24:21. 사도 1:6참조). 그러나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박해하던 바울 앞을 막아서셨다. 비로소 눈이 열렸을 때, 바울은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친히 움직이셨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온 세상에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해결책이 먼저 주어졌고, 그제야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장에서 살펴보았듯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학의 제1원리이자 근본 가설이다. 

294 십자가 처형도, 빈 무덤도, 심지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사건조차도 그 자체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이 아니다. 사도들의 지도자는 그리스도를 부인했고, 향유를 들고 간 여인들은 빈 무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엠마오로 가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성경대로" 수난을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자들은 빵을 떼어 나누는 자리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를 갖추었고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자마자 그분은 자취를 감추셨다. 이후 제자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이들은 늘 십자가의 그늘 아래 서 있다. 우리는 다가오실 그리스도를 향해 앞으로 나가면서, 이 세상에 공개적으로 또렷이 남은 상image인 십자가를 뒤돌아본다(빈 무덤은 극소수만 보았고 해석이 필요하다). "성경대로" 이해된 수난이야말로 성경을 읽어 내고 인간 존재 전체와 역사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며 만물을 새롭게 빚어내는 도화선이다. 이렇게 알게 된, 십자가에 달려 높임받으신 주님은 성경을 읽는 출발점이자 (이레네우스의 표현을 빌리면) 근본 가설이다. 

296 십자가에 달려 높임받은 그리스도라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에 초점을 맞추고 성경을 해석하며,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의 정체성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그분의 몸이 되고 말씀을 몸으로 드러내 마침내 한 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접근은 모든 도식이 갖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도표 2(291쪽)처럼 그릴 수 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를 헤아리는 이러한 성찰은 이후의 역사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성찰이 고유한 역사를 형성한 것이다. 이 전통에는 온갖 기념비(교부 문헌, 공의회 문헌, 전례 의식, 예술 작품)가 있으며 이들은 각기 다양한 맥락과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드러낸다. 

300 신학은 단순한 역사의 문제가 아니다. 곧 역사학에서 그럴듯하다며 내세우는 잣대와 기준에 맞춰 '실제로 그러했다'고 여겨지는 바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아니다. 신학은 그리스도의 수난 안에서, 수난을 통해 드러나고 인간 존재 전체로 뻗어나가는 하느님의 변혁하는 능력을 증언하는 일이다. 이러한 근대 이전의 신학 수행 방식으로 들어가려면 우리가 매달려 온 '근대의' 자의식을 벗어 던져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탈신화화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신앙은 애초에 신화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신학이 제 언어를 어떻게 익혀 왔는지 망각하고, 그 언어들을 억지로 근대의 틀에 밀어 넣으려 할 때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이런 접근법이 '역사'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오히려 나중에 일어난 일(수)을 외면한 채 '실제로 일어난 일만 기술하려 드는 그 어떤 근대적 역사학보다도 이 신학이 훨씬 더 진지하게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수난을 전혀 없었던 일로 여기면서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일이나 이스라엘의 역사, 창조를 두고 '실제로 일어난 일을 묘사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야말로 허구다. 과거는 결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역사는 현재의 시선에서 쓰인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변혁하는 능력을 증언한다. 수난하신 그분은 변함없이 오고 계신 분이며 당신 안에서, 당신을 통해 실재를 마주하도록 우리 모두를 초대하신다. 이 책이 줄곧 택한 접근은 근대 이전의 관점을 근대 이후의 방식으로 되살려 낸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근대 이후의 방식'이라는 말은 절대 진리absolute truth에 대한 모든 주장을 거부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근대'가 내세우는 진리의 잣대를 거부하거나 그 지배에서 벗어남으로써 신학이 진리에 대한 고백, 곧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당신 바깥의 어떠한 잣대에도 얽매이지 않으신다. 바로 그분이 모든 창조와 역사의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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