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 1

 

진리와 방법 1 |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2 |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 1 |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2 |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 10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지은이),이길우,이선관,임호일,한동원 (옮긴이)문학동네

서론
1부 예술경험에서 발굴하는 진리 문제
I. 미적 차원의 초월
1. 정신과학에서 인문주의 전통이 지니는 의미
2. 칸트의 비판을 통한 미학의 주관화
3. 다시 제기한 예술의 진리에 대한 물음
II. 예술작품의 존재론과 그 해석학적 의미
1. 놀이: 존재론적 설명의 실마리
2. 미학적·해석학적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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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269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진리 개념은 인식 개념과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참된 인식을 뜻하고, 진리는 인식의 진리를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인식이 참인가 아닌가라는 인식상의 진리에 관한 물음은 인식론의 중심 테마이다. 인식, 곧 참된 인식의 진리성은 어떻게 획득될 수 있는가? 이 문제의식은 특히 근대의 학문들에 의해 새로운 시대에 상응하는 학문성의 확립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진리의 발견, 획득을 위한 방법에 관한 성찰로 나타난다. 진리는 방법에 의해 획득되고, 확실하게 보장된다. 방법없는 진리란 생각할 수 없다. 이렇게 인식, 진리, 방법은 근대 이래 철학 및 학문들의 학문성을 규정하는 보편적 이념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은 일반인의 희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인식론적 문제의식에서 어떤 진리 이론을 새롭게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래의 인식론은 과학주의적·객관주의적 정신의 강한 영향을 받아 진리의 객관성이 방법론적으로 정초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가다머의 철학적 관심사는 과학주의, 객관주의의 방법적 이념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경험의 세계를 찾아서 거기서도 진리와 인식이 획득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의 현상, 즉 정신과학적 경험에 내재해 있는 진리와 인식을 말한다. 과학의 객관주의적 방법론의 보편적 요구는 이러한 진리 ·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차단시켰다. 따라서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은 학문 내지 과학의 방법론, 그리고 근대 이래의 과학과 기술에 의해 학문적 진리의 차원에서 추방된 정신과학적 경험에서의 진리 문제를 이해의 역사성을 통해 밝히려고 한다.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1960)이 출간되면서, 해석학은 1960년대 이후 독일 사상계에 중심적 논제로 등장한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cin und Zeit] (1927)이 출간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만큼 서로 다른 학문 영역에서, 예를 들어 철학, 문학, 문예비평, 예술, 역사학, 신학, 법학, 사회학, 정치학, 교육학 등에서 활발하고 성과 있는 토론을 불러일으킨 저작도 없을 것이다. 그의 철학적 해석학은 많은 토론과 논쟁ㅡ특히 하버마스Habermas, 아펠Apel, 베티 Betti, 리쾨르 Ricoeur, 데리다Derrida 등과의ㅡ을 불러일으켰다. 『진리와 방법』은 학문적으로 높이 평가되기도 하고, 어떤 테제의 경우에는 내용상 보완되어야 하거나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해석학 영역 내에서 아직 진리와 방법을 능가하는 단초들이 새롭게 개진된 것은 사실상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원래 가다머의 의도대로라면 책의 제목은 '진리와 방법'이 아니라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이어야 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해석학'이라는 용어가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아서 출판사 발행인은 이 제목을 좀 낯설게 여겼다. 가다머는 숙고 끝에 제목을 '진리와 방법'으로, 그리고 원래 생각했던 제목을 부제로 결정했다. 이 책의 형성에 관하여, 그는 “상이한 측면들로부터 착수된 연구들을 하나의 철학적 전체의 통일성을 갖도록 통합한 이론적 기획"이었다고 말한다. 이 상이한 영역의 연구란 예술, 역사 그리고 언어의 철학적 분석을 말한다. 「진리와 방법」은 이 세 영역에 대한 분석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예술 및 미학 영역의 문제점을, 2부는 역사내지 정신과학을 다루고, 3부에서는 언어가 주요 테마가 되고 있다. 

271 1부의 제목은 '예술경험에서 발굴하는 진리 문제'이다. 이 제목에서 우리는 1부의 주제가 마치 예술 혹은 예술경험인 것으로 기대하겠지만, 이것은 빗나간 기대이다. 물론 예술의 문제가 논의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선적인 문제는 예술이 아니다. 가다머의 주된 관심사는 정신과학의 자기이해를 철학적으로 올바르게 밝히는 데 있다. 즉 가다머는 드로이젠, 딜타이 등에 의해서 추구된 정신과학의 방법론적 자기성찰을 문제화하고, 거기에 은폐된 전제들을 드러냄으로써, 정신과학에서의 인식과 진리의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려고 한다. 따라서 정신과학의 방법론적 자기성찰에 관한 문제가 1부─어떤 의미에서는 이 저서 전체─의 출발점이 되며, 이 문제의식이 1부의 기조를 이룬다. 이 점에서 보면, 1부에서 다루어지는 예술 및 예술경험의 문제는 곧 정신과학적 인식 및 진리의 특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우회로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1830년대 이래 헤겔의 사변철학이 퇴조하고 그 자리에 자연과학의 학문적 발전과 성과를 배경으로 한 자연주의적· 과학주의적·실증주의적 정신이 군림하면서 지금까지 철학의 고유한 문제 영역이었던 인간 정신 및 그 세계가 자연의 산물 내지 부수 현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아래에서 딜타이는 주지하다시피 자연과학의 학문성에 따른 방법의 이념에 대항해서 정신과학의 학문성을 보장할 방법적 논리를 규명하려고 한다. 즉 딜타이는 정신과학의 학문적 기초를 논리적으로, 인식론적으로 확고하게 함으로써 자연과학에 대해 정신과학의 학문적 독립성을 정초하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시도에는 이미 수학적 자연과학의 학문적 이념이 그 이상적 모범으로 전제되어 있어 정신과학적 학문성의 독자적 이념이라는 것도 실은 다만 자연과학의 한 지류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19세기 말 이래 대두된 정신과학의 논리적·방법론적 자기성찰이 전적으로 자연과학의 방법적 이상에 지배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73 정신과학의 독특한 학문성은 근대 학문의 방법적 이념으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인 교양 개념의 전통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적 특성들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가다머에게 있어서 정신과학의 지반은 교양의 개념이며, 정신과학의 뿌리는 독일 고전주의의 정신을 이어받은 인문주의적 전통이다.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에서 전개하는 이론적 지반은 사실 인문주의적 전통이다. 그렇기에 그가 '정신과학에서 인문주의 전통이 지니는 의미'(1.1)를 상론하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 

인문주의 전통은 칸트 이전에,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연과학의 방법적 이념이 모든 학문성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등장하기 이전에 사실상 매우 생동적이었다고 한다. 헤겔 시대에 교양은 보편성으로의 고양을 의미하며, 교양의 본질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편적인 정신적 존재로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교양은 정신을 보편적인 것으로 부단히 향상시키는 역사적 과정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학문적 의식, 즉 학문을 수행하는 의식도 실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의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의식에 이미 방법적으로 습득할 수도 또 모방할 수도 없는 어떤 독특한 심리적·정신적 능력으로서의 감지력이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헬름홀츠의 경우 감지력은 단순히 자연적으로 갖춰진 소질이 아니라 교양을 전제하고 있다. 교양은 일종의 보편적 감각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보편성이란 물론 오성적 사유에 의해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보편성을 말한다. 자연적 감각들, 즉 우리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은 각기 특정한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교양인의 의식은 개개의 감각들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감지력은 교양인에게 갖춰진 일종의 보편적 감각이며, 이것은 오성적 사유에 앞서 일어나는, 감각의 직접성과 관계된 인식방식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가다머가 강조하려는 것은, 인문주의적 전통의 인식 개념은 자연과학적· 과학주의적·객관주의적 정신의 인식 개념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라는 점, 그리고 정신과학적 인식의 가능성은 교양을 전제로 한 감지력에서 모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감지력 외에 인문주의적 전통 및 정신과학적 인식방식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공통감각sensus communis이다. 공통감각은 공통성을 설립하는 감각이다. 이 감각은 방법에 의해 획득되는 '참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삶의 지혜와 같은 '참스러운 것'에 관계된다. 이 참스러운 것은 오성적·학문적 사유에 선행하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공통감각에 의해서 획득된다. 

283 근대 미학에서 놀이 개념은 놀이하는 사람의 태도나 마음의 상태, 즉 주관성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가다머는 놀이 개념에서 그 본질적인 것으로 존재론적 특성을 밝혀낸다. 그에 의하면, 놀이는 놀이하는 사람의 의식이나 주관적 태도에서 독립된 독특한 본질을 지닌다. 즉 놀이의 주체는 놀이하는 사람이 아니고, 놀이는 다만 놀이하는 사람을 통해서 표현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놀이의 주체가 놀이 그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놀이는 놀이하는 사람의 주관적 수행에 대해 우위에 선다. 놀이는 놀이하는 사람이 향유하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놀이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신에게로 끌어들임으로써 놀이 활동의 주체가 된다. 놀이의 이러한 특성은 '왕복 운동'에서 볼 수 있다. 놀이는 말하자면 운동이다. 운동은 어떤 목표에 도달하면 곧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항상 새롭게 시작한다는 데 그 특성이 있다. 이렇게 왕복 운동은 놀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누가 혹은 무엇이 운동을 수행하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놀이는 놀이하는 사람을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는 운동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놀이의 본질에 속한다. 달리 표현하면, 운동의 주체는 놀이하는 사람이 아니라 놀이 자체이다. 가다머는 언어학에서 말하는 중간태Medium의 예를 통해 놀이의 이러한 존재방식의 특성을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그리스어에서 중간태란 능동과 수동 사이의 중간 형식으로서, 독일어의 재귀 동사와 유사한 것을 의미한다. 중간태적 동사의 내용은 물론 주어의 능동적 활동을 어느 정도 허용하지만, 그러나 자신 안에 이미 스스로 생기하는 운동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놀이 활동 역시 중간태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가다머가 중간태적 의미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놀이 활동이 마치 주관성에 귀속되는 활동들 중의 하나인 것처럼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놀이의 존재방식은 이를테면 자연의 운동 형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의 운동은 어떤 목적이나 의도 없이 항상 새롭게 시작하는 놀이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가다머에 의하면, 놀이 운동이란 그 자체 어떠한 기체 또는 실체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놀이의 왕복 운동에 나타나는 것은 놀이 자체이며, 이 운동에는 어떠한 놀이하는 주체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놀이는 운동의 수행 그 자체이며, 운동의 주체이다. 이 말의 의미는, 놀이란 놀이하는 사람의 주관적 활동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왕복 운동으로 펼쳐지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놀이의 특성이 다름 아닌 생기이며, 이 놀이의 생기는 예술작품 자체의 존재방식에 그대로 적용된다. 마치 놀이 운동이 놀이하는 사람의 주관적 활동으로부터 이해될 수 없듯이, 예술작품 역시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의 주관적 반성으로부터는 올바르게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다머에게 예술작품은 그것을 경험하는 어떤 주체에 마주 선 단순한 대상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경험에서 "변하지 않고 지속하는 것은 예술을 경험하는 사람의 주관성이 아니라 예술작품 자체이다."(152쪽) 예술 및 예술작품의 본래적 존재는 이제 이러한 사실로부터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놀이 개념은 칸트 이래 전통적 미학에서 '예술의 입장'이 전제하는 '순수한 미'의 이념을 극복하는 데 그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곧 미학에서 천재의 무의식적 창조나 천재의 선험적 기능과 같은 이른바 주관성의 지배를 극복하는 것을 뜻한다. 그뿐 아니라 놀이 개념은 예술작품에서의 진리 문제, 나아가 진리 일반의 문제에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진리 문제에서도 중요한 것은 생기이기 때문이다. 

286 슐라이어마허에게서 중요한 것은, 한 작품이 지니는 원래의 목적 의도를 이해를 통해 재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예술 혹은 문학이란 그 자신이 원래 속해 있던 세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이해 및 재구성의 과제는 원래 있었던 것을 그대로 되찾는 데 있다. 즉 그 작품이 속해 있던 세계를 재생하는 일, 작가가 의도했던 원래의 상태를 되찾는 일, 희곡의 경우 원래의 양식으로 상연하는 일 등등의 역사적 재구성이 요구하는 것은 작품의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역사성에 비추어볼 때, 과거에 있었던 것의 재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심지어는 무력한 일인가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하여 헤겔은 전혀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전승된 작품들에 대한 역사적 태도(예컨대 재생, 복원 등)는 그 작품의 외면적인 것들(예컨대 언어, 역사적인 것 등으로 이것들은 사실상 이미 죽은 요소들이다)을 원용하기에 피상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과거의 역사적인 것을 보존한다거나 재생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러나 사유하는 정신의 경우 그 사정은 전혀 다르다. 역사 혹은 예술의 역사에 대한 정신의 참된 과제는, 정신 자신이 역사 속에 표현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외면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신의 역사적 자기침투'이며, 이것은 역사적 의식의 자기망각과는 정반대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역사적 태도란 과거적인 것을 표상하여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헤겔의 경우 과거에 대해 사유하는 정신의 태도는 과거적인 것을 사유를 통해 현재적인 삶과 매개함으로써 과거적인 것(=역사)과 현재를 사유로 통합하는 데 그 과제가 있다. 이 점에서 헤겔이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적 이념을 근본적으로 능가한다고 가다머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2부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슐라이어마허보다는 헤겔의 입장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과제임을 인식할 때, 해석학의 역사는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강조되어야 한다."(「진리와 방법 2」, 13쪽) 이렇게 가다머는 예술의 경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지평에서 출발하여 '해석학적 현상' 전반을 명료하게 하려고 시도한다. 이 시도는 2부와 3부에서 체계적으로 개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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