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폴킹혼: 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 책 밑줄긋기/읽은 책
- 2026.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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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 비아 시선들 | 존 폴킹혼 - ![]() 존 폴킹혼 (지은이),우종학 (옮긴이)비아 |
들어가며
1. 사실인가? 의견인가?
2.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3.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4. 우리는 누구인가?
5. 과학자도 기도할 수 있을까?
6. 그렇다면 기적은?
7. 종말은 어떻게 오는가?
8. 과학자가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32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갖는 일의 매력 중 하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의 다양한 면모들을 한데 엮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물리적 우주의 아름다운 구조 앞에서 과학자들은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이는 과학자들의 근본 경험이며, 과학 연구와 관련된 모든 고된 노동에 대한 대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눈으로 보면 그 경이로움은 실은 창조주의 정신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것으로,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은 창조의 기쁨을 나누는 것으로, 도덕적 직관은 선하고 완전한 하느님의 뜻을 감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이 어리석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유신론은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지적으로도 더 만족스럽습니다.
46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오래된 논증의 문제는 실은 과학적인 질문에 신학적인 대답을 하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적 질문(가령 포유류의 눈이 발달하는 과정에 관한 질문에는 과학적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종교가 과학인 척하고 도와주지 않아도 과학은 스스로 자신의 임무를 해낼 수 있습니다. 종교가 과학의 질문에도 답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 과학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현상을 설명한답시고 갑자기 창조주를 들고나오는 식의 시도와 같습니다. 이는 모든 빈틈을 하느님으로 메우려는 실수를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 속에서는 정작 하느님이 체셔의 고양이(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점점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지식이 진보함에 따라 이러한 사고는 폐기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직접적 행위만이 무생물로부터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와 같은 무모한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실제로 아직까지 과학은 어떻게 생명체가 발현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과학이 그것을 결코 알아 낼 수 없으리라고 가정할 이유도 없습니다.
60 무수히 많은 별로 이루어진 우주를 생각하면, 결국 우리 자신은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작은 한 점에 살고 있습니다. 외견상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누군가는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이 모든 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여기 앉아 그 별들을 생각하며 풀이 죽을 수도 없었을 테니 말이지요. '크기' 스위치를 조절해 우리가 사는 우주보다 훨씬 더 작은 우주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풀이 죽을 일도 없었을까요? 그랬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우리는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현대 우주론은 우주의 크기와 우주 역사의 시간적 길이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최소 우리가 지금 사는 우주 정도의 크기가 되어야만 탄소에 기반한 생명체가 진화하는 데 필요한 시간(140억 년)을 견딜 수 있습니다. 1세대 별들이 탄소를 만드는 데 100억 년이 필요하고 인간 존재와 같은 복잡한 형태들이 생성되는 데 40억년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은 결코 서두를 수 없습니다.
80 하나는 우주를 하느님의 인형극장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창조주께서 인형극을 하듯 일일이 줄을 잡아당겨서 그분이 조절하는 대로 모든 피조물이 춤을 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랑의 하느님이 그와 같은 우주의 폭군일 수는 없습니다. 한편 하느님은 그저 무심한 관객도 아닙니다. 그분은 우주를 잘 설계하고 난 뒤에는 우주가 저절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바른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주 역사는 변경이 불가한, 가차 없는 하느님의 계획이 펼쳐지는 장이 아닙니다. 진화하는 우주는 많은 부분을 스스로 구현합니다. 신학적으로는 창조주께서 그렇게 되도록 허용하셨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구현은 미세하게 조율된 가능성 안에서 일어납니다. 저는 하느님이 섭리 아래 우주의 역사와 상호작용한다고 믿습니다(이 마지막 논점은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즉, 창조란 이미 완성된 것의 시작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하느님은 140억 년 전 창조주셨듯 오늘도 창조주이십니다.
88 제가 그리스도교인이 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그리스도교가 가능한 가장 깊은 수준에서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은 자신이 만들어낸 이상한 세계가 겪는 고통을 측은하게 내려다보는, 동정심 많은 구경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창조주 하느님이 세계의 고통에 동참했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세계 바깥에서 고통을 측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직접 그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품고 있는 의미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은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로 참 인간의 삶을 사심으로써 우리와 운명을 공유하셨다고 믿습니다. 흥미진진하고도 엄청난 주장입니다. 하느님이 자신의 본성을 가장 쉽고 명백한 언어, 즉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심오하고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133 하느님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이 그렇게 열려 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사물이 어떻게 변해갈지 하느님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즉, 미래가 그저 과거를 재구성하여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열려 있는 것이라면 하느님도 세계를 시간과 함께 '형성되어 가는 곳으로 알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심지어 하느님조차 아직 형성되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이것이 하느님이 불완전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알아야 할 미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상이 이렇다면, 하느님은 영원이라는 속성을 가지면서도 반드시 시간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러한 결론은 사실 상당히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이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133 전통적인 관점에서 하느님은 모든 시간을 '한 번에', 전체 역사를 위에서 내려다보듯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압니다. 하느님의 시야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동시에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미래(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일어날 일)가 무시간적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펼쳐지는 것입니다.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지,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는 고정된 지점이 아닙니다. 물론 저는 하느님이 미래를 완전히 준비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자유로운 인격체들이 정확히 어떤 선택을 할지 혹은 자유로운 자연과정들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미리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165 영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정한 나'real me임에 틀림없습니다. 영혼은 분명 내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아닙니다. 몸은 늘 변합니다. 내 몸을 구성하는 원자 중에 몇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마모되는 모든 일은 우리 몸의 원자들이 끊임없이 교체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진정한 나'라는 것은, 그렇게 항상 변하는 원자들이 체계화되는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패턴pattern입니다. 이는 앞서 4장에서 과학적인 내용을 설명하며, 정보라는 개념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던 부분과도 겹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를 인간 영혼에 적용하려면 엄청나게 일반화를 시켜야 합니다. 경험이 쌓이고 나라는 사람의 특징(성격)이 형성되면서 나라는 패턴이 형성되고 또 자라납니다. '나'는 내 피부로 둘러싸인 몸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나를 하나의 인격체가 되도록 하는 주요 관계들도 '나'에 포함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다 정확하게 구성해 내는 것은 현재 우리의 능력을 넘어섭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나(나라는 패턴)를 기억하고, 마지막에 부활이라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세계(하느님이 선택한 새로운 환경)에서 나를 재창조하시리라는 기대는 이해할 만한, 일관성이 있는 희망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음 너머의 운명을 믿으며, 생존이 아닌 부활에 항상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부활을 역사 속에서 미리 맛보게 하며 역사 너머에서 일어날 부활을 보장합니다.
168 새로운 세계가 그처럼 경이롭다면, 왜 하느님은 옛 세계(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만드셨을까요? 새 하늘과 새 땅이 고통과 죽음 슬픔에서 자유로운 세계라면, 애초에 하느님은 왜 이처럼 수많은 고통이 있는 이 세계를 창조한 것입니까? 이 진지한 질문은 답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는 1차전에서 만든 옛 세계에서 행한 것들을 개선하려는 2차전이 아닙니다. 우선 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이 세계는 자기 자신이 되도록 허락받은 세계입니다. 앞서 신학적으로 이 세계, 우주의 진화에서 자율성이 허락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세계에는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생명의 필수 불가결한 대가입니다. 세계에 자율성이 있다면 그런 세계에서는, 세계가 생산성이 풍부한 역사를 구성하려 여러 가능성을 탐험하는 과정에서 불완전한 부분이 생겨나고 막다른 길을 만나기도 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하게 하는 바로 그 과정이 암세포를 만드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새 창조는 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이는 새 창조가 옛 창조와는 다른 식으로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169 새로운 세계에서 피조물은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주의 생명과 자유롭게 연합됩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렇게 이해합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특히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과 연합한다고 믿지만, 새로운 세계에서는 어디에서나 그분과 자유롭게 연합한다고 믿습니다. 새 창조는 지나간 과거를 원상복구하는 두 번째 시도가 아닙니다. 새 창조는 옛 것을 구원하고 변모시키는 창조입니다. 예수가 성금요일을 거치지 않고 부활절에 이르지 못했듯 창조도 현재의 고통이라는 계곡을 통하지 않고는 성사적 운명sacramental destiny에 이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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