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피에르 모리: 갈릴레오 - 불경한 천문학자의 이야기 |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95

 

갈릴레오 - 불경한 천문학자의 이야기 갈릴레오 - 불경한 천문학자의 이야기 - 10점
장 피에르 모리 (지은이), 변지현 (옮긴이) | 시공사

제1장 호기심 많은 교수
제2장 코페르니쿠스주의자 갈릴레오
제3장 하늘의 소식
제4장 베네치아에서 피렌체로
제5장 거듭되는 승리
제6장 함정
제7장 그래도 지구는 돈다

기록과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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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망원경은 이미 5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안경 상인이 제작해 전파하던 망원경은 1608년에는 파리에도 전해졌다. 그러나 렌즈 두 개로 시력을 교정하도록 만들어진 이 안경은 장난감으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물체가 확대되어 보이기는 해도 두세 배 정도밖에 안 되었거니와 희미한 데다 찌그러지기까지 했으므로 대중의 관심은 급속히 시들고 말았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은 어떠했을까? 망원경 소식을 모를 리 없던 프랑스나 프랑스의 과학자들은 어떻게 그것이 경탄할 만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 대답은 충격적이다. 그들은 광학 기구란 어떠한 것이든 간에 결코 아무런 이득도 가져오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해를 준다고 생각했다. 진리와 관계없는 환상이나 환영을 보게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갈릴레오는 그 원리에 대해 어렴풋한 설명을 듣자마자, 직접 망원경 제작에 몰두했다. 그는 동료들과 같은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물리적 법칙을 발견하고 검증하는 첫째 수단은 무엇보다 경험이었으며, 그 자신 기술 분야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병기창에서 기계들을 관찰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몇 년 전부터 물리학적 원리와 수학적 원리를 이용한 도구들을 고안하고 제작했다. 중요한 것으로는 온갖 계산과 작도를 도와주는 "기하와 군사용 컴퍼스"가 있다. 

또한 그는 망원경으로 돈을 벌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돈이 필요했다. 그의 교수 봉급은 대학의 의학 교수의 봉급에 비해 열 배나 적은 매우 빈약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고 막내는 곧 세 살이 될 터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토스카나에 살고 있는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예를 들어 그는 그보다 나이가 많이 어린 여동생들에게도 지참금을 주어야 했다. 그가 지참금을 주지 않으면 동생들은 결혼을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리하여 갈릴레오는 부유한 학생들, 특히 귀족 가문의 외국 학생들에게 개인 교습을 했다. 그 학생들은 대부분 하인을 데리고 그의 집에 기거했다. 거기다가 기하용 컴퍼스를 만드는 노동자 마르크 앙투안, 갈릴레오의 가족, 그의 학생들을 위한 텍스트를 베끼는 비서, 하인 몇을 덧붙이면 파두아에 있는 그의 집을 지배하던 소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대학에서 공식 강의를 해야 했는데, 당시 갈릴레오가 가르치던 과목에는 교과서가 없었으므로 모든 내용을 스스로 작성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17년 동안 수많은 경험을 했고 특히 역학 분야에서 중요한 법칙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발견을 정리하고 책으로 낼 시간이 전혀 없었다. 그가 그때까지 출판한 것은 고작해야 기하용 컴퍼스의 사용법을 설명한 소책자가 전부였다. 그는 친구들에게 사색할 시간마저 없다고 푸념을 했다. 

만약에 망원경이 충분한 수입을 가져와 개인 교습을 줄일 수만 있다면, 사색을 하고 책을 쓸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가 망원경을 만든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망원경이 주는 하늘을 볼 수 있는 자유였다. 17세기 초 과학자들은 커다란 논쟁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2000년 전부터 강요되어온 낡은 사상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36 1609년 당시 갈릴레오는 적어도 20년 전부터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이 점에 대해 공개적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학생들에게도 대학의 방침에 맞추어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낡은 천문학을 가르쳤다. 

그는 왜 이토록 신중한 태도를 취했을까?

첫째로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은 프톨레마이오스와 모순될 뿐 아니라 성서에도 모순되기 때문에, 공개적인 지지에는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 성서에 따를 때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으며 태양은 지구의 주위를 돌아야 했다. 교회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공식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1600년 조르다노 브루노가 로마에서 화형을 당한 것은 그의 학설을 지지한 데에 부분적인 이유가 있었다. 9년 전의 일이었으므로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교회는 브루노에게 다른 불만도 품고 있었으며,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공개적으로 변호한다 해서 화형을 당할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종교재판소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며 모든 동료들과 무자비한 전투를 벌여야 할 것이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공격한 그에게 이미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갈릴레오가 겁쟁이라거나 격론의 장에 나서는 일을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다. 그 후의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해 준다. 단, 그는 싸워야 한다면 견고한 사실에 바탕을 두기를 원했다. 그에게 진실로 견고한 유일한 것은 경험이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옳다는 많은 검토와 논증과 반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초등학생의 연습"이라 표현한 것처럼 그는 아직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학설을 인정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탄약이 필요했다. 그 탄약은 경험이 입증해 줄 결과였다. 

그는 망원경이 증거를 제시해 주기를 바라면서 곧장 망원경 제작에 착수했다. 다행히 곧 여름방학이 시작될 참이었다. 갈릴레오는 보통 여름이면 피렌체에 가서 토스카나의 젊은 영주인 메디치가의 코시모에게 교습을 했다. 그러나 올해는 그의 부친이 별세한 터라 코시모가 대공의 자리에 올랐고 수업을 듣지 않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몰두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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