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바알: 축구의 역사 |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96

 

축구의 역사 축구의 역사 - 10점
알프레드 바알 (지은이), 지현 (옮긴이) | 시공사

제1장 근대 축구의 요람
제2장 세계 정복에 나서다
제3장 근대 축구를 향하여
제4장 스포츠 외적인 목적
제5장 근대 축구의 모순

기록과 증언
참고문헌
그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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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9세기까지 브르타뉴와 피카르디 지방에서 성행하던 이 경기는 공업화 이전에 농촌 사회에서 행해지던 공동체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아직 명백히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이 경기가 가톨릭 교구와 관련된 종교적 성격을 지닌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경기에는 인접 마을의 젊은이들이나 같은 행정구의 젊은 기혼자들과 독신자들이 참여했다. 경기에 열중하는 귀족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앙리 2세가 롱사르를 경기에 끌어들일 정도였다. 양 진영은 밀기울이나 건초를 채운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공인 술을 적진에 옮겨놓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조직이라고 할 것은 없었고, 기록으로 정리된 규칙조차 존재하지 않아 경기 진행은 오로지 전통에 따랐다. 참가자 수, 경기 시간, 경기장 규격이 정해지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모든 신체적 수단들을 동원하여 선수들은 술을 향해 돌진했고, 또한 그것을 적진에 옮겨다 놓기 위해 손과 발을 번갈아 사용하며 경기에 임했다. 선수들 간의 역할 구분이라 할 것은 전혀 없었고, 중요한 것은 힘과 정열뿐이었다. 중세의 전장터처럼 엎치락뒤치락 밀고 밀리거나 뛰고 달리다 마침내 어느 한 팀이 일정한 장소에 술을 내려놓으면 경기는 끝이 났다. 당국이 금지령을 내리곤 했다는 사실은 이 놀이가 얼마만큼 격렬한 것이었는지 증언해 준다. 경기를 치르다가 잘못해서 절름발이가 되는 이들도 있었고 때로는 죽는 이들도 있었다. 

13 중세 영국에도 대중이 즐겨 하던 공놀이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이렇게 소리친다. "너, 이 추잡한 공 차는 놈(footballer)!" 영국 남서 지방의 한 주인 콘월에서는 헐링(hurling)이 행해졌다. 헐링은 상대편 골에 공을 내려놓기 위해 때로는 산으로 골짜기로 격렬한 달리기를 벌이고 때로는 강물을 건너기도 해야 하는 경기였다. 점차로 이런 유형의 놀이에도 원시적인 형태로나마 전술이 도입되었고, 선수들 간의 역할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각 팀의 양 측면에는 혼전을 뚫고 나갈 주자들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공을 빼앗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 볼로냐와 피렌체에서는 공을 발로 모는 경기인 "퀴코 델 칼치오(quico del calcio)"가 행해졌다. 사육제의 마지막 날이나 부활절에 행해지던 칼치오는 뚜렷한 경계가 정해진 한정된 공간 내부에서 진행되는 한결 세련된 경기였다. 물론 칼치오 선수들은 손으로 공을 잡을 수 있었으나, 단순한 형태로나마 역할의 분배와 집단 경기의 초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칼치오는 근대 축구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대륙에서도 구기를 즐겼다. 한국이나 아메리카 인디언이 그 예이다. 

15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전통적 공동체들의 단결을 확고히 지탱해 주던 유대 관계들이 점차 느슨해지면서 새로운 사회 관계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새로운 관계들은 옛 구기를 포용하지 않았고 그 결과 구기는 전반적으로 쇠퇴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구기가 명맥을 유지했는데 이는 사립 중고등학교(public school)에 다니던 유복한 계층의 학생들이 구기를 선호한 덕분이었다. 학생들은 나름대로의 체계를 지닌 여가 활동으로 구기를 정비했다. 한편 학부모들은 이런 격렬한 경기가 지니는 교육적 가치를 인정했고, 상급생들은 사회적으로 그다지 존중받지 못하던 교사들의 권위 부재를 이용하여 신입생들과 열등생들을 지배하기 위한 체벌 수단으로 구기를 이용했다. 

초기인 1830년경까지 구기는 그 최초의 특성을 사립 중고등학교들 내부에서 보전했다. 일정한 형태가 없는 산만한 조직, 문서로 기록되지 않은 채 변화, 발전하던 규칙들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기. 학교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관례를 고수했다. 여전히 경기장 규격, 경기 시간, 참가 선수 수에 관한 규칙들은 마련되지 않았다. 경기에서 맡아야 할 역할들은 정해져 있지 않았고 경기의 제한 사항 또한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힘과 의욕이었다. 어찌 보면 공동체의 역할이란 개인의 개성과 특성을 감춰두는 데 있다. 

16 영국의 산업화에 영향을 받아 1830년부터, 사립 중고등학교들 내부에 다양한 변화가 잇달았는데 여기에는 구기 진행 방식의 결정적인 변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정되어 있던 사회는 부르주아의 세력 증대로 동요를 겪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학교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학교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그 결과 교사들의 권위는 제자리를 찾았고 학생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지배 방식은 사라지게 되었다. 비로소 신입생 길들이기는 사라져갔고 학생들 간의 관계는 교칙에 따라 체계화되었다. 이제 학교에 평화가 깃들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1828년부터 1840년까지 럭비 사립학교의 교장을 역임한 토머스 아놀드는 조심스레 이러한 개혁을 실천에 옮겼다. 
 
이처럼 긴장이 완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기록된 정확한 규칙에 따르는 경기, 인격을 도야할 수 있는 자제력을 포함하는 보다 덜 격렬한 경기가 출현했다. 하지만 두 형태(축구 association football의 초기 형태인 드리블링 게임 dribbling game과 럭비 rugby football)로 나타난 근대 축구의 탄생을 실제로 주재한 것은 아놀드 이후 세대의 사립학교 교장들이었다. 새로운 면모를 지닌 경기는 공 크기의 규격화, 경기장 범위의 확정, 선수 수와 경기 시간의 확정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후 개인적인 역할과 자제력이 더욱더 중시되었고, 난폭함보다는 동작의 민첩성이 더 높은 가치로 평가되었다. 

17 1815년경, 사립 중고등학교들은 경기의 규칙을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해 이제까지 정리된 규칙을 명문화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이튼과 해로 같은 유서 깊은 유명한 학교들은 정강이를 발로 걷어차거나 공을 손으로 만지지 못하게 하는 따위 규칙을 채택했는데 이것이 드리블링 게임이다. 1863년, 이튼, 웨스트민스터, 해로 같은 남부 클럽들의 소수 대표들이 런던의 프리메이슨스 태번에 모였다. 이들은 시합을 활성화하기 위해 현행의 다양한 규칙을 조정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케임브리지의 규칙들을 채택하기로 결정했고, 아울러 일종의 연맹인 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 F.A.)를 창설했다. 회합에 참여했던 럭비 사립학교의 대표는 그러한 결정에 따르지 않았고, 손을 사용하는 경기를 계속하고자 했다. 1871년, 이러한 경기 방식을 옹호하는 이들이 회합을 가졌고, 럭비 풋볼 연합(Rugby Football Union)을 창설했다. 이렇게 하여 축구와 럭비는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 1850년대 말, 셰필드의 한 클럽을 중심으로 경기 규칙들이 다소 다른 또 하나의 연맹이 탄생했다. 1877년, 셰필드는 F.A.와 보조를 함께하게 되었다. 1871년, 컵(Cup), 다시 말해 영국 컵의 창설이 경기 규칙의 통일에 많은 기여를 했다. 컵은 일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은 여러 경기들을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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