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승: 마을로 간 한국전쟁


마을로 간 한국전쟁 - 10점
박찬승 지음/돌베개



책머리에 


총론 마을에서 바라본 한국전쟁 

1 친족 간 학살의 비극, 진도 동족마을 X리 

2 ‘영암의 모스크바’, 한 양반마을의 시련 

3 양반마을과 평민마을의 충돌, 부여군의 두 동족마을 

4 땅과 종교를 둘러싼 충돌, 당진군 합덕면 사람들 

5 두 명문 양반가의 충돌, 금산군 부리면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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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한국전쟁은 20세기 한국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이었다. 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고, 삶의 기반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 남과 북은 서로를 '공존할 수 없는 적'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지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남과 북이 서로 화해와 공존의 길로 순탄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전쟁'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26 양반과 평민의 관계도 그러했다. 일제강점기 내내 농촌 사회에는 신분제의 유제가 남아 있었다. 신분제의 유제를 강력히 지탱한 것은 지주-소작제라는 토지 소유 관계였다. 대부분의 평민 소작인들은 경제적으로 양반 지주에 예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양반과 평민 간의 신분제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농촌 사회에서도 신분제의 강고한 틀은 서서히 깨져나가고 있었다.

 

46 한국의 농촌 마을은 오랜 세월 동안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왔다. 대부분의 마을이 최소한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특히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공동체적 성격은 그만큼 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마을 공동체도 완전히 고립된 우주는 아니었다. 이웃한 마을들과의 관계가 있었고, 군현이라고 하는 국가기관과의 관계도 있었다. 각 마을 간에는 신분에 따라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었고, 그러한 위계질서에 따라 마을 간의 관계가 설정되었다. 그러고 군현의 기관과는 주로 조세 수취를 매개로 관계가 설정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국가권력의 마을에 대한 개입은 조세 수취의 공동납부를 강제하는 수준이었지만 마을 내부의 문제까지 국가권력이 개입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각 마을은 그 나름의 성격에 따라 각각 질서와 규율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주로 신분제와 지주제, 그리고 친족관계 등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을 공동체의 전통적인 질서와 규율은 20세기 들어 신분제의 이완과 함께 점차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1920~1930년대 들어 신교육이 농촌 사회까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신분의식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마을 내의 위계질서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49 한국전쟁은 남북의 국가권력이 각 마을 공동체에 깊숙이 개입해 들어와 공동체를 사실상 해체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 남북의 국가권력은 왜 이와 같이 마을 공동체에 깊숙이 개입한 것일까. 그것은 다음의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남북의 국가권력은 정부 수립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리고 전쟁 상황에서 각각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충성서약을 최말단의 마을 주민들에게까지 요구함으로써 국가의 권력기반을 굳히려 했다는 점이다.

둘째, 남북 정권은 전쟁을 치르면서 최대한의 인적·물적 자원의 동원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정의 말단인 마을과 그 주민들을 확실히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남쪽이나 북쪽 모두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적 자원의 동원이 절실했다.

셋째, 남북 정권은 전쟁 과정, 그리고 전쟁 이후를 대비하여 치안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51 물론 그 불씨가 된 것은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었다. 그리고 인민군 치하에서 인민재판에 의한 처형이 시작되면서 민간인의 학살 개입이 시작되었다. 인민군 철수 시에 빚어진 대량 학살은 북쪽의 국가권력이 지시한 것으로, 여기에는 민간인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그리고 다시 국군과 경찰이 들어오면서 이번에는 남쪽 국가권력의 묵인 하에 민간인들이 개입된 학살이 진행되었다. 이처럼 민간인들의 대량 학살에는 구체적인 지시든 아니면 묵인이든 국가권력의 개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국가권력의 개입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대규모 민간인 학살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간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학살은 사실상 국가권력의 조장에 의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남북의 국가권력의 조장에 의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남북의 국가권력은 자신의 권력을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하여 민간인 학살을 서로 이용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56 한국전쟁기에 마을에서 벌어진 여러 학살 사례와 그 배경에 있는 구조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그 갈등구조는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매우 복합적인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과거의 양반-평민간의 신분 갈등, 지주와 소작인(혹은 머슴) 간의 계급 갈등, 친족 내부의 갈등, 마을 간의 갈등, 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 간의 종교 혹은 이념 갈등 등이 '복합적 갈등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복합적 갈등구조' 가운데 어떤 갈등이 더 심각했는가는 마을에 따라 각기 달랐으며, 그에따라 한국전쟁기 마을 안팎의 충돌 양상도 각기 달랐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한국전쟁기의 민간 차원에서의 충돌을 주로 지주-소작인 간의 계급 갈등, 혹은 이념 충돌에서 빚어진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많은 사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친족, 마을, 신분 간의 갈등이 더 중요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60 이제 한국전쟁 연구는 마을 차원으로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구술 증언에 주로 의지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앞으로 이 연구가 얼마나 더 진행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80세 이상의 고령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나라도 더 많은 사례 연구, 한 단계 더 진전된 연구가 학계에 보고되기를 기대한다. 필자는 한국전쟁은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한국전쟁 연구는 당시의 한국 사회,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식민지시대, 조선시대의 사회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창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마을에서의 한국전쟁 연구는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좀더 많은 연구자들이 이 연구에 참여하기를 기대하면서 총론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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