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자키 준이치로: 만(卍),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반양장) - 10점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이호철 옮김/문학동네


만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해설|다니자키 문학, 내밀한 탐미의 결정체 

다니자키 준이치로 연보





33 "자, 이제 됐죠? 나 옷 입을게" 하는 걸 "싫어, 싫어. 더 보여줘"라며 저는 어리광 부리듯 고개를 흔들면서 졸랐어요. "아유, 웃겨. 이렇게 계속 발가벗고 있으면 어쩌라고." "어쩌기는, 아직 진짜 발가벗은 게 아니잖아. 이 하얀 것만 벗겨버리면!" 그렇게 말하고 제가 갑자기 어깨에 걸친 시트를 붙잡자 미스코 씨는 "하지마 하지마!" 소리치면서 기를 쓰고 안 뺏기려고 했는데, 그러다가 시트가 쭉 찢어져버렸어요. 저는 욱해서 분한 눈물을 가득 머금고 "그럼, 다 필요 없어. 미쓰코 씨가 그렇게 남 대하듯 나를 대할 줄은 몰랐어. 이제 됐어. 이제 오늘 부로 친구도 뭣도 아니야" 하고 말한 뒤 찢어진 시트를 이로 갈기갈기 찢었어요. "왜 이래, 미쳤어?" "나는 미쓰코 씨같이 박정한 사람은 몰라. 지난번에는 이제 서로 숨기는 일이 절대 없기로 약속했잖아? 이 거짓말쟁이!"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저는 그때 일을 기억 못하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미쓰코 씨를 노려보는 얼굴이 진짜로 미친 것 같았대요. 미쓰코 씨는 저를 물끄러미 보면서 떨고 있었는데, 아까까지의 고귀한 관음보살 포즈는 무너지고 부끄러운 듯이 양쪽 어깨를 가리고 한쪽 발을 다른 발 위에 겹쳐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선 모습이 가엾고도 아름답게 보였어요. 조금 안됐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찢어진 시트 사이로 소복하게 올라온 하얀 어깨를 보자 한층 더 잔인하게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어져서 정신 없이 덤벼들어 거칠게 시트를 벗겼어요. 진지한 제 모습에 미쓰코 씨도 압도 당했는지 아무 말없이 제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더군요. 우리는 그저 서로 미워죽겠다는 듯 상대방 얼굴을 무섭게 노려보았어요. 저는 드디어 뜻대로 됐다는 냉랭하고도 심술궂은 승리의 미소를 입가에 띠고 미쓰코 씨가 두른 시트를 조금씩 풀어갔어요. 점차 신성한 처녀의 조각상이 나타나자 승리감은 어느 틈에 경탄의 소리로 바뀌어갔어요. "아, 미워. 이렇게 예쁜 몸매를 하고 있다니! 차라리 죽여버리고 싶어." 저는 그렇게 말하고 한쪽 손으로 미쓰코 씨의 떨리는 손목을 꽉 쥔 채 다른 손으로는 얼굴을 끌어당겨 제 입술을 갖다 댔어요. 그러자 미쓰코 씨도 "죽여줘, 죽여줘. 차라리 당신 손에 죽고 싶어"라며 광기 어린 목소리를 내더니, 뜨거운 숨결로 제 얼굴을 덮었어요. 미쓰코 씨 볼에 눈물이 흐르는 게 보였어요. 우리 둘은 서로 끌어안고 누구의 눈물인지 모를 눈물을 삼켰어요.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316 생각건대, 옛날에 나이 든 아버지 대납언이 부정관이라는 걸 닦고 있었을 때 어머니의 환영이 모독됨을 한탄하며 아버지를 원망했던 시게모토는, 40년 동안이나 어머니와 단절되어 지내면서 어스름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던 모습을 이상적으로만 꾸려서 가슴 깊숙이 숨겨왔을 것이다. 시게모토는 언제까지나 그 어머니를, 어릴 때 보았던 모습으로만 사모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4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갖가지 세상 변화를 겪고 나서 아예 사람이 사는 세상을 버린 채 부처님의 길로 들어선 현재의 어머니는, 과연 어떤 모습이 되어 있는 걸까. 시게모토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스물 한두 살 적 머리칼이 길고 두 볼이 탐스러웠던 귀인이었는데, 니시사카모토의 암자에 은거하고 있는 비구니인 어머니는 이미 예순을 넘긴 늙은 휘파람새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시게모토의 마음은, 그런 냉정한 현실을 바라보기를 조금 머뭇거렸던 게 아니었을까. 그는 영원히 옛날 어머니의 모습을 부여안고 그때 들었던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콤한 향내, 팔뚝을 스치고 지나던 붓끝의 감촉, 그러한 여러 가지 기억을 그리워하며 사는 편이 적나라한 환멸의 쓴 잔을 드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시게모토 자신이 특별한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어머니가 비구니가 된 후로도 몇 년의 세월이 무심하게 지난 데에는 어쩌면 위와 같은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필자는 추측한다.


324 "저어... 당신은 돌아가신 중납언님의 어머님이 아니십니까?"

시게모토는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세간에 살 때는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만.... 당신은...."

"저는... 저는..... 돌아가신 대납언의 남겨진 아들, 시게모토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치 한꺼번에 둑이 무너지듯 소리쳤다.

"어머니!"

비구니는 큰 숲에 있던 사내가 갑자기 달려들어 엉겨 붙듯 하자, 비틀거리면서 겨우 근처 바위 위에 앉았다.

"어머니."

시게모토는 다시 한 번 불렀다. 그는 맨땅에 꿇어앉아, 아래에서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그녀의 무릎에 온몸을 내맡기듯 기댔다. 하얀 모자 속에 파묻힌 어머니의 얼굴은, 꽃 무더기를 뚫고 내리비치는 달빛을 받아 뿌옇게 보였지만 여전히 귀엽고 자그마했으며 마치 원광을 뒤에 달고 있는 듯했다. 40년 전의 어느 봄날, 휘장 그늘 속에서 그 품에 안겼을 적의 기억이 금세 영롱하게 되살아나고, 한 순간에 시게모토는 예닐곱 살의 어린아이가 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어머니 손에 들린 황매화 가지를 거칠게 젖혀내면서 자신의 얼굴을 어머니 얼굴 쪽으로 더욱더 디밀었다. 어머니의 검정 소매에 스민 향내가 문득 먼 옛날의 잔향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마치 응석이라도 부리듯 어머니 소매에 얼굴을 문지르면서 눈물을 마음껏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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