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엘리스: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3. 7. 10.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 - 존 엘리스 지음, 정병선 옮김/마티 |
글머리 문명 한복판의 사막‥‥‥‥‥‥‥‥‥7
1부 땅 속의 일상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 ‥‥‥‥‥‥‥‥‥13
세상에서 점점 멀어져 ‥‥‥‥‥‥‥‥‥‥37
제발 전투 중에 죽을 수 있기를 ‥‥‥‥‥‥59
참호 밖으로 머리를 내밀지 마라 ‥‥‥‥‥82
2부 전투의 실상
한밤의 외출 ‥‥‥‥‥‥‥‥‥‥‥‥‥‥99
기계 시대의 ‘돌격 앞으로’ ‥‥‥‥‥‥‥111
돌격 속에 와해된 자아 ‥‥‥‥‥‥‥‥‥123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146
3부 고향에서 온 편지
덜 먹고 배설량도 줄이자 ‥‥‥‥‥‥‥‥185
살아 있다는 달콤한 만족감 ‥‥‥‥‥‥‥208
4부 금지된 우정
크리스마스가 선물한 평화 ‥‥‥‥‥‥‥237
땅 속보다 깊은 환멸 ‥‥‥‥‥‥‥‥‥‥253
전쟁의 끝 ‥‥‥‥‥‥‥‥‥‥‥‥‥‥‥273
참고 문헌 ‥‥‥‥‥‥‥‥‥‥‥‥‥‥‥297
옮긴이의 말 ‥‥‥‥‥‥‥‥‥‥‥‥‥‥299
13 전쟁 초기부터 양측의 군대는 적의 화력에 맞서 일종의 엄폐물을 확보하기 위해 수시로 땅을 파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이 퍼올린 최초의 토루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간이호와 유사한, 임시로 얕게 판 움푹한 땅에 불과했고 그것들은 전진에 앞서 기껏해야 24시간 동안 최소의 보호책만을 제공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마른 전투 이후 퇴각하던 독일군이 엔강에 이르렀을 때, 폰 팔켄하인 장군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부대가 점령 중이던 프랑스와 벨기에의 해당 지역을 사수해야만 한다고 결정했다. 그는 독일군이 연합군, 특히 프랑스군의 어떤 공격도 침착하게 격퇴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반면에 프랑스군은 침략자로부터 조국을 해방시켜야만 했고, 이를 위해 견교하게 구축된 독일군의 방어 진지를 앞장서서 공격했다. 결국, 독일군은 단지 자신들이 머무르던 곳을 지키기 위해서 땅을 팠다. 이 전선을 돌파할 수 없음을 이내 인식한 연합군도 마찬가지로 반영구적인 토루 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최후의 결정적 돌파 작전을 개시하기 위한 출발선 이상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연합군 측의 가장 둔감한 지휘관조차도 자신들이 몇 달씩 현 위치에 머무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눈치채기 시작했다.
참호전은 흔히 1914년 9월에 시작된 걸로 본다. 독일 제7예비군단이 슈멩데단 고지에서 방향을 돌려 영국 제1군단의 전진을 차단한 것이 바로 이때이다. 이곳의 교착 상태가 불과 수 주 만에 전체 전투 구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전선이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이어진 것이다. 전체 760킬로미터에 이를 정도로 전선이 길었으므로, 지형과 지세도 상당히 다양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벨기에와 솜 이북까지의 프랑스는 영국군이 담당했는데 이곳은 모든 전선 가운데서도 최악의 지세였다. 영국군의 참호 상태는 악몽과도 같았다.
89 "나는 이것이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입심 좋게 떠벌이는 사람들과 전쟁이 얼마를 더 끌든지 또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웅변가들이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겨자 가스에 노출된 병사들을 위문하러 왔으면 좋겠다. 그 가엾은 병사들은 온몸에 화상을 입었고, 겨자 색깔로 곪아터진 물집투성이다. 눈은 멀었고 진물투성이에 보는 것만도 끔찍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숨을 쉬기 위해 분투한다.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말을 하면 목구멍이 막혀서 질식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294 그러나 사람들이 이 열정적인 형제애에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고, 또 얼마나 고양되었든 간에 참호전은 비할 바 없는 잔인함과 고통의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무수한 영웅을 탄생시켰고, 그 속에서 사랑과 자기 희생이 발휘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문학은 사랑과 동정과 용기와 인내심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서부 전선이 타락, 쇠퇴, 소음, 유혈, 죽음으로 점철된 미증유의 악몽이었음도 주장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병사들의 죽음은 헛되이 될 것이다. 병사들은, 이유를 알지도 못한 채 별로 믿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 싸웠다. 전쟁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보답하지 않았다.
295 죽어간 사람들을 분명히 애도해야 한다. 그러나 포격 속에서 흐느꼈던 병사들, 포탄 충격으로 정신 병동에 수용되어 영문 모를 말을 지껄여댔던 병사들, 진흙 수렁에 빠져 죽은 병사들, 찢어진 몸통 밖으로 쏟아진 내장을 그저 붙들고 있던 병사들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무용성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신원을 확인해부는 모든 단서를 제거하고 돌격전에 나서는 군인의 모습이다.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적과 맞붙어 싸우기 위해 완전한 암흑 속으로 걸어나간다. 그 무명의 병사는 마찬가지로 익명의 상대를 죽이기 위해 앞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무명 용사의 정수인 '영웅들의 안식처'와 관련한 그 모든 미사여구의 최종 결과이다.
'영국의 한 고위 장교'가 눈을 가린 채, 여러 돌출부에서 후송된 여섯 구의 유해가 안치된 어떤 오두막으로 인도되었다. 그가 손으로 이리저리 더듬다가 만진 최초의 관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옮겨져 성대한 군사적 의례 속에서 매장되었다. 우리는 그 장군이 이제 자신의 눈가리개를 풀기 바란다.
'책 밑줄긋기 > 책 2012-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카다 히데히로: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 ━ 중국사 연구를 위한 입문 (0) | 2013.08.12 |
---|---|
하영선: 역사 속의 젊은 그들 (0) | 2013.07.31 |
데이비드 하비: 파리, 모더니티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의 개정판) (0) | 2013.07.17 |
마이클 루: 형이상학 강의 (0) | 2013.07.17 |
칸트: 판단력 비판 (0) | 2013.07.02 |
다니자키 준이치로: 만(卍),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0) | 2013.07.02 |
수요역사연구회: 곁에 두는 세계사 (0) | 2013.06.25 |
보르헤스: 칠일밤 (0) | 2013.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