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히데히로: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 ━ 중국사 연구를 위한 입문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 - 10점
오카다 히데히로 지음, 강유원.임경준 옮김/이론과실천

서장 - 중국인의 역사과 - 만들어진 '정통'과 '중화사상'

 

1장 사마천의 『사기』- 역사의 창조
2장 반고의 『한서』- 단대사의 출현
3장 진수의 『삼국지』 - '정통'의 분열
4장 사마광의 『자치통감』- 중화사상의 억지
5장 송렴 등의 『원사』- 진실을 은폐하는 악폐
6장 기운사의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 역사에 대한 새로운 도전

 

후기

역자후기


역자후기

이 책은 일본의 중국사학자 오카다 히데히로의 <누가 중국을 만들었는가>를 번역한 것이며, 한국어판 제목은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이다.

  일반으로 중국이라는 낱말은 하나의 '국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1912년에 건국된 중화민국이나 1949년에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 모두 '중국'을 약칭으로 채택하고 있으므로 중국이란 낱말을 국가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도 크게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개념 사용은 근현대에 국한되어 인정될 수 있을 뿐, 전통시대의 왕조 중에서 '중국'을 정식 국호로 사용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진 한 당 송 등은 춘추전국 시대 존재했던 도시국가의 명칭을 차용한 것이며, 그 밖에 원 명 청 등은 모두 특정한 의미를 담고 있는 낱말을 국호로 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누가 중국을 만들었는가'라고 물었을 때 염두에 두고 있는 중국 개념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은 진의 시황제가 전국통일을 달성함으로써 만들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물론 시황제의 전국통일 이전에도 중국은 여러 문헌에 걸쳐 사용되고는 있었다. 『시경』과 『서경』과 같은 오래된 문헌에서는 중국이 사국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기재되어 있다. 여러 성읍국가들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성읍국가를 가리키는 공간적 개념으로 중국이란 낱말이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에 들어서면 중국은 일개 성읍국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황하 중하류 유역을 지칭하게 되면서 그 공간적 범주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후 시황제는 이 지역을 분점하고 있던 여러 중소 국가들을 병합하여 전국시대를 종식시켰는데, 이로써 중국이란 낱말에는 질적인 전환이 이뤄진다.

  시황제의 통일사업은 단순히 나누어진 국가들을 진이라는 국가의 지배 아래로 끌어들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각국마다 상이한 문화, 풍속, 생활방식, 문자 등을 일률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시황제의 통일사업을 거치면서 중국은 특정한 지역을 가리키는 공간적 범주를 넘어 하나의 문화, 풍속, 생활방식, 문자 등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가리키는 관념으로 탈바꿈하였거니와, 이처럼 공간적 범주이자 문화적 관념을 의미하게 된 중국을 통일적으로 유지시키는 것은 시황제 이후 왕조들이 공통적으로 짊어지게 된 숙명적인 과제가 되었다.

하나의 체제regime를 존속시키는 데는 무력과 권위가 요구된다. 즉 체제에 맞서는 저항세력을 강제할 수 있는 무력과 더불어 체제의 통치권 행사를 피지배자들이 인정하고 납득할 수 있게 해주는 정당성으로서의 권위가 필요한 것이다. 양자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상호 보완적이기 때문에 이 중 어느 하나가 결여된다면, 그 체제의 통치권 행사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체제 자체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시황제의 전국 통일과 그것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뚜렷하게 발견한다. 시황제는 강력한 군사력을 사용함으로써 '중국'이라는 체제를 건립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권위를 수립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시황제 사후 체제의 붕괴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중국에서 역사가 성립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저자가 본서를 집필한 목적이다. 저자도 설명하고 있지만, '사史'라는 단어는 '중中'과 '우又'가 합쳐져서 생겨난 글자로 오른손에 문서 꾸러미를 들고 있는 사람을 형상화한 것이다. 따라서 '사'의 본래 의미는 역사가 아닌 관리의 장부를 가리키며, 장부에 매일 일어나는 사건을 기록하는 이가 바로 사관史官이다. 이는 중국에서 역사가 국가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는데, 시황제 이후 중국이라는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해 그것을 정당화하는 권위로서 도입된 것이 바로 역사인 것이다. 그리하여 한漢 무제武帝 치세에 들어서서 규모 있고 체계적인 형식에 따라 정교하고 장대한 구조를 갖춘 역사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니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史記』가 그것이다.

   『사기』는 문명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황제黃帝에서 출발하여 역사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한 무제의 치세로 전개되어왔는지를 다루고 있다. 달리 말해서,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천자天子, 즉 황제의 계보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가 천하를 통치할 수 있는 근거가 대체 어디에 있는것인가.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한 목적 역시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기 위한 것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사마천은 먼저 신화의 세계에 속하는 「오제본기五帝本紀」를 『사기』의 첫머리에 배치하고, 천자가 천하를 다스리는 근거는 단순히 무력의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닌 천명天命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즉 덕치德治를 펼치는 통치자만이 천자로서 천명을 수여받아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얻으며, 그 통치자가 덕치를 펼치지 않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다면 천명은 덕치를 펼치는 다른 통치자에게로 이행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화의 세계를 역사서술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는 행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사기』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재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마천의 목적은, 천명이 통치지들을 편력하는 과정을 신화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함으로써 천명을 부여받은 황제, 이른바 정통正統 황제의 계보를 서술하는 데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정통 황제의 계보가 사마천 자신이 섬겼던 한 무제에게로 이어지고 있음을 입증하는데 있는 것이다.

   체제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원리로써 사마천이 고안해낸 '정통' 이론은 그 효과가 굉장히 심대하였던 까닭에 사마천 이후에도 『사기』의 체계가 역사서술의 모범으로 떠받들어졌다. 전술한 것처럼, 황제제도와 역사서술 간의 긴밀한 연결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사기』가 역사서술의 모범이 되었다는 것은, 달리 말해서 『사기』의 정통 이론을 따르지 않는 역사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역사인 정사正史에 편입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사마천이 전범으로 삼았던 한 무제의 치세에서와 같이, 무력과 권위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서 체제의 통치가 공고하다면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의 전개과정은 끊임없는 변화를 그 특징으로 한다. 『사기』의 서술방식, 즉 이상으로 상정하고 있는 세계가 있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사실들을 선별하여 기술하는 태도를 고수하다 보면, 현실세계가 변화하더라도 이를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이러한 문제는 진수의 『삼국지』에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절정을 맞이하였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004년 북송北宋과 요遼 사이에 체결된 전연의 맹약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두루 알다시피, 전연의 맹약이란 북송이 요와의 전쟁에서 패한 결과 양국 사이에 맺어진 화의인데, 북송의 황제인 진종이 요의 황제인 성종을 아우로 대하는 동시에 매해 정해진 양의 세폐를 바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사안은 정통 황제라 자임하던 북송의 황제가 자신 이외의 통치자를 황제로 승인했다는 데 있다. 이는 유일한 정통 황제가 천하를 통치한다는,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한 이래 굳건하게 믿어져 왔던 관념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음을 뜻한다. 이에 대한 반동에서 일어난 것이 중화사상中華思想이며, 이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문헌이 바로 사마광의 『자치통감』 이다.

   사마광은 남북조南北朝 시대를 서술하면서 북방민족이 중원에 들어와 세운 왕조인 북조를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무력을 지녔을지는 모르나 태초의 황제로부터 전승된 중국의 문화를 이어받고 있지 않기 때문이요, 그런 까닭에 남조만이 중국의 문화전통을 향유하는 유일한 정통 통치자가 된다. 사마광의 이러한 입장은 남북조를 서술하는 태도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즉 북조를 다룰 때에는 「본기本紀」를 삽입하지 않고 통치자 역시 '주王'라고 지칭하는 반면에 남조를 다룰 때에는 「본기本紀」를 삽입하고 통치자를 '제帝'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광은 이와 같은 형식적 차별을 자신이 살았던 당대에도 그대로 투영시켰다. 즉 남조를 계승한 북송은 '정통 왕조'이지만, 북조를 계승한 요는 무력만 가진 야만스럽고 미개한 '이적夷狄'이라 간주한 것이다.

   중화사상의 등장은 무력과 권위를 두 계기로 하여 수립되었던 중국이란 체제가 새로운 전환을 맞았음을 뜻한다. 무력으로는 더 이상 북방민족과 비교하여 우월성을 차지하지 못하는 역사적 상황에서 사마광은 무력을 탈각시키고 정통이라는 권위를 한층 더 강화시키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로써 통치의 수단으로 역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이전의 무력적 요소까지도 포괄하는 지위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겠다. 중국이란 체제는 역사만으로도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이란 체제가 '정통'과 '중화사상'의 결합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제 저자의 질문에 답변할 때가 되었다. 누가 중국을 만들었는가? 그들은 바로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이다.

   언론에서 보도되는 기사들에 따른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은 내전 종식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하였던 미합중국의 패권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군사력과 경제력에서의 우위만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을 통합하고 중국공산당의 일률적인 통치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한 국가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요하게 작용한다고 본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의 대응방법이 사마천과 『사기』의 시대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최근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커다란 역사분쟁으로 부상한 티베트 귀속 문제나 고구려사 귀속 문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단발적인 구호와 허황된 주장이 아닌,

중국이라는 체제가 만들어진 과정과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역사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되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독자들이 본서를 읽음으로써 그러한 이해를 심화하는데 기여하기를, 나아가서는 저자가 던진 질문을 바꾸어 '누가 한국을 만들었는가'에 대한 답변을 고민하는 반성적 성찰의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2010년 6월
강유원, 임경준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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