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하비: 파리, 모더니티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의 개정판)


파리, 모더니티 - 10점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병화 옮김/생각의나무


서문: 단절로서의 근대성 


[1부] 묘사: 파리 1830~1848 

1. 근대성의 신화: 발자크의 파리 

2. 신체정치를 꿈꾸다: 혁명적 장치와 유토피아 요강, 1830~1848 


[2부] 물질화: 파리 1848~1870 

3. 프롤로그 

4. 공간관계의 조직 

5. 화폐, 신용, 금융 

6. 임대료와 부동산 이권 

7. 국가 

8. 추상적ㆍ구체적 노동 

9.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 

10. 여성의 여건 

11. 노동력의 재생산 

12. 소비자중심주의, 스펙터클, 여가 

13. 공동체와 계급 

14. 자연적 관계 

15. 과학과 감정, 근대성과 전통 

16. 수사법과 표현 

17. 도시 변형의 지정학 


[3부] 코다 

18. 사크레쾨르 바실리카의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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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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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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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문

단절로서의 근대성

근대성modernity의 신화 가운데 하나는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이라는 생각이다. 그 단절은 세계를 백지tabula rasa로, 과거와 상관없거나 과거가 끼어들더라도 그것을 망각하고 새로운 것을 기록할 수 있는 백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수준이어야 한다. 따라서 근대성은 온건하고 민주적인 것이든 혁명적이고 권위적이며 상처를 남기는 것이든, 종류를 불문하고 항상 "창조적 파괴"이다. 철저한 단절이 문학이나 미술, 도시계획과 산업 구조, 정치, 생활방식 같은 여러 상이한 분야에서 무언가를 시행하고 묘사하는 스타일의 문제인지, 아니면 근대성의 집합적 힘이 나머지를 시행하고 묘사하는 스타일의 문제인지, 아니면 근대성의 집합적 힘이 나머지 세계를 집어삼키는 방향으로 확산되기 시작할 때 그 시공간적 출발점이 되는 핵심적으로 중요한 몇몇 장소와 시가네 그 모든 분야에서의 변동이 집결되는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근대성의 신화는 후자의 해석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비록 계속 추궁해나가면 그 해석의 옹호자들은 불균등한 발전이라는 것을 대개 기꺼이 시인하며, 이에 대해 자세히 논하다 보면 상당한 혼란이 일어나지만 말이다.

나는 이러한 근대성 개념을 신화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철저한 단절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힘은 설득력이 강하고 광범위하게 적용되지만, 정황적으로는 그런 힘이 발생하지도 않았고 발생할 수도 없다는 증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그 대안인 근대화modernization(근대성이 아니라) 이론은 생시몽이 처음 만들어 냈고 마르크가 대폭 지지한 것으로, 어떤 사회 질서도 기존의 여건 속에 이미 잠복해 있지 않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적 사상의 만신전 안에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는 두 사상가가 철저한 단절의 가능성을 이렇게 명백하게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혁명적 변화의 중요성을 주장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의견이 수렴되는 곳은 "창조적 파괴"라는 구심점 부근이다. 옛날 속담에서 말하듯이,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다. 새로운 사회 형태를 만들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옛 것을 능가하거나 그것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근대성이 하나의 개념으로서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이 창조적 파괴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1848년에 유럽, 특히 파리에서는 뭔가 아주 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 무렵 파리의 정치, 생활을 문화에서 철저한 단절이 이어났다는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전적으로 그럴듯하다. 그 이전에 있었던 도시관은 기껏해야 중세적인 도시의 하부구조에서 발생한 문제를 땜질하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도시를 강제로 근대성으로 몰아넣은 오스망이 등장했다. 그 전에는 앵그르, 다비드 같은 고전주의자와, 들라크루아 같은 색채주의자가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쿠르베의 사실주의와 마네의 인상주의가 나왔다. 그 이전에는 낭만주의 시인과 소설가(라마르틴, 위고, 뮈세, 조르주 상드)가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플로베르, 보들레르의 간결하고 말을 아끼며 예리하게 날이 선 산문과 시가 나왔다. 그 이전에는 수공업 공정을 따라 조직된 제조업들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 대다수가 기계와 근대적 산업에 밀려났다. 이전에는 좁고 꼬불꼬불한 거리나 아케이드에 소점포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대로변에 널찍하게 터를 잡고 펼쳐진 백화점이 등장했다. 그 이전에는 유토피아주의와 낭만주의가 있었지만 이후에는 빈틈없는 경영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가 나왔다. 그 이전에는 물장수가 중요한 직업이었지만 상수도가 설치됨에 따라 1870년경이 되자 물장수는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온갖 - 또 더 많은 - 측면에서 1848년은 옛 것 속에서 수많은 새로운 것이 응결되어 나오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1848년에 파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온 사방에서 굶주림과 실업과 빈곤과 불만이 팽배했고, 사람들이 생계수단을 찾으려고 도시로 몰려들었고, 그 가운데 많은 수가 파리를 중심으로 모였다.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군주제와 상대하려고, 적어도 그것이 애초에 약속한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개혁이 일어나지 않을 때 혁명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한없이 계속되었다. 1840년대에 벌어진 파업과 거리 시위와 봉기 음모는 저지되었고, 그들의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판단하건대, 이번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 했다.

1848년 2월 23일 카푸친 대로에서, 외무성 앞에서 벌어진 별로 크지 않은 시위가 당국의 통제범위를 벗어났고, 진압부대가 시위자들에게 발포하여 50명 가량을 죽였다. 그 뒤의 일은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살해된 사람들의 시체를 실은 수레와 횃불이 도시 전역을 장악했다. 나중에 플로베르는 [감정교육]에서 대니얼 스턴의 믿기 어려운 설명을 활용하는데, 여기서는 한 여자의 시체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스턴의 설명에 의하면, 대체로 잠잠한 편이었던 군중이 거리에 운집하기 전에 한 소년이 주기적으로 그 젊은 여성의 시체를 횃불로 비추곤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순간에는 한 남자가 그 시체를 들어올려 군중에게 보여주었다. 이 상징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자유는 오래 전부터 여성으로 여겨져 왔는데, 이제 그녀가 저격 당한 것 같다. 다들 그날 밤이 기괴할 정도로 조용했다고 한다. 시장거리도 조용했다. 새벽이 왔고, 도시 전역에 경종이 울려퍼졌다. 그것은 혁명을 부르는 외침이었다. 노동자, 학생, 불만을 품은 부르주아, 소규모 부동산 소유주들이 함께 거기로 몰려나왔다. 국민방위대 병사들도 다수 가담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부대가 싸울 의지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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