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고전강의 | 02 안티고네 1
- 강의노트/인문고전강의 2013
- 2014. 7. 7.
오이디푸스왕 안티고네 외 - 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문예출판사 |
강유원, '인문고전강의'
일시: 2013년 2월7일 – 12월 5일, 매주 목요일 오후 7시30분 – 9시30분(총 40주)
장소: 과천시정보과학도서관
* 강의 목차
20130418 11강 안티고네(1)
20130425 12강 안티고네(2)
20130418 11강 안티고네(1)
호메로스의 서사시하고 소포클레스의 비극작품 사이에는 최소한 200년의 시간 간격이 있다. 그러면 호메로스 서사시 전통이 소포클레스로 넘어와서 있는 그대로 넘어와서 있는그대로 재현된게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가 뭐냐면 전통의 계승과 변용이라고 하는 하나의 주제가 새롭게 제기되는 된다. 200년 동안 일단 누락되지 않고 호메로스의 전통이 기록물이 없는데도 불고하고 구전으로서 희랍세계에서 inherit된게 대단한 것. 호메로스 서사시 epic 하고 비극 tragodia 하고는 드라마의 내용은 똑같다. 이것이 어떻게 달라졌느냐 하면 epic에서 tragodia로 가면서 형식이 개입되고 형식과 함께 동시에 서사시를 읽을 때 짜증나는 부분이 불필요하게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너무 많은데 그런 것들을 다 쳐내고 말그대로 in medias res 사건의 한 가운데로 철저하게 구현될 수 있도록 인물들의 activity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인간중심으로 가는 것.
in medias res가 사건의 한 가운데로를 의미하는데 서사시도 사건의 한가운데로 비극도 사건의 한 가운데로 이다. 그러나 서사시는 여기에 풍경에도 들어갈 수도 있지만 비극은 인간행위의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다. 그 다음에 <오뒷세우스> 같으면 끝에 대답되는 것들이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앞에서 바로 나오고 곧바로 파멸로 간다. 그것을 잘하기 위해서 만들어진게 에피소드와 코로스들의 형식들이다. 그렇게 해서 비극이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200년이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면 그렇게 함으로해서 사실은 epic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tradition인데 이 tradition을 내려받아서 tragodia가 하나의 tradition이 되느냐 아니면 그냥 하나의 preject로 끝나느냐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어떤 것들이 여기에 개입되서 계승되고 변용되어 나가는가를 생각해봐야 하는데 특히나 변용시켜서 후대에 보기에는 또 다른 tradition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비극의 작품들은 프로젝트라기보다는 tradition으로 자리를 잡았다. epic에서 tragodia로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차이점을 두고, 이제 tragodia를 읽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human activity를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이 사람들의 행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인간의 행위라는 것이 인간의 내면에 있는 psyche 푸시케 즉 의지하고 어떻게 연결시켜서 표출되어 나오는가, 그 중간단계로서 <오뒷세이아>가 있었다. 오뒷세우스는 자기 의지를 드러내 보였다. 소포클레스에 오면 <오이디푸스 왕>이 잘 보여주는데다가 오늘 읽는 <안티고네>에서는 더욱 더 잘나온다.
여기까지 정리가되면 어떤 질문이 가능한가. 도체대 왜 희랍의 비극작가들은 human activity를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다시말해서 희랍의 비극작가들로 하여금 human activity를 중요한 주제로 다룰 수 있게 했던 요소들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호메로스 시대의 epic에 드러나는 사건들하고 tragodia에 드러나는사건들이 다르다. 즉 시대적 맥락이라고 하는 것이 여기에 개입된다. 자기네가 전승받은 inherit한 heritage, epic의 형식에다가 그걸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형식 안에다가 어떻게 하면 자신이 살고있는 시대를 잘 담아낼 것인가. 당대성과 전통성이다. 이 두 개가 들러붙어서 새로운 tradition을 만들어 낸 것. 그게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 <오이디푸스 왕>이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들을 비극에 끌어들여들인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이 아이스퀼로스의 <페르시아인들>. 작품의 완성도는 떨어지는데 페르시아 전쟁을 특히 살라미스 해전을 겪었던 아이스퀼로스가 승전의 기쁨에 못이겨서 쓴 것. 희랍의 관객들은 다 신이 났을 것이다. 작품의 완성도는 떨어진다할지라도 당대성을 얼마나 잘 잡아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예시적인 작품이 바로 <페르시아인들>이다. 그런 것들이 계속 다듬어지면서 그 과정에서 이 사람들이 이런 걸 만들어낸 것. 중요한 것이 시대의 맥락, 당대성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의 작품 안에 집어넣기 위해서 필수적인 조건이 대중적이었다는 것. 그러니까 한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대중성과 tradition이 사상사적 전통하고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굉장히 착각하기 쉬운 부분.
당대성이 어떻게 자기 작품 안에 집어 넣는가. 조선 시대 실학이 왜 tradition이 되지 않은 것인가. 그들만의 리그였기 때문. 전통으로 자리잡으려면 후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 소스 샘물로서 이용을 해야 하는데 그게 안된 것. 생각해보면 학교 다니면서 역사,윤리에서 잠깐 실학에 대해서 배운 것 말고는 없다. 전통이 아니라 그 당시 있었던 일에 불과하게 된 것. 전통은 그 자체로 낡아서 박물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이것을 이용할 수 있는 사유 방식이어야 한다.
박희병 교수가 쓴 <담헌 홍대용 연구> 책이 있다. 서문을 보면 유가적 전통과 당대의 사회적 상황을 결합해서 내적인것과 외적인 것을 결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고 하면서 변증법적 작용이라고 설명을 한다. 독일 헤겔적 사유방식을 쓴 것. 국문과 교수도 실학파을 연구한 교수도 이것을 규정할 수 있는 방법을 독일철학을 가지고 개념을 규정하는 것. 즉 사유의 방법론이 없는 것이다. 사태가 비극적이다 라고 말할 때 그 사태를 규정하는 요소들로서 희랍비극을 떠올린다. 이게 전통이다. 낡고 고루한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사태를 규정할 때 가장 밑돌로서 사용되는 사유의 틀. 이것을 우리에게 전수해주는 것이 전통이다.
전통이라는 것이 이렇다. 트라고디아를 읽을 때도 이 사람들이 당대성이라고 하는것, 그리고 eipc 중에서도 <오뒷세이아>의 파토스와 그 다음에 <향연>을 보면 에로스의 사다리, <국가> 10권 보면 착한 사람은 오른쪽 길로 나쁜 놈들은 외쪽 아랫길로 간다는 얘기가 있다. 그게 말하자면 상승, 올라가는것. 그것이 그대로 신플라톤주의를 거쳐서 기독교로 흡수가 된다. 그게 가톨릭 tradition. 그렇기 때문에 tradition이 없는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을 못이긴다.
상승,구원으로 올라가는 과정이 있고 지옥의 하데스로 내려가는 과정이 있다. 그것과 자기와 같은 마음을 확인하기 위한 오뒷세우스의 여정. 거기에다 베르길리우스같은 greco-roman tradition과 가톨릭 tradition이 결합되면서 단테의 <신곡>이 나온 것. 그렇게 해서 신곡이 다시 tradition이 된다. 중세말과 근대초의 근대적 서사시로서 고대 희랍에서 사라져버린 eipc이 1300년대 단테에와서 근대적인 eipc으로 다시 생겨나는 것 그렇게 해서 하나의 tradition이 만들어지는 것.
가톨릭 tradition이 되었건 프로테스탄트 tradition이 되었건 이 두 개의 큰 tradition의 원천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과정인데 사실은 그 과정 전체가 인류의 죄를 고백하는 것.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텍스트들을,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 텍스트들을 읽는가를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 <안티고네>의 작품은 오이디푸스보다도 훨씬 더 인간의 행위와 내면의 상응관계가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특히나 <오이디푸스 왕>에서도 많이 드러나긴 했는데 <안티고네>로 오면서부터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인간 존재의 의지적인 측면이 잘 드러난다, 신에 맞서는 인간, 이런 태도가 잘 나온다. 지난번에 <오이디푸스 왕>에서도 1330행 '내가 손수 찔렀다'고 나왔다. 소포클레스 전 작품에서 한 구절만 주제적인 측면에서 거론해봐라 그러면 바로 그부분이다. 아이스퀼로스는 상당히 신에 의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이스퀼로스는 희랍 아테나이 전성기를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특히나 신에 의존적. 우리 아테나이의 전성기가 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뿌듯함.
서구 사상사를 읽을 때 tradition들 각각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고 어떤 식으로 전승되고 어떤 부분이 변용되는가. 사상사의 생성과 전개, 이런 것들만 따로 점이지대를 추려서 관심있게 공부하면 재미있다. 칸트와 헤겔만해도 서로 전혀 다른 tradition. 칸트는 굉장히 자연과학적인 tradition이고, 헤겔은 greco-roman tradition, 가톨릭 tradition에 가깝다. 그러까가 어떤 전통을 더 유력하게 땡겨오느냐에 따라서 다시 다른 종류의 사상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제 <안티고네>를 보겠다.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와 크레온, 하이몬, 에우뤼디케, 테이레히아스 익숙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특히 여러 차례 애기했듯이 코로스가 중요하다. 여기서 코로스는 테바이의 원로들로 구성되었다. 관객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계가 있으니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이런 것을 설명하고 행동을 확대하는 효과도 있고, 한발 물러나서 reflection하는 효과도 있다. reflection이 중요한 포인트. 반성하게 한다, 한발 물러나서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비극 다음에 철학인 것이다.
reflection은 사태를 추상화하는 것이다. reflection이 있기 때문에 abstraction이 가능한 것. 추상화가 되면서 부터 보편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universality 유니버셜리티. 그러니까 보편성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안티고네>가 되었건 <오이디푸스 왕>이 되었건 이런 작품들은 상황들을 보편화 가능한 것들을 작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안에는 소포클레스와 같은 작가들이 보편적인 요소들을 설정해 놓은 것. 그래서 보편적 원리가 나오는 것. 그래서 보편화 가능성을 띠고 있는 것. universalizability 보편화 가능성.
비극 드라마 4가지 요소가 개연성, 필연성, 이야기, 진테시스다.
(1) 개연성( eikos) -일어날 만한 사건을 가지고 사건구성
(2) 필연성(ananke 아난케)-대립이 필연적으로 일어나야함
(3) 종합(synthesis 진테시스
(4) 이야기 ( muthos 뮈토스)
개연성은 언제어디서나 일어날만한 사건들. 이런 의미에서 개연성인데 느슨한 의미에서 사용되지는 않는다. 반드시 그것으로부터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가 이끌어져 나와야 그 개연성도 의미가 있는것. 개연성과 필연성은 맞물려있다.
315 1행 안티고네: 오오 나와 친동기간인 이스메네의 머리여,
오이디푸스에게서 비롯된 온갖 불행들 중에서 제우스께서
살아남은 우리 두 자매에게 이루시지 않은 것을
너는 단 한 가지라도 알고 있니? 고통과 재앙과
치욕과 불명예치고 너와 나의 불행들 중에서
내가 보지 못한 것은 한 가지도 없으니 말이야.
하거늘 방금 또 장군님께서 모든 시민들에게
무슨 포고를 내리셨다는 거니? 너는 들어서 알고 있니?
아니면 적들이 받아 마땅한 불행들이 우리 친구들에게
돌아가고 있는 것도 너는 모르고 있니?
머리란 말은 흔히 존경 또는 애정을 뜻하는 우회적인 표현으로 쓰인다.
희랍어에는 존칭어가 없다. 이런 말을 붙여야 존칭이 되는 것.
여기서 '장군'은 희랍어로 아르콘 archon이다. 오이디푸스는는 turannos 참주였다. 크레온은 아르콘 archon 장군이라 불린다. 전쟁이 끝난 직후 새로 왕이 되었는데 장군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보면 오이디푸스 만큼 강력한 카리스마를 확보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티고네의 첫마디인데 '아니면 적들이 받아 마땅한 불행들이 우리 친구들에게', 적과 친구라고 하는 것을 구별해서 말을한다. 적과 친구는 안티고네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사유의 틀이다. 적은 배반자를 가리키기도 하고 친구는 퓔로스 philos 이다. philos는 혈연에 대해서도 쓰일 수 있고, 어쨋든 나랑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쓰인다. 이미 초반부터 안티고네는 적과 친구를 구별해서 시작한다고 하는것 이것 자체가 굉장히 갈등상황. 이 갈등구조가 변함없이 끝까지 갈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도데체 안티고네는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적과 친구를 구별하는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316 10행 이스메네: 우리 친구들에 관해서는, 안티고네 언니,
기쁜 소식이든 슬픈 소식이든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요.
316 17행 안티고네: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너만 듣도록
내가 너를 궁정의 문밖으로 데리고 나온거야.
여기서 안티고네의 말이 중요하다.
317 31행 안티고네: 크레온 님께서 우리 두 오라버니 가운데 한 분은
후히 장사 지내되 한 분은 장사 지내지 못하게 하셨지 뭐니!
두 오라버니는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를 말한다. 호메로스 서사시 같으면 앞에서 길게 말을 하고 난다음에 나올 대립구도가 <안티고네>에서는 벌써 세마디 하니까 나온다.휴면액티버티, 인 메디아스 레스다. 분노를 노래 하소서 이런 거 할 틈이 없다.
에테오클레스는 바른 법도와 관습에 따라 땅속에 묻어주라고 했으나 폴뤼네이케스는 아무도 무덤 속에 감추지도 애도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했다. 안티고네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것. 에테오클레스만 묻어서는 안된다는 것. 여기 친구가 있고 적이 있는데 안티고네는 이 구도가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이 구도에 연결되는 원리들이 무엇인가.
317 35행 안티고네: 이 일을 그분게서는 결코 가벼이 여기시지 않고,
이를 조금이라도 어기는 자는 시민들이 돌로 쳐서 죽이게 하셨데.
사정이 이러하니 이제 곧 너는 네가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아니면 고귀한 부모의 못난 자식인지 보여주게 될 거야.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주는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인다고 되어 있다. 안티고네는 죽음을 각오하고 하는 것. 막가파의 심정이 아니라 남들과 도대체 화해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안티고네 대사가 몇개 안나왔는데 벌써 이 드라마가 앞으로 갈등선이 어디에 그어질 것인가가 뚜렷하게 나온다. 안티고네가 주장하는 논거 자체가 퓌시스/자연적인 측면에서 얘기한다. 규범/인간이 만들어낸 규약이 아니라 자연적인 측면에서 얘기한다.
317 39행 이스메네: 사태가 그러하다면, 가엾은 언니, 내가 매듭을
풀거나 묶는다고 해서 거기에 무엇을 덧붙일 수 있겠어요?
318 41행 안티고네: 너는 나와 노고와 행동을 같이 할 것인지 잘 생각해보도록 해.
노고와 행동. 안티고네가 가지고 있는 기준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 즉 안티고네 내면에 있는 기준과 그 내면에 있는 기준이 겉으로 드러난 표상, 내면과 표상의 상응관계.
표상 表象. 독일어로 Vorstellung 포르쉬텔룽. 이런 단어는 영어로는 함축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독일어로 표현한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을 끄집어 내서 앞에 세운다. 생각을 끄집어 내놓다고 해서 표상이라고 하기도 하고 흔히 사람들이 하고 잇느 생각 상식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여기서는 앞에 뜻이다.
노고와 행동은 생각은 아니지만 생각이 겉으로 드러난 형태들. 그럴때 표상태로서의 노고와 행동이라고 말한다. 이런 단어들은 어려운 단어라 생각하지 말고 들어서 기억하면 좋겠다. 알기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도 좋지만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도 많다. 자꾸 어려운 것에 익숙해지도록 해야한다. 어려운 책을 잘읽는 방법은 쉬운책에서 차근차근 어려운 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책을 계속 읽는 것이다.
318 42행 이스메네: 무슨 모험을 하시려는 거예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318 43행 안티고네: 네가 나의 이손을 도와 시신을 들어 올려주지 않겠니?
318 44행 이스메네: 도시에 금령이 내렸는데도 그 분을 묻어줄 작정이세요?
318 45헹 안티고네: 나는 오라버니에 대하여 나의 임무를, 그리고 네가 원치 않는다면
네 임무를 다할 작정이야. 나는 결코 그분께 배신자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여기서 배신자는 앞에 나온 적과 같은말. '나의 임무를' 안티고네가 가지고 있는 원칙이 있는데 이 원칙이 뚜렷하게 뭔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있다. 이 원칙을 안티고네는 끝가지 고수한다. 그래서 죽는다. 안티고네가 처해있는 입각점. standpunkt. 스탄트풍크트. 안티고네의 입각점이 무엇인지는 규정적인 언어로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안티고네는 혈연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은 뚜렷하다.
318 48행 이스메네: 정말 대담하시군요. 크레온 님께서 금하셨는데도요?
318 49행 안티고네: 그분에게는 나를 나의 가족에게서 떼어놓을 권리가 없어.
안티고네의 입각점은 가족윤리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점을 유념해 두자.
318 50행 이스메네: 언니, 잘 생각해보세요.
319 58행: 유일하게 살아남은 우리 두 자매도 법을 무시하고 왕의 명령이나 권력에 맞서다가는
누구보다도 가장 비참하게 죽고 말 거예요.
이스메네는 여기서 크레온의 애기를 예고편처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법을 무시하고' 여기서 법이 안티고네가 지키고자 하는 것과는 대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편화 가능한 대립구도가 설정되어 있다.
적어도 지금 <안티고네>에서는 퓌시스, 가족 , 자연적인 것. vs 노모스, 법, 규범 이 두개가 우리 시야에 들어왔다.
319 65행 이스메네: 나는 이번 일은 어쩔 도리가 없는 만큼,
지하에 계시는 분들께 용서를 빌고
통치자들에게 복종할 거예요.
지하에계시는 분들은 = 저승을 다스리는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 및 죽은 폴뤼네이케스의 혹백을 가리킨다.
페르세포네는 디오니소스의 어머니인데 지금 <오이디푸스 왕>보다도 <안티고네>가 훨씬 더 대립구도가 복잡하다.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아폴론신만 나왔다. 그런데 지금은 처음부터 안티고네가 적이네 친구네 하면서 대립구도를 만든다. 신들도 안티고네 편을 들어주는 신과 크레온편을 들어주는 신으로 나뉜다.
이스메네가 지하에 계신분들께 용서를 빈다는 것은 적어도 그러면 안티고네가 기대고 있는 신들은 지하에 있는 신들이고, 크레온은 올륌포스의 아폴론, 제우스에게 기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짐나 안티고네은 기대지있는 것이지 의존하지는 않는다. 희랍에서 올륌포스 신들이 계속해서 세월이 가면서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강도로 숭상된게 아니다. 디오뉘소스를 기리는 축제이기도 있는데 아폴론이나 제우스는 위정자들이 좋아하는 신이고, 디오뉘소스나 하데스의 신들은 백성들의 신으로 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중에 보면 테바이의 시민들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안티고네 편을 들겠다는 예상도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 더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하는 것이 뭐냐면 우리는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고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올륌포스 신과 하데스 신은 안티노미 antinomy, 이율배반이다. 이제부터 드라마를 철학적으로 좀 읽어야 한다. 이율배반이란 A와 B가 이율배반이다 라고하면 A가 맞는 경우 B가 절대로 맞을 수 없는 것. 이율배반은 모순관계에 있다고더 말한다. 다시말해서 가운데가 중간이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 가운데를 배척한다,
배중율(A는 B도 아니고, 또 B가 아닌 것도 아니라는 것은 없다. exclusion of middle. 중간항목을 배제한다. 여기나와있는 것들은 다 이율배반/모순이고, 배중율의 적용을 받는다. 중요하다.
배중율: A는 B도 아니고, 또 B가 아닌 것도 아니라는 것은 없다.
동일율: A는 A다.
모순율: A는 not A가 아니다.
서구 형이상학에서 기본적인 구도가 exclusion of middle이다. 모순율을 달리말하면 배중율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출발하는 지점이 바로 동일율이다. 사람들이 눈앞에 펼쳐져있는 사태를 바라볼 때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유의 범주가 논리학. 대상세계를 파악하는 사유의 형식이 논리학이다. <안티고네>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데스편이면 제우스편이 아니다. 적이면 적. 피시스면 피시스, 노모스면 노모스. 기본적으로 그러니까 끝장볼때까지 싸우는 것. 펠로폰네소스 전쟁도 30년 가까이 해서 한쪽이 거덜이 날 때까지 싸웠다. 팔랑크스 중갑보병들이 들판에서 한나절씩 싸운다. 그 사람들이 멀리서 돌던지고 창던지는 전법을 개발 못해서가 아니라 그런식으로 싸워서 끝장을 내야 승부가 갈렸다고 생각하는 선험적인 사유방식이 있다. 그래서 싸움을 그렇게 하는것이다. 완전히 없애는 전쟁. 그렇기 때문에 인류 최후의 날, 최후의 심판이라는 것이 있는 것. 동양에는 없다. 지상의 나라가 끝장이 나야 완전히 정리가 되어야 깔끔하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인간이면 인간이고 신이면 신이지 절대로 인간이 변용되어서transfiguration이 안된다. 이분법적 사유가있는 것. transfiguration은 형태가 변하는 것으로 동양에서는 도를 닦아서.. 절벽에서 동굴에서 운기초식을해서.. 탄지신공을.. 인간하고 신하고 왔다갔다. 서양에서는 예수말고는 없다. 예수를 구원자로 만들려고 하면 애초에 이 사람한테 신적인 요소가 물한방울만큼이라도 있어야 하니까 기여이 요셉을 따시키는 것. 예수님에게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것은 엄마 마리아밖에는 없어야 하는 것이 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신의 아들로 만드려면 인간적 요소를 빼야한다. 제3의 것이 가능하지 않다. 이렇ㄴ 생각은 기독교적인 생각이 아니라 이분법적 생각이라는 것은 희랍에서 내려온 것. 이게 바로 서구적인 전통이다. 사실 이분법 tradition이 서구에서 제일 오래된 tradition이다. 이렇게 서구적 사고방식과 동아시아 사고 방식은 다르다.
중간자. 제3의 것. 이것이 꼭 끼어들어가게 되어있다. 제3의 것을 매개하지 않으면 사태가 파탄으로 간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래서 안티노미를 극복하기 위해서 중간에 이 사태를 연결시켜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자들을 형이상학의 용어로는 비존재라고 한다. 존재가 아니지만 존재의 매개되는 것. 비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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