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 02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2
- 강의노트/책을 읽다보면 2017-18
- 2017. 12. 18.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도서출판 숲 |
2017년 11월 4일부터 CBS 라디오 프로그램인 변상욱의 이야기쇼 2부에서 진행되는 "강유원의 책을 읽다보면"을 듣고 정리한다. 변상욱 대기자님과 강유원 선생님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팟캐스트 주소: http://www.podbbang.com/ch/11631
20171202_05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2
희랍 비극의 창시자인 아이스퀼로스의 대표작인 3부작을 읽는다. 지난 시간에 얘기했지만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고 들어가야 할 것 같다.
3부작을 보면 첫째 작품이 <아가멤논> Agamemnon, 둘째가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Choephoroi, 그리고 <자비로운 여신들> Eumenides이다. 첫째 작품의 분량이 1673행이고, 둘째, 셋째 작품이 대체로 천 행 정도 된다. 그러니까 600행 정도가 첫째 작품이 긴데 앞에 나오는 프롤로고스와 코로스의 등장가가 굉장히 길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해서 <아가멤논> 맨 앞에 나오는 부분은 <아가멤논> 자체의 서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작품 전체의 서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3부작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희랍 비극의 일반 주제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희랍어로 파테이 마토스(pathei mathos)로 말한다. 우리가 겪어봐야 안다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가장 흔한 말이다. 이 말이 희랍세계에서는 격언이다. 이 격언이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아가멤논>에 나오는 말이다. "그분께서는 인간들을 지혜로 이끄시되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게 하셨으니" 이 부분이 말하자면 이 텍스트의 핵심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아가멤논> Agamemnon 176~183행
(좌3) 그분께서는 인간들을 지혜로 이끄시되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게 하셨으니,
그분께서 세우신 이 법칙 언제나 유효하다네.
마음은 언제나 잠 못 이루고
고뇌의 기억으로 괴로워하기에
원치 않는 자에게도 분별이 생기는 법.
이는 분명 저 두려운 키잡이의 자리에 앉아
힘을 행사하시는 신들께서 내려주신 은총이라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passion of christ를 말할 때 passion은 고난이라는 뜻도 있지만 열정이라는 뜻도 있다. 열정이 없는 자에게는 고난도 없다.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열정이 있기 때문에 고난을 겪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서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사실 다르게 말하면 고난을 감내야 할 열정이 있어야 지혜를 얻는다는 것.
우리 같은 사람은 베드과다. 여기서 초막 셋을 짓고 편하게 지내자. 왜 가시밭길로 들어가는지 옆에서 간언하는 역할은 할 수 있는데 가자고는 못한다.
그렇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힘들다. 희랍 드라마에 나오는 passion은 고통을 통해서 고난을 겪어서 지혜를 얻는다. 그래서 아가멤논이나 오레스테스 같은 사람들은 우리가 보기에는 무모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온 몸으로 부딪쳐서 고난을 통해서 지혜를 얻어내는 사람들이다.
이런 고민이 있다. 목표가 확실하면 괜찮은데 항상 묘한 상황에서 꼬인다.
이율배반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 인간은 하위에 있는 두 개가 충돌하는 것을 상위에서 볼 수 없다. 어쨌든 하나를 선택해서 가는 수밖에 없다.
사실 희랍이라고 말하면 합리주의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극 속에서 부딪치는지 보는 것이 흥미롭겠다.
그런 것이 합리주의다. 희랍사람들의 합리주의는 신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율배반의 상황에서 한 군데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인간은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없고, 겪어야 알 수 있고, 그러니 한 군데로 가는데 그때 최선을 다하는 것이 희랍의 합리성이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 어떤 집에서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 우리에게 주어지거나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물려받은 상황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새로운 사건이 벌어진다. 인간이 그런 사건들에 대해서 대응하기 위한 어떤 행위를 선택한다. 첫째, 주어지거나 물려받은 상황과 둘째, 새로운 사건, 셋째 인간의 행위가 합하여서 어떤 결과가 나오고, 이것이 다시 시대정신이나 상황으로 우리에게 다시 주어진다. 그러니까 눈 앞에 놓여있는 것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다.
신께서 우리에게 하는 말씀이 '이것이 해야 마땅하다'고 하지 '이것이 합리적이다'라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적인 전통 속에서 자라난 사람에게는 사실 다 마땅한 것들만 놓여있다. 사실은 그런 점에서 불편한 점도 있다. 세상의 기독교인을 적으로 돌리는 발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기독교인의 오만함이다. 신이 말씀하신 '마땅함'이 마치 인간이 내가 말하는 '마땅함'인 것처럼 착각해서 우리 인간은 고작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합리성을 다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고 자꾸 신의 말씀을 읽다보니 신의 '마땅함'이 나의 '마땅함'인 것처럼 여겨져서 내가 보기에 '마땅하지 않은' 자들을 마치 자기가 신이라도 된 냥 질책을 한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오만함이다.
어떻게 보면 층위가 다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사랑과 평화라고 한다면, 그 밑에 중간에 놓인 계급자들이 마땅하다고 하는 것은 순 교리 상의 문제인 것 같은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마땅함이라고 계속 가치를 달리한다.
요즘은 종교인 과세의 문제도 그런 것 같다. 인간의 행위의 선택이 아주 중요하다. 인간이라는 것은 이전에 학습한 것을 바탕으로 뭔가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너무나 당연하게 짐작할 수 있듯이 배운게 그것뿐이니 항상 비슷한 행위를 하게 된다. 새로운 경로로 나아갈 수 없다. 바로 그 문제도 3부작에 나온다. 아가멤논과 클뤼타이메스트라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사실 자신들이 물려받은 판단 방식, 그리고 자신들이 행위 해오던 방식이다. 그러면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되지는 않는다. 새로운 경로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트로이아 원정을 떠났던 아가멤논이 돌아왔다. 그런데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뭔가 불만이 있고, 자기 정부인 아이기스토스와 짜고 아가멤논이 집에 돌아온 날 살해한다.
그렇게 된 것이 사실은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죽여야 원정에 갈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원한이 맺힌 것. 그런데 아가멤논은 '자기가 하던 대로' 한 것. 왕이니까 동맹의 서약을 져버리고 함대를 이탈할 수 없는 것. 공적인 대의를 명분으로 삼아서 했다. 그런데 그것이 모든 것을 사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클뤼타이메스트라에게는 불만의 원인이 되었던 것. 기존의 상황들은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운명의 멍에를 만드는 것. 사실은 그냥 눈딱감고 함대를 이끌고 나가지 않았으면 됐을 것이다. 메넬라오스와 헬레네가 결혼을 할 때 다들 약속을 했다. 메넬라오스가 문제가 생기면 도와주기로 한 것.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엉켰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의 이율배반이 아가멤논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깔끔하게 해결하는 방법이 클뤼타이메스트처럼 하는 것.
오레스테스 이야기의 첫행에서 파수병이 등장한다.
"신들이시여, 제발 이 고역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이게 단순히 아가멤논의 사건만 아니라 인간에게 놓여있는 복잡하고도 다양한 이율배반들이 놓여 있는 것. 이것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위력을 가진 이는 신 밖에 없는 것. 사실 그래서 이것이 비참함이다.
<아가멤논> 1~7행
파수병 신들이시여, 제발 이 고역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긴긴 한 해 동안 나는 망을 본답시고 개처럼
여기 이 아트레우스의 아들들의 지붕 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밤하늘 별들의 집회와,
인간들에게 겨울과 여름을 가져다주는
창공에 빛나는 저 찬란한 왕자들을 보아왔으며,
별들이 언제 뜨고 언제 지는지 알게 되었나이다.
주어진 어떤 물려받은 상황이 있는데, 거기에서 뭔가 변수가 생기면서 새로운 일을 저질렀는데, 아들과 딸들에게는 그것이 또 주어진 상황이 되고, 아들과 딸들은 또 새로운 사건을 일으킬 수 밖에 없고, 이렇게 해서 총합의 행위가 합리적인 일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고생을 하겠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는 오레스테스가 복수를 맹세한다. 아들에게는 엄마가 이제 원수다. 아버지를 죽이고 정부와 잘살고 있으니 말이다. 첫 행을 보면 "아버지의 권능을 지키시는 지하의 헤르메스여, 부디 내 편이 되어 나의 구원자가 되어 주소서!"라고 얘기한다. 이것은 분명히 오레스테스가 신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는 것. 헤르메스 신은 지상의 영역과 지하의 영역에 걸쳐있다. 헤르메스가 천사의 원조인데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다닌다. 헤르메스는 도둑의 신이기도 하다. 도둑은 남의 집 담장을 넘는다. 지하에 있는 헤르메스를 불러서 지상에 있는 나의 복수를 도와달라고 요청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복수를 요청하면서 바로 "부디 내 편이 되어 나의 구원자가 되어 주소서!"라고 말을 하는데 복수를 끝내고 나면 자기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레스테스의 굉장한 큰 착각인 것. 복수의 연쇄가 계속 되는 한 구원이 일어질 수 없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1~4행
오레스테스 아버지의 권능을 지키시는 지하의 헤르메스여,
부디 내 편이 되어 나의 구원자가 되어 주소서!
나는 추방되었다가 이 나라로 돌아와 여기 무덤가에 서서
내 말씀을 들어주십사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고 있나이다.
이제 세번째는 <자비로운 여신들>라고 하면서 평화의 메세지가 나오는 것 같다.
원래는 복수의 여신들이었다. 이 복수의 여신들이 오레스테스가 자기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를 죽인 다음에 그 어머니의 혼백이 복수의 여신들을 부른다. 아폴로 신전으로 도망간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 가 있기 때문에 오레스테스로서는 그 영역이 가장 안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폴론 신은 말한다. "그대는 그러한 고난의 풀밭으로 내몰리더라도 미리 지치지 말고, 팔라스의 도시로 가서는 탄원자로서 앉아 여신의 오래된 신상을 꼭 껴안도록 하라!"라고 말한다. 아테네로 가서 재판관들과 대화를 하라고 하면서 신전에서 쫓아낸다. 신에게 맡길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일단 광장에서 얘기를 하고 마지막으로는 아레오파고스 법정으로 가서 얘기를 해야 한다. 그 법정은 신전이 아니니 신이 없다. 아고라에도 사람이 있고 아레오파고스에도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서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울이 아테나이 사람들인 스토아 학자와 에피크로스 학자와 논쟁을 벌이는 장면은 아고라이고, 그 다음에 아레오파고스 법정에 가서 자신들을 합리적으로 설득하라고 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은 도대체가 아테나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오레스테스가 아레오파고스 법정까지 간 것은 인간이 해야 할 최후의 단계, 인간은 어쨌든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이고, 둘째로는 복수는 더이상 칼이 아닌 말로써 해야 한다는 것.
아폴론은 말한다. "우리는 이 사건의 재판관들과, 그들의 마음을 설득할 말들을 갖게 될 것이며, 이 노고에서 그대를 완전히 해방해줄 수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니라." 즉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복수다 아니다를 정하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행위 자체가 어떤 성격을 복수다가 아니라 복수가 아님을 설득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설득을 함으로써 복수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자비로운 여신들> 75~83행
아폴론 이들은 그대가 떠돌아다니게 될 대지를 끊임없이
거닐며 넓은 본토를 지나, 그리고 바다 위와
바닷물에 둘러싸인 도시들을 지나 그대를 뒤쫓을 것이니라.
그러니 그대는 그러한 고난의 풀밭으로 내몰리더라도 미리
지치지 말고, 팔라스의 도시로 가서는 탄원자로서 앉아
여신의 오래된 신상을 꼭 껴안도록 하라!
그곳에서 우리는 이 사건의 재판관들과, 그들의 마음을
설득할 말들을 갖게 될 것이며, 이 노고에서 그대를
완전히 해방해줄 수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니라.
재미있는 것은 아레오파고스 법정에서 오레스테스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가렸는데 가부동수가 나왔다. 이것은 두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데 하나는 당시의 아테나이 사람들도 반반씩 나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신 아테네가 나타나서 무죄라고 해준다. 신이 문제를 해결을 했으니 인간은 사실 여기서 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인간은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인간이 해결하려고 했다는데 의의가 있고, 또 신이 무죄라고 했으니 이제는 복수를 사적으로 하는 것은 그만두고 말로 하라는 격려의 말이었다고 이해하고 싶다.
무엇이 올바름인가라는 큰 물음이 있다. 그 큰 물음을 무엇이 올바름인지 대답하고, 그 올바름을 현실화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층위가 다른 문제들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시대적인 문제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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