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15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21장

❧ 데카르트와 근대인
“세상의 모든 경험을 끊고 자기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에 대해 열심히 찾아보고 궁리하고 성찰하여 자신이 유한함을 철저히 자각한 다음에, 바로 그때에 신이 있음을 말한다.”
“데카르트는 중세의 막내, 불안한 근대인이다.”


❧ 육체와 영혼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였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신을 만나는 것은 영혼이었다. 그러나 이 영혼은 ‘육체와 영혼’(corpus et anima)을 거쳐온 영혼이었다. 데카르트는 처음부터 육체를 떼어낸 영혼이다. 이 영혼은 ‘신이 있다’를 전제하지 않은 자기의식이다.”

 

2021.06.08 숨은 신을 찾아서 —15

⟪숨은 신을 찾아서⟫, 21,22장은 데카르트의 이야기이다. 기나긴 아우구스티누스를 지나서 데카르트로 왔는데 데카르트에 와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얘기가 계속되고 데카르트와 아우구스티누스를 계속 비교하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데카르트를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비교하고 있는 셈이다. 그만큼 아우구스티누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드러났던 여러가지 철학적 사유들이 데카르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결코 그러한 사유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데카르트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한다. 자기의식의 주관성의 출발점, 심지어 근대적 주체성까지 얘기하는데 얼마나 강력한 주체성이지는 모르겠고, 오히려 허약해 보이기는 것이 데카르트의 주체성이다. 차라리 23장에 나오는 오뒷세우스가 주체적이다. 내 꾀를 이용해서 뭔가를 하겠다는 태도. 시대가 꼭 그 사람을 오늘날에 가까이 올수록 더 주체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여기서 알 수 있다. 데카르트와 아우구스티누스를 좌우로 놓고 대조한다는 것, 그것이 21장이 가지고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와 아우구스티누스가 겹쳐져 있는 부분이다.

ⅩⅩⅠ 절대주권의 국가를 신약으로써 정당화한 홉스와 동시대인인 데카르트는, 책을 버리고 30년전쟁에 참전하여 세상을 겪었으면서도, 그 모든 겪음을 버리고 난롯가에 앉는다. '세상을 겪지 않은 나'가 되고자 한다. 그는 가톨리 교도이지만 아우구스티누스와는 아주 멀리, 시대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떨어져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하였다: "내가 당신을 알게 되기 이전에는 당신은 내 기억 안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고백록, 10,26,37)

홉스도 아무리 유물론 철학을 얘기했더라도 신적인 것을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여기서 신약이라고 할 때 信이지 God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계약만 가지고는 현실 세계의 국가제도를 정당화하기는 어렵다라는 것이 홉스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홉스와 동시대인이 데카르트다. 데카르트는 정말 극심한 혼란한 시기를 살았던 사람이고, 30년전쟁에 참전했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30년전쟁에 참전했는데도 그 모든 겪음을 버리고 난롯가에 앉아 세상을 겪지 않은 나가 되고자 한다.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선 가톨릭교도이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주 멀리 시대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떨어져있다. 이렇게 딱 운을 띄워놓고 아무 관계없는 것처럼 얘기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당신을 알게 되기 이전에는 당신은 내 기억 안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고백록, 10,26,37) 이 구절은 신을 알았을 때에야 비로소 신의 존재가 의미있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사실은 이미 있었던 것인데 모르고 있을 뿐이다. 데카르트는 얼핏 보기에는 자신이 신을 생각할 때에야 의미있는 존재이다, 신이 주어져 있지 않고 미리 않다는 것이 데카르트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이다.

ⅩⅩⅠ 자신이 신을 생각할 때에야 신이 의미 있는 존재이다.

오늘날 우리도 그렇다. 자신이 뭔가를 성취했다. 내가 다 한 것 같다. 이것이 주관성이고 주체성이다. 철없는 주체성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자신감에 넘친다. 자신이 신을 생각할 때에야 신이 의미 있는 존재이다. 이렇게 자신감에 넘치는데 조금 지나고 나면 그래도 신을 알고 나야, 신이 있어야만 내가 뭔가를 판단할 때 진리값이 보장된다고 다시 깨닫게 된다. 그래서 신이라는 것을 보장장치, 일종의 보험처럼 가지고 온다. 애초에 아우구스티누스처럼 했으면 좋았을텐데 그래도 그게 근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사유가 진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ⅩⅩⅠ 세상의 모든 경험을 끊고 자기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에 대해 열심히 찾아보고 궁리하고 성찰하여 자신의 유한함을 철저히 자각한 다음에, 바로 그때에 신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없었다. 신을 벗어나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유한함을 신의 무한함의 증거로 삼았다.

세상의 모든 경험을 끊고 자기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에 대해 열심히 찾아보고 궁리하고 성찰하여 자신의 유한함을 철저히 자각한 다음에, 바로 그때에 신이 있음을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아닌 것 같았는데 그는 자신이 없었다. 신을 벗어나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유한함을 신의 무한함의 증거로 삼았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자신있게 뭘 해봤는데 자신감이 없어진 것이다. 자신의 유한함을 신의 무한함의 증거로 삼았다. 이 부분이 아우구스티누스와 통하는 지점이다. 

ⅩⅩⅠ 그는 '자기'를 발견한 점에서는 근대인이었지만, 여전히 신을 버리지 못한 점에서는 중세인이었다. 데카르트의 동시대인인 파스칼은 아예 자기를 버린다. 그는 근대인도 아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신이라고 하는 공통규약을 가지고, 증명할 필요없이 밑바닥에 깔고 얘기할 수 있는, 그런 공통의 의사소통의 밑바닥의 전제를 가지고 살던 시대가 중세라면 그것이 사라져버린 시대이고, 각자가 알아서 유한함을 느끼든지 해서 신을 찾든지 해야 하는 시대, 그게 바로 분열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신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도시, 즉 '성도들의 도시’ 즉 신국에서 만날 수 있는데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안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가족들끼리 또는 국가에 헌신하는 것이다. 중세 사람들은 신에게 충성하지 국가에 충성하지는 않았다. 바로 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의 불안함을 끄집어 모아서 로마 교황이 자기의 위력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근대인들은 내가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면, 속한 것에 대해서 충성하는 것이다. 국가 안에 속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하려면 비국민을 쥐잡듯이 잡고,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중세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 데카르트만 해도 근대 국민국가라는, 데카르트가 프랑스 사람이라는 자각은 없었다. 그게 없던 사람이니까 이 사람은 중세의 막내이고 불안한 근대인이다.

ⅩⅩⅠ '신이 있다'를 전제하는 사람들은 서로 만날 수 있다. 그들이 만나는 곳은 '성도들의 도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였던 신국이다. 

그런데 세상살이를 겪어봐도 그렇게 겪은 세상이 그렇게 믿을만 하지 않다. 그러니 지금까지 말한 상황, 불안함, 고뇌 이런 것들을 스스로가 적어보는 것, 이것이 바로 《성찰》이다. 《성찰》은 철학고전 얘기를 할 때 말하였다. 여기서도 《성찰》이라고 하는 텍스트를 형이상학으로 보면 육체와 영혼, 이분법이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성찰》을 인간이 내가 어디서부터 앎을 출발시켜야 하는가, 즉 무엇에 바탕을 두고 앎을 만들어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하나의 자기존재의 근본에 대해 고민하는 텍스트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찰》을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ⅩⅩⅠ신의 현존을 확신하는 세계에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와, 신의 현존을 증명해야만 하는 세계에 사는 데카르트, '세상을 겪은 나'가 신을 찾았던 아우구스티누스와, '세상을 겪은 나'를 부정하고 세상과 단절한 내면이 신을 찾아 나서는 데카르트.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존재 증명을 할 필요가 없는데 데카르트는 신의 현존을 증명하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하지 않은 짓을 한다. 다시말해서 신의 현존을 확신하는 세계에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와, 신의 현존을 증명해야만 하는 세계에 사는 데카르트, 다르다. 또 '세상을 겪은 나'가 신을 찾았던 아우구스티누스와, '세상을 겪은 나'를 부정하고 세상과 단절한 내면이 신을 찾아 나서는 데카르트. 다르다. 똑같이 신을 찾아도 어떤 과정을 겪어서 신을 찾으려고 하는가가 다르다. 

데르트는 나 자신이 굉장히 하찮아 보이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다. 데카르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 그렇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물어봐야 한다. 서로 공통규약이 없으니까 오늘날의 우리도 그렇다. 기본적으로는 불안한 시대이다. 안심과 안정이 없는 시대.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기 이전에 내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것을 데카르트가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ⅩⅩⅠ 세계와의 관계 이전에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는 상태이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으므로 타인을 비롯한 세계와의 연관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다. 자기의식의 불안이 먼저이다. 내가 과연 나인가? 나는 언제나 나인가? 언제나 나이고 싶은데 언제나 나일 수 없다. 

도대체 나라고 하는 것을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지 모른다.

ⅩⅩⅠ 내가 나임을 알아내는 기준이나 나 이외의 곳에는 없으니, 내가 나를 기준으로 나의 정체성을 확정할 수밖에 없다. 데카르트는 아예 나의 정체성의 불안정을 신의 존재근거로 삼는다.

굉장히 비겁하다. 내가 불안하니까 신이 있는 것이겠지. 쉽게 가버린다. 

ⅩⅩⅠ 인간의 유한함을 깨닫는 순간이 신의 무한함을 아는 순간이라는 억지를 내세우고, 스스로는 자기 안에 가두었던 시작을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신의 보장을 얻었다고 확신하면서. 이것은 무모한 자기의식의 외화外化이다.

자기 의식을 바깥으로 투사시키는 것이 자기의식의 외화인데, 여기에 무모하다고 붙여놨다. 데카트르도 무모하고 근대인도 무모하다. 그런데 적어도 데카르트는 자기가 무모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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