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12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15강

❧ 이론과 실천
이론은 본질 존재인 상재相在(Sosein)를 지적으로 파악하는 것, 실천은 자신이 처해 있는 실제 상태인 정재定在(Dasein)를 변경하는 것.
교육은 이론과 실천에 대한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것

❧ 혼의 전환, 실재로 향한 등정
“밤과도 같은 낮에서 진짜 낮으로 향하는 ‘혼의 전환’(psychēs periagōgē)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지혜의 사랑)이라고 우리가 말하게 될 실재(to on)로 향한 등정(오름: epanodos)일 것 같으이.”

❧ 본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걸 보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보고서 자신을 거기에 정착시키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하늘에 본(paradeigma)으로서 바쳐져 있다네.”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12

오늘은 《철학고전강의》 제15강, 플라톤을 다루는 챕터의 마지막이다. 아는 것과 하는 것, 다시말해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주제가 철학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것인데, 다르게 말하면 우스개 소리로 하자면 아직 해결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철학은 해결을 보지못한 것들 투성이인데 그 중에서도 해결이 나지 않은 문제만을 주로 다룬다. 그래서 하더라도 완결이 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인생에서 정답을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면 왜 다루는가. 어떻게 하면 잘 다룰 수 있을까를 계속해서 궁리를 해보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 부분을 소크라테스가 제기를 하긴 했는데 서양철학에서는 플라톤이 규모있게 논증을 한 바 있다. 그 부분이 가장 잘 나와있는 부분이 앞서 읽은 동굴의 비유에서 이어지는 부분이다. 원문을 읽어가면서 설명하겠다.

"지금의 논의는 각자의 혼 안에 있는 이 '힘'(dynamis)과 각자가 이해하는 데 있어서 사용하는 기관(수단:organon)을" 힘이라고 하는 것은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지성의 힘은 무언가를 잘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향을 우리가 향하게 하는가 이게 바로 지성의 힘이다. "이를 테면 눈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하는 것은 몸 전체와 함께 돌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듯",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하는 것은 그냥 고개를 돌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돌려야 한다. 몸 전체로 표현하는 것은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혼 전체와 함께 생성계에서 전환해야만 된다는 걸 시사하고 있네." 생성계는 늘 변화하는 것, 다르게 말하면 진리가 아닌 영역. 진리가 아닌 영역에서 정신을 진리인 영역으로 향해 가야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그러니까 바로 이것의 전환(Periagōgē)에는 방책(기술:technē)이 있음직하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하면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전환하게 될 것인지와 관련된 방책 말일세." 방책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바르게 방향이 잡히지도 않았지만, 보아야 할 곳을 보지도 않는 자에게 그러도 해주게 될 방책" 참 어려운 것이다. 보아야 할 곳을 보지도 않는 자에게 그러도 해주게 될 방책. 

제15강 164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논의는 각자의 혼 안에 있는 이 '힘'(dynamis)과 각자가 이해하는 데 있어서 사용하는 기관(수단:organon)을, 이를 테면 눈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하는 것은 몸 전체와 함께 돌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듯, 마찬가지로 혼 전체와 함께 생성계에서 전환해야만 된다는 걸 시사하고 있네. 
[…]
"그러니까 바로 이것의 전환(Periagōgē)에는 방책(기술:technē)이 있음직하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하면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전환하게 될 것인지와 관련된 방책 말일세. 이는 그것에만 보는 능력을 생기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능력을 지니고는 있되, 바르게 방향이 잡히지도 않았지만, 보아야 할 곳을 보지도 않는 자에게 그러도 해주게 될 방책일세." ━ 《국가》 518b~518d

인간에게는 지성의 힘이 있고 그것을 사용하는 일종의 기관이 있는데, 기관이 올바른 교육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파이데이아이다. 165페이지를 보면 중요한 표현이 하나 있는데 "자신이 처해 있는 실제 상태인 정재定在(Dasein)의 변경, 즉 실천". 실천은 정재의 변경이다. 현재 자신의 모습, 실존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데 '정'이라고 하는 것이 규정하다는 말이다. 규정된 존재를 변경하는 것이 실천이다. 단순히 이렇게 저렇게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에 따라서 변경하는 것이 실천인데, 그 기준은 상재相在(Sosein), '상'은 서로 상을 써서 마땅한, 당위인 것, 당위 실재, 그게 바로 상재이다. 그러면 상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상재를 파악하는 것 그것이 이론이다. 이론은 상재의 파악이고 실천은 정재의 변경이다. 현재 나의 상태는 메롱의 상태이다. 그러면 메롱의 정재에서 올바른 상재로 가고 싶으면 상재를 알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상재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도 벌써 그때부터 바야흐로 정재의 변경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아직 상재를 알지 못하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이건 아니다라는 것을 아는 단계, 그러면 벌써 희미하게나마 상재를 향한 움직임이다. 다시말해서 이론적 탐구가 시작되는 것이다. 메롱 상태임을 자각한 정재, 그러면 벌써 정재가 바뀌었다. 정재가 변경되었으니 실천이다. 따라서 실천이나 이론이나 여기까지가 실천 여기가까지 이론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론과 실천은 인간의 넓은 의미의 행위의 두 측면이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아니요라는 하는 대답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반어법을 사용한다고 한다. 이게 현재의 상태, 정재의 상태에서 대해서 한번 돌이켜 생각해보게 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하는 대화법이다.

제15강 165 자신이 처해 있는 실제 상태인 정재定在(Dasein)의 변경, 즉 실천입니다. 인간은 진리인 상재相在(Sosein)를 파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비추어 자신의 정재를 변경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이 여기서 하는 말은, 본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정재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 실천인데 실천이 한 번에 한번에 안된다. 그래서 순서가 있다. 첫째 가장 밝은 것을 관상하고, 그 다음에 보아야 할 곳을 보지도 않는 자에게 그러도록 해주는 방책, 이것이 첫번째이다. 그리고 그것을 타고난 힘의 방향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 실천이다. 이것을 꼭 유념해 두어야 한다. 그런데 플라톤에서는 각각의 개인 한 사람이 해서만은 되는 것이 아니니까 집단에서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한 나라에서의 올바름이 세팅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법은 시민들을 설득과 강제에 의해서 화합하게 하고, 각자가 공동체(to koinon)에 이롭도록 해줄 수 있는 이익을 서로들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법이라는 것이 단순히 법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법은 넓은 의미에서 규범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설들과 강제가 포함된다. 이런 철학적 통치자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그런 것이다. 관상적인 삶과 실천적인 삶을 동시에 살아간다. 말로는 나눌 수 있지만 우리의 삶 안에서는 하나가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혼의 전환(psychēs periagōgē)이고 실제를 향한 등정(epanodos)이다.

제15강 168 "여보게, 자넨 또 잊었네. 법(nomos)는 이런 것에, 즉 나라에 있어서 어느 한 부류가 각별하게 잘 지내도록(살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이것이 실현되도록 강구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는 걸 말일세. 법은 시민들을 설득과 강제에 의해서 화합하게 하고, 각자가 공동체(to koinon)에 이롭도록 해줄 수 있는 이익을 서로들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그런다네." ━ 《국가》 519d~520a

제15강 168 철학적 통치자는 관상적인 삶(theoretikos bios)과 실천적인 삶(praktikos bios)을 동시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론(관상)과 실천은 말로는 나뉘지만 삶 안에서는 하나가 됩니다. 

제15강 169 “밤과도 같은 낮에서 진짜 낮으로 향하는 ‘혼의 전환’(psychēs periagōgē)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지혜의 사랑)이라고 우리가 말하게 될 실재(to on)로 향한 등정(오름: epanodos)일 것 같으이." ━ 《국가》 521c

번뇌하는 사람을 이끌어 주고, 더 나아가 공동체를 통치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교육은 이런거다 라고 한 다음에 《국가》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교육과정들을 설명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걸 보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보고서 자신을 거기에 정착시키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하늘에 본(paradeigma)으로서 바쳐져 있다네."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적 통치자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철학 공부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 두어야 한다. 

제15강 173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걸 보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보고서 자신을 거기에 정착시키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하늘에 본(paradeigma)으로서 바쳐져 있다네. 그러나 그게 어디에 있건 또는 어디에 있게 되건 다를 게 아무것도 없으이. 그는 이 나라만의 정치를 하지, 다른 어떤 나라의 정치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네." ━ 《국가》 592b

175페이지의 마지막 문단을 읽어보겠다. "철학적 통치자뿐만 아니라 인간은 '힘'(dynamis)을 가지고 있어서 상재相在, 즉 본질적 존재를 파악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 즉 정재定在를 변경시켜야만 합니다. 상재의 파악은 이론이고, 정재의 변경은 실천인데, 이러한 이론과 실천, '실천을 통한 이론', '이론을 위한 실천'은 인간 개인이 아닌 정치적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좋음의 이데아를 중심으로 한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이처럼 이론과 실천이 중첩되는 차원에 놓여있습니다." 여기에 한마디 붙이려고 했었다. "그래서 실패한 것입니다." 엄밀학 학으로서 형이상학이 실패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어디서부터 이론이고 어디서부터 실천인지를 딱 잘라서 경험데이터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래서 과학적으로는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아포리아, 난문이다. 계속해서 되풀이해서 물어볼 수밖에 없는. 

제16강 175 철학적 통치자뿐만 아니라 인간은 '힘'(dynamis)을 가지고 있어서 상재相在, 즉 본질적 존재를 파악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 즉 정재定在를 변경시켜야만 합니다. 상재의 파악은 이론이고, 정재의 변경은 실천인데, 이러한 이론과 실천, '실천을 통한 이론', '이론을 위한 실천'은 인간 개인이 아닌 정치적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좋음의 이데아를 중심으로 한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이처럼 이론과 실천이 중첩되는 차원에 놓여있습니다.

다음부터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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