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14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18강(1)

❦ 형상에 관한 이론들
실재론: 형상(외부)실재론, 형상내재론
유명론: 형상시원론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
플라톤: ’사물 바깥에 실체인 형상이 따로 떨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상이 사물들의 실체이려면 그것이 사물들과 분리되지 않고 사물 안에 있어야 한다.

❦ 플라톤 철학의 성립 근거
“‘집’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기 위해 지었다 허물어버릴 수 있는 단순한 건물들에 대한 지칭이어서, 그런 건물들에 대해 우리가 갖는 공통된 이해나 관념은 단순히 개념에 불과한 것인가? 만약이 이 물음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으로 끝내버리면, 플라톤 철학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다’고 대답하는 셈이다. 개별적 사물을 사물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형상인데, 그 형상이 어떻게 그 사물 밖에 따로 있겠느냐면서 플라톤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14

《철학고전강의》 18강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을 다루는 세번째 챕터를 읽는다. 16,17강은 상대적으로 수월한데 18강은 분량이 많다. 플라톤은 대화편을 읽기가 상당히 쉽다. 그것 자체로 상황 속에서 드라마처럼 만들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강의록이다 보니 쉽지 않다. 형상의 분리와 내재를 다루는 18강과 학의 성립에 관한 물음, 보편적 존재론과 신학의 관계, 그리고 실체론, 이것과 무엇, 운동론, 가능태와 현실태 이렇게 18~21강 네 부분은 시험을 봐서 외워야 하는 부분이다. 형이상학의 내용이지만 기본적으로 여러가지 학문에 관한 뼈대를 다루고 있어서 충실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오늘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뼈대는, 우리가 눈 앞에 보이는 이런 사물들은 계속 변화한다. 가변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다. 봄이 되니까 꽃이 핀다. 진달래라고 하는 것은 이름이고, 각각의 꽃은 진달래꽃1, 진달래꽃2, 진달래꽃3 굉장히 많은 진달래가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통칭해서 진달래라고 이름을 붙인다. 누군가가 진달래 그 자체가 어디있냐고 물으면 보여줄 수 없다. 상식적으로 질문을 해보면 이러이러하게 생긴 것을 가지고 진달래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 꽃이 진달래이게 해주는 것이 있고, 그것으로 해서 형상, 속성으로 해서 이것을 개나리와 구별해준다. 진달래이게 하는 것, 진달래임, 또는 진달래 그 자체와 각각의 개별적인 진달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물어볼 수 있다. 이때 어떤 사람은 본래 진달래를 진달래이게 해주는 것이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간다. 예를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이지만 하느님이다. 그러면 하느님의 속성이 있다고 말하면 안믿겨진다. 삼위일체 논쟁, 그것도 결국은 불변하는 것과 변화하는 것을 둘러싼 논쟁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이 들어가 있다고 말해버리면 별도의 형상이 있는 것이고, 진달래 자체가 따로 있어서 개별 진달래 안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따로 있지 않고 꽃들 안의 속성들을 묶어서 속성들에다가 진달래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는 뒤에 것이 더 합리적이다. 간단히 말하면 진달래 자체가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플라톤이고, 그것은 이름일 뿐이고 속성들의 묶음을 진달래라고 부른다라고 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형상에 관한 플라톤의 입장은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사물 바깥에 실체인 형상이 따로 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대화편을 살펴보면, 《파이돈》에서는 형상실재론과 형상시원론이 혼재하고 《국가》를 거쳐서 《필레보스》 등에 이르면 형상실재론의 입장이 고수됩니다. " 형상실재론은 따로 있다는 것이고, 형상시원론은 논의를 위한 출발점으로서 개념을 사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대체로 후기의 대화편들인 《국가》를 거쳐서 《필레보스》가 형상실재론이라고 한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후기 형상실재론을 플라톤의 일관된 주장으로 파악하고 "'사물과 떨어져서 사물 외부에 실체인 형상이 실제로 있다', 이것이 플라톤의 입장이라고 정리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플라톤의 대화편 전체에 나타난 것을 논의한 것이 아니라 플라톤은 형상실재론이라고 정해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 사물들의 실체이려면 그것이 사물들과 분리되지 않고 사물 안에 있어야 한다는 형상내재론을 주장하려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형상(외부)실재론, 형상이 바깥에 따로 있다, 플라톤, 형상시원론, 논의를 위한 이름일뿐이다, 이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아니다, 그리고 형상내재론,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 이렇게 형상에 관한 세 가지 논의를 갖게 된다. 나중에 중세 말에 보편논쟁이 있다. 실재론과 유명론, 실재론은 실재로 있다고 하는 플라톤의 형상실재론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크게 보면 실재론은 형상이 따로 있다는 것도 실재론이고, 형상이 있긴 있는데 각각의 사물 안에 있다고 하는 것도 실재론이다. 실재론이 맨 위에 있다. 실재는 '실제로 있다', 바깥에 있다고 하면 형상외부실재론, 형상이 안에 있다고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형상내재론, 이를 묶어서 실재론이라고 한다. 유명론은 그냥 이름일뿐이다라고 말하는 형상시원론이다.

제18강 202 형상에 관한 플라톤의 입장은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사물 바깥에 실체인 형상이 따로 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대화편을 살펴보면, 《파이돈》에서는 형상실재론과 형상시원론이 혼재하고 《국가》를 거쳐서 《필레보스》 등에 이르면 형상실재론의 입장이 고수됩니다. '사물과 떨어져서 사물 외부에 실체인 형상이 실제로 있다', 이것이 플라톤의 입장이라고 정리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 사물들의 실체이려면 그것이 사물들과 분리되지 않고 사물 안에 있어야 한다는 형상내재론을 주장하려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형상(외부)실재론, 형상시원론, 형상내재론, 이렇게 형상에 관한 세 가지 입장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여섯개의 물음이 있다. 그 중에 8번 "(viii) 개별적인 것들과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절실한 물음이라고 했는데, 왜 절실한가, 플라톤이 이렇게 주장했기 때문에 이것을 논의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형상이 있긴 있는데 별도로 있다고 하는 것이 플라톤. 형상이 있긴 있는데 각각의 사물 안에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형상이 뭔가에 대해서 알려면 플라톤의 경우에는 각각의 사물을 뒤져봐야 소용없고 저 하늘에 있겠지 하고 찾아보러 다녀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라면 우리 눈 앞에 놓여 있는 자연의 사물을 뒤져보면 알 수 있다. '침대는 가구다'라고 하면 가구라는 개념을 아무리 분석해서도 침대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우리 눈 앞에 침대라는 것을 뜯어봐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이다. 그 지점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형상(외부)실재론, 형상시원론, 형상내재론 이런 것들이 용어가 복잡할 뿐이지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구별되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유들 가운데 첫째 가는 것들을 원리들이라고 불어야 하는가 아니면 불가분적인 것들에 대해 술어가 되는 최종적인 것들을 원리들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첫째가는 것들(ta prota)은 모든 것들에 대해 술어가 되는 '있는 것'이나 '하나' 등을 가리킵니다. 사실 둘 다 원리들이라고 불어야 한다. 그런데 형이상학 998b에 있는 얘기들을 보면 "언제나 보편자들이 더 높은 수준의 원리들이라면, 유들 가운데 최상의 것들이 원리들일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든 것들에 대해서 술어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최상의 것들이 원리인데 모든 것들에 대해서 술어가 된다는 말에 핵심이 있다. 모든 것들에 대해서 술어가 된다, 가령 있음에 대해서 얘기하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술어가 된다. 책이 '있다', 꽃이 '있다'. 있음이라는 것, 존재라는 것이 원리가 된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있다고 할 때 있다라는 것을 계속 분석한다고 해서 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사물 안에 있는 구체적인 원리들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제18강 198 "유들 가운데 첫째 가는 것들을 원리들이라고 불어야 하는가 아니면 불가분적인 것들에 대해 술어가 되는 최종적인 것들을 원리들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첫째가는 것들(ta prota)은 모든 것들에 대해 술어가 되는 '있는 것'이나 '하나' 등을 가리킵니다. '있는 것'은 존재를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중 가장 범위가 넓습니다. "최종적인 것들"은 더 이상 쪼개질 수 없고, 제일 마지막에 이른 것입니다. 즉 개별적인 것들에 대해 술어가 되는 '사람', '말', '소' 같은 것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들이 그 형상을 부인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 집(oikia, oikos)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집이라고 하면 집의 형상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살도록 지은 건물'인데, 이를 가리키는 말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렇다면 '집'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기 위해 지었다가 허물어 버릴 수 있는 단순한 건물들에 대한 지칭" 이게 유명론, 형상시원론이다. 집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대화를 하기 위해서 필요해서 규약으로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건물들에 대해 우리가 갖는 공통된 이해나 관념은 단순히 개념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 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이 이 물음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으로 끝내버리면, 플라톤 철학은 없다." 플라톤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거짓말이야, 사기야라고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실재론을 부정해버리면 된다. "이런 생각을 해보자. 저 원시 시대의 태곳적부터 인간은 주거 공간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집은 물론 집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닌 건 분명한 일이다." 이렇게 역사적 논변을 가져와도 집이라고 하는 것은 공통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논파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플라톤 철학은 집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한 건물에 대한 지칭이고 우리가 갖는 공통된 이해나 관념은 단순히 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라고 하는 형상이 실제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플라톤은 왜 이것을 실제한다고 이야기했을까? 플라톤이 살던 시대에 이것은 진실이야 하고 약속한 것들이 깨져나가면서 그런 것을 봐서 그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제18강 199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들이 그 형상을 부인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 집(oikia, oikos)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집에 대한 사전적 의미 규정은 '사람이 살도록 지은 건물'일 것이고, 말을 갓 배운 아이들도 그런 건물에 대해서 몇 번 '집'이라는 지칭을 하는 것 듣게 되면, 집에 대한 개념을 그 나름으로 형성해서 갖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집'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기 위해 지었다가 허물어 버릴 수 있는 단순한 건물들에 대한 지칭이어서, 그런 건물들에 대해 우리가 갖는 공통된 이해나 관념은 단순히 개념에 불과한 것인가? 만약이 이 물음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으로 끝내버리면, 플라톤 철학은 없다. 그런데 왜 플라톤 철학은 오늘날까지도 연명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해보자. 저 원시 시대의 태곳적부터 인간은 주거 공간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집은 물론 집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닌 건 분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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