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역사 고전 강의 — 15 / 제11강(2)

 

⟪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제11강(2)

❧ SPQR의 와해
‘세나투스 포풀루스크 로마누스Senatus Populusque Romanus’
시민의 몰락이 초래된 사건의 출발점으로서의 포에니 전쟁(서기전 264년 - 서기전 146년)


❧ ‘일인자 시대’
포풀라레스populares와 옵티마테스optimates, 즉 평민파와 귀족파의 대립
‘마리우스의 당나귀’

 

2021.09.07 역사 고전 강의 — 15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는 `로마 공화정 말기에서 제국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일어난 사태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로마혁명기라고 부르는 시대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가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151페이지를 보겠다. "로마공화정 말기는 서기전 133년부터 서기전 27년까지입니다. 이 시기의 로마는 희랍 세계가 몰락하던 시기와 비슷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섣불리 역사가들은 특정한 체제가 몰락하는 모습들에서 공통점을 뽑아내서 그 공통점을 가지고 일종의 몰락의 법칙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역사적인 사건들은 실제로는 한 번 일어난 것이다. 단 일 회에 걸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사례를 가지고 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한다. 그런데 그와 유사한 사건들이 여러번 일어나서 그런 것을 가지고 일종의 법칙을 끄집어 내려고 한다. 특히 중앙아시아의 조그만 구석지에서 있었던 조그만 도시국가가 몰락한 것은 법칙을 만드는 사례로 거론되지도 않는데 로마공화정처럼 번성했던 그리고 문명이 조금 장대했던 그런 나라들을 가지고 얘기할 때는 법칙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일회적인 것뿐이다 라는 것을 깜빡하게 된다. 한 개인의 인생도 수없이 많은 사태들이 작용해서 결과가 만들어지는데 하물며 역사적 사건은 오죽하겠는가. 

제11강 151 로마공화정 말기는 서기전 133년부터 서기전 27년까지입니다. 이 시기의 로마는 희랍 세계가 몰락하던 시기와 비슷한 모습을 보입니다. 

로마공화정 말기에는 힘있는 사람들이 군인을 모집했다.  카이사르, 술라, 폼페이우스, 크랏수스 이런 사람들이 독자적인 군단을 거느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일인자 시대'라고 불린다. 아우구스투스가 '존엄한 자'라는 호칭을 받는 것으로 일단락되는데, 이때가 이 해가 서기전 27년이다. 이때부터 사실상 제정이 시작된다. 로마공화정 말기는 이 시기를 내전의 세기라고 부른다. 서기전 133년은 티베리우스 그락쿠스가 평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호민관에 선출된 해이다. 이때부터 어마어마한 갈등과 대립이 시작된다. 문제는 토지이다. "빈민의 토지 확보를 목표로 공유지 점유 면적을 제한하는 개혁에 착수했으나 반대파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그락쿠스는 호민관이기 때문에 평민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사람이다. 로마의 그락쿠스 형제가 토지 개혁을 추진하게 된 것은 아주 당연하게도 전쟁 때문이다. 농민들이 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때는 직업적으로 전쟁에 몰두하는 직업군인, 상비군이 없던 시대이다. 상비군이 없으니까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와 같은 사람들이 내가 월급을 줄 테니 싸움질을 전문적으로 해라 하는 사람이 만들어지게 된다. 평민과 귀족 사이의 차이점도 땅 때문에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법칙을 하나 내놓았는데 "역사 책을 읽을 때 토지 문제를 둘러싸고 대규모의 변화가 일어나면 그때는 바로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입니다." 그래놓고 예를 들기를 "근대 초기를 공부할 때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자본주의의 등장에서 반드시 거론되는 것이 공동으로 이용했던 토지에 울타리를 쳐서 사유지로 만든 엔클로저 운동입니다." 일종의 법칙이라고 해도 된다. 토지 문제를 둘러싸고 대규모의 변화가 일어나면 그때는 바로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 중요한 부분이다. "그락쿠스 형제는 지배층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공유지 중에서 법정 한도를 넘은 땅을 회수해 토지를 잃은 농민에게 재분배하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재분배 정책이 유야무야되었고 귀족의 대토지 소유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다. 

제11강 152 로마 공화정 말기는 '내전의 세기'로 불립니다. 서기전 133년은 티베리우스 그락쿠스가 평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호민관에 선출된 해입니다. 그는 빈민의 토지 확보를 목표로 공유지 점유 면적을 제한하는 개혁에 착수했으나 반대파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지 개혁입니다.

제11강 152 이 갈등이 심해지자 그락쿠스 형제가 토지 개혁을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 책을 읽을 때 토지 문제를 둘러싸고 대규모의 변화가 일어나면 그때는 바로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입니다. 나중에 근대 초기를 공부할 때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자본주의의 등장에서 반드시 거론되는 것이 공동으로 이용했던 토지에 울타리를 쳐서 사유지로 만든 엔클로저 운동입니다. 그락쿠스 형제는 지배층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공유지 중에서 법정 한도를 넘은 땅을 회수해 토지를 잃은 농민에게 재분배하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앞서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은 전쟁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로마 공화정 또는 로마 제국,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본다면 가장 중요한 사건을 하나를 꼽는다면 포에니 전쟁이다. 서기전 264년에서 서기전 146년까지이다. 그런데 앞서서 그락쿠스가 평민의 권익을 옹호하려는 호민관에 선출된 해가 133년이다. 그러면 포에니 전쟁 13년 이후에 호민관에 선출된 것이다. 따라서 티베리우스 그락쿠스가 토지 개혁을 마음먹게 된 것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적어도 토지 문제라는 것은 굉장히 오랫동안 쌓인 문제 때문에 일어난다. 포에니 전쟁은 전쟁을 백년이 넘게 했다. 전재을 거치면서 로마가 지중해를 우리들의 바다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공화정 체제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나 제정으로 발돋음하기 시작했고 제정이라고 하는 것은 공화정 체제로는 해결할 수 없는 여러 상황들이 누적되어서 공화정이라는 정치체제를 가지고는 안되는구나 할 때 제정으로 가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굉장한 업적으로 남긴 사람이라고 해도 '아우구스투스의 문턱'이라는 말이 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아우구스투스의 문턱은 투퀴디데스의 덫처럼 고대사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어쨌든 백년 넘게 전쟁을 치르면서 로마는 공화정 체제에서 벗어나 제정으로 발돋음하기 시작했는데 그와 동시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겨난 것이 "소농의 토지 상실과 농업의 황폐화"이다. 정복 전쟁이 계속되자 평민 지도자들이 몰락하고 장군이 유력한 정치가 집단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11강 153 포에니 전쟁은 서기전 264년에서 서기전 14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벌어졌습니다. 100년 넘게 전쟁을 치르면서 로마는 공화정 체제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나 제정으로 발돋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농의 토지 상실과 농업의 황폐화가 나타났습니다. 또한 정복 전쟁이 계속되자 평민 지도자들이 몰락하고 장군이 유력한 정치가 집단으로 부상했습니다.

포에니 전쟁이 일으킨 효과를 다음 문단에서 정리했다. 첫째, 장군들이 정치지도자로 올라섰기 때문에 군사 군주정의 조짐을 보였다. 이게 로마가 서구 세계에 남긴 정치적인 유산 중에 하나이다. 이때부터 정치 지도자는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정해진 답처럼 되어버렸다. 둘째가 소농의 몰락이다. 이 두 개는 당연히 결합된 현상이다. 그리고 전쟁터에 가서 전쟁만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자기 고향이 낯설게 된다. 생활세계가 바뀌고 전쟁을 치르던 땅에서 정착을 하는게 좋겠다고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농사짓던 땅에 대한 애착이 있어야 애국심도 생기는 것이고 정치체제가 유지되는 것인데 20년 넘게 전쟁터에 나갔으니 그냥 그 땅에서 사는 것이다. 그 다음에 속주의 농토 및 농산물에 의한 경제구조의 왜곡이다. 식민지에서 물자가 들어오고 노예가 들어온다. 당연히 귀족들은 노예를 가지고 경작을 하게 된다.  값싼 농산물이 들어왔고 노예가 들어왔고, 라티푼디움 Latifundium, 대토지 소유제가 들어오게 된다. 포에니 전쟁이 로마를 지중해 패권을 잡는 중요한 전쟁이었지만 동시에 로마는 그것으로 인해 그 이전과는 아주 다른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SPQR, Senatus Populusque Romanus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 로마의 국호이다. 시민이 몰락해 버렸으니 당연히 이제는 원로원 중심이 된다. 원로원은 합의제에 의해서 운영되는데 대표적인 원로원이 키케로이다. 역사에서는 키케로가 패배자처럼 그려지지만 서로마까지 포함해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가이자 변론가이자 학자. 

제11강 154 'SPQR'이라는 약자가 있습니다. 이는 '세나투스 포풀루스크 로마누스 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약자로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이라는 뜻입니다. 로마 정부의 공식 표어인 이 말은 로마 공화정이 원로원과 시민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154페이지 아래 문단이 폴리스가 가지고 있는 네 가지 의미를 설명했는데 하나하나 기억해두면 좋겠다. 폴리스는 사람들이 모여살던 공간이고, 그런 공간에 붙어있던 말이 나중에는 공동체 자체를 가리키는 추상적인 개념이 되었다. 그리고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인민, 마지막으로 삶의 기술을 가리킨다. 로마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SPQR이라는 말에서 특정한 지역을 가리킬 수도 있고, 로마라고 하는 나라를 가리키는 추상적인 개념이 되기도 하고,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원로원과 시민을 가리킬 수도 있고, 로마적인 삶의 방식 modus vivendi. 그런데 로마 인민이라고 하는 것, 포풀루스가 사라졌으니 당연히 로마적인 삶의 방식도 달라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내전의 세기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세나투스와 포풀루스 간에 투쟁이 벌어진다. 로마는 원로원과 시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로마를 구성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세나투스와 포풀루스, 그런데 세나투스와 포풀루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은 SPQR이 무너지는 것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로마는 사실상 SPQR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한다. 그런데도 SPQR라고 쓰는 것은 가식이다. 세나투스와 포풀루스 간의 투쟁은 토지 문제와 그것에 근거한 재산권이 근본적으로 개혁되는 사회혁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중간 과도기가 바로 내전의 세기이다. 오히려 포풀루스의 불만을 흡수해서 자신의 세력을 키운 일인자의 시대로 귀결되었다.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이 이루어졌으면 사회 혁명이 성취되었으면 여전히 로마는 원로원과 시민의 나라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시민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락쿠스 형제의 개혁이 성취되었다면 아마 로마는 더 이상 제국으로 유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점에서 로마혁명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이 로마공화정이라고 하는 것으 유기적으로 이어붙였다면 일인자 시대의 로마는 포풀라레스 populares와 옵티마테스 optimates, 즉 평민파와 귀족파의 대립이 나오는데 가만히 보면 평민파는 시민이고, 옵티마테스는 원로원파인 것 같은데 평민파는 말만 평민파일뿐 이 세력을 이끈 사람들은 카이사르와 같은 귀족들이었다. 사실은 하층민을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을 조직한 것입이다. 이게 심각한 것이다. 포풀라레스와 옵티마테스의 대립은, 실제로는 귀족들 간의 싸움이다. 하층민들은 졸개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아테나이와 비교해서, 아테나이는 에개 해의 패권을 잡으면서 부가 늘어났고, 부를 유지하려면 무력으로 주변 폴리스들을 위협하고 군사적 헤게모니를 유지하면서 돈을 거둬야 하고, 군사 국가가 되어야 하는데 이게 로마도 마찬가지 일이 되었다. 그런데 아테나이와 로마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로마는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났다. 그게 바로 157페이지에서 설명한 마리우스의 당나귀라고 불리던 장비이다. 마리우스가 로마 군대를 개혁한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로마가 제정으로 갈 수 있었던 군사적 전환점이 마리우스라고 생각한다. 

제11강 155 세나투스(원로원)와 포풀루스(시민/하층민)의 투쟁은, 토지 문제와 그것에 근거한 재산권이 근본적으로 개혁되는 사회혁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내전의 시기'는 포풀루스의 불만을 흡수해서 자신의 세력을 키운 일인자의 시대로 귀결되었습니다.

제11강 156 이 시기의 대립은 포풀라레스populares와 옵티마테스optimates, 즉 평민파와 귀족파의 대립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평민파는 말만 평민파일 뿐 이 세력을 이끈 사람들은 카이사르와 같은 귀족들이었습니다. 사실은 하층민을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을 조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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