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15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18강(2)

❦ 종과 유의 관계
‘침대는 가구다.’ 즉 ‘침대에는 가구임이 속한다.’는 명제 분석
종은 각각의 개체이고 이 개체를 개체이게 하는 내재적 구성성분과 구성방식은 개체와 함께 변화하고 소멸한다.
종은 그것의 상위에 있는 유에 속하며, 이를 탐구하는 것은 학문의 성립에서 필수적인 조건이다.
유는 규정(horismos)으로써 설명을 하려는 설명원리(인식원리)이다. 이것은 보편적 술어에 불과할 수도 있다.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15

《철학고전강의》 18강을 해설하는 두번째 시간이다. 형상의 분리와 내재가 제목이다. 그래서 형상이라고 하는 것과 우리가 각각의 개체, 특수자, 개별존재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각각의 것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이 장의 주제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 사물들의 실체이려면 사물들과 분리되지 않고 사물 안에 있어야 한다는 형상내재론을 주장하려 한다고 말했다. 플라톤의 경우에는 형상(외부)실재론, 형상실재론은 일반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다 가리키는데 좁게 말할 때는 플라톤을 가리키고 형상내재론이라고 말을 할 때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킨다. 오늘 얘기를 들어보면 둘 다 맞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왜 철학자들은 이해하기 쉬운 것을 말하지 않고 어렵게만 말하는가.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을 만한 얘기를 하고 싶으니까 자꾸 복잡하게 보이지만 범위가 넓은 얘기들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설명할 부분에도 예를 들어서 말하고 있다. 강유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강유원이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유일무이한 존재로 산다. 각각의 유일무이한 존재들. 강유원이라는 사람을 설명하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강유원에 대해서 묘사를 한다고 하면 강유원은 강유원이다 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강유원은 OO이다라는 명제 형식을 생각해보자. 동어반복만큼 정확한 것이 없다. 강유원을 설명하려면 우선 주민번호로 식별을 한다. 그러면 전세계 유일한 인간이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강유원을 알 수 없다. 그러면 설명을 나누어 보겠다. 본래 부모님을 비롯한 조상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타고난 뭔가가 있다. 타고난 속성들을 용어로 표현할 때는 선천적 innate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고 또 물려받은 것도 있다. 그러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살면서 학습한 것, 흔히 후천적이라고 말하는데 요즘에는 후천적이라는 말을 안쓴다. 사실 선천적보다는 '타고난'이라고 말한다. 요새는 '학습된' 이 말을 쓴다. 사실 학습이라는 것도 주입된 것이 아니니까 '학습한'이 정확한 표현이다. 타고난 것과 배운 것, 이 두가지로 설명한다. 그러면 이 두가지는 강유원만이 타고난 생물학 특징과 강유원만이 배운, 습득한 것이 겹쳐져서 그 사람을 만들어내 난다. 그렇게 하면 인간학 anthropology이 성립이 되지 않는다. '학'이라는 것은 공통된 것을 묶어내야 한다. 이 세상은 특정한 사물 하나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책상 앞에 놓여 있는 책상 램프 하나. 기본적으로 공산품은 공통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표준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학문이 있기 때문에 이런 물건이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다. 강유원이라는 사람을 똑같이 만들어 낼 수 없다. 그것 자체로 고유한 것이다. 유니크한 존재이다. 그래서 강유원을 또 만들어 낼 수 없다. 그것 자체로 고유하고 특수하고 유일한 존재들이다. 타고난 것과 배운 것 자체가 일회적인 것, 일회적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가 없다. 그것을 꼭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면 강유원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연구를 한다고 하면 강유원에 속하는 구성부분들이 있고, 이를 연구해서 내놓으면 내재적 구성성분과 구성방식이 된다. 단순한 설명원리가 아니라 강유원 안에 내재적으로 구성되는 구성성분과 구성방식이 있다. 이게 바로 철학에서 말할 때는 내재적 규정론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것을 각각의 사물에서 속하는 첫째 구성부분이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각각의 사물 하나하나에 대해서 열심히 연구해도 학문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테이블 램프는 하나만 분석을 해보면 이 종류에 대해서는 다 알 수 있다. 이것을 통해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강유원을 연구하면 강유원만 알고 끝이다. 테이블 램프은 애초에 만들어지기를 이와 똑같은 것들을 공산품으로 대량생산했다. 대량생산이 가능하려면 기술이 개입되어야 하고, 기술은 학문이 있어야 가능하다. 즉 그것이 어떤 '유'(類, 부류, genos)에 속하는가, 그것을 보편적인 술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강유원과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려면 강유원에 속해 있는 내재적 구성성분과 구성방식을 학문적으로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명의 인간, 또 한 명의 인간을 묶어서 인간학이라는 학문을 성립시키려고 한다. 그렇게 해야만 문화가 만들어진다. 아무런 학문도 없이 사람들이 죽었다고 해보겠다. 그러면 전수가 되지 않는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어느날 카레라이스를 만들었다. 구성성분은 알고 있다. 그런데 깜빡하고 조리방식을 기록하지 않았다. 어찌하다보니 되었다. 그래서 유일무이하게 되었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철학적인 의미에서는 가변적인 것, 변화하는 것, 소멸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자꾸 종과 유를 나누는 이유는 학문을 성립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하려면 형상에 대해서 탐구해야 한다. 강유원이라는 사람을 탐구할 때 강유원의 형상, 강유원임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탐구해서는 다른 것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강유원임이라고 하는, 강유원을 강유원이게 하는 그것과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과 연결을 시켜야 인간학으로 성립할 수 있다. 다시말해서 강유원을 강유원이게 하는 것은 틀림없이 강유원을 강유원이게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강유원이 인간에 속한다고 해서 인간을 백날 연구해봐야 강유원을 알 수 없다. 203페이지엔 침대는 가구이다. 희랍어법으로 말하면 '침대에는 가구임이 속한다'이다. 그러면 침대는 가구다와 강유원은 인간이다는 똑같은 언명이다. 그러면 침대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가구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분석을 하면 알 수 있는가. 모른다. 장미는 이름일 뿐이다. 장미라고 불리는 something이 있는 것이다. 강유원은 인간이다 그러면 그가 인간으로 불리던 짐승으로 불리던 강유원은 강유원이다. 다시말해서 인간에 대해서 굉장히 인간 일반에 대해서 연구를 하면 각각의 인간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 그런데 장미라고 하는 것을 그 이름을 아무리 연구를 해봐야 내 눈 앞에 있는 장미가 왜 아름다운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침대에는 가구임이 속한다'고 할 때 그 가구는 genos, 유에 해당하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한테 말할 때 이게 뭐야 할 때 침대라고 하면 못알아들이니까 가구라는 규정(horismos) 안에는 이것도 속해라고 설명하는 원리이다. 설명을 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이다. 설명을 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이 학문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지구 상에 인간은 영원하지 않겠지만 인간은 수없이 오랜 세월 동안 인간들이 있어왔다. 그래서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있어왔던 인간들을 묶어서 인간이라고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술어를 가지고 지칭하고 그 안에 속하는 강유원, 김삼돌은 죽는다. 가변적인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 인간에 대해서 또는 강유원이라는 한 사람에 대해서 잘 알고 싶으면 둘 다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207페이지를 보면 "개별자들과 떨어져서 아무 것도 없다면", 이 말은 보편적인 것이 없다면 즉 이 눈 앞에 놓여있는 침대이 개별자이고 그것을 규정하는 가구류가 없다면 지성적인 것은 전혀 없고 학문적 인식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모든 것은 감각 가능할 것이지만, 그냥 여기 있는 것만 알 수 있을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것만 있고 우리가 앎이라고 해봤자 감각적인 앎에만 머무르게 된다.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는 가구라고 하는 것, 인간이라고 하는 것 이것도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있어야만 학문이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209페이지에 "특수자 안에 내재해 있음과 동시에 그 생성 소멸의 변화를 겪고 있는 특수자와 분리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강유원이라는 인간을 설명하려면 강유원이라는 존재 안에 들어 있으면서 동시에 강유원이 소멸되어도 여전히 유효한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강유원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강유원 = OOO한 인간, OOO은 강유원에만 속하는 그런 것이고, 인간, 인간에게 공통적인 뭔가가 들어가 있겠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내재론만 가지고 안되는 이유는, 형상내재론은 각각의 개체 안에 형상이 들어있다가 개체가 죽으면 끝난다. 그래서 그러지도 않는 것을 생각해야 하니까 형상 바깥에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안에 있으면 밖에 있는, 말도 안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다르게 보면 안에 있으면서도 밖에 있는, 변화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이것을 설명해야 하는데 이것을 설명하는 방식을 찾아보는 것이 사실은 운동론, 실체론의 부분이고, 거기에 가기전에 보편적인 존재론, 신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된다.

제18강 209 학문적 인식이 성립하려면 각각의 특수한 것들에 내재해 있는 실체를 찾아야 하고, 특수한 것들에 내재해 있는 실제적인 것은 불변해야 합니다. 불변한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체적인 것은 불변과 부동이라는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실체적인 것이 특수자들 안에만 들어 있다면, 특수자들이 생성 소멸함에 따라 그것도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실체는 특수한 것들에 내재해 있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특수자 안에 내재해 있음과 동시에 그 생성 소멸의 변화를 겪고 있는 특수자와 분리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강의의 핵심은 세상은 변화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변화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그냥 아무 생각없이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겠지만 그것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학문적인 탐구를 하려면 그 변화하는 것들 안에 있는 또는 그 변화하는 것들 바깥에 있는 불변의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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