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17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20강

❧ 명제 형식들
S에 P가 우연히 속해있다.
S에 P가 본질적으로(자체로서) 속해있다.
S에 P가 속해있다는 것은 참/거짓이다.
S에 P가 가능적으로/현실적으로 속해있다.

❧ 실체(ousia)
최종적 기체基體, 지시 가능한 감각적 개별자, 주어 역할만 하는 것: ‘이것’(tode ti)
분리 가능한 에이도스eidos(형상) 또는 모르페morphē(모양): ‘무엇’(ti esti)

❧ ‘이것’과 ‘무엇’의 관계
‘무엇’(ti esti): 본질, 사유, 정재가 속하는 종 또는 유, 대자존재
⇡자기외화
‘이것’(tode ti): 존재, 물질적 구체적 개별적 대상, 정재, 규정적 존재, 즉자존재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17

오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에서 첫째 부분에 해당하는 ‘이것’(tode ti)과 ‘무엇’(ti esti)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21강에는 운동론을 이야기한다. 20강은 실체가 이것은 무엇이고, 무엇은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가 절반쯤이고, 이것과 무엇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절반이다. 그런데 이것과 무엇의 관한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한 것이 아니다. 234페이지에서 말한 것처럼 "이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다기보다는 그의 실체론에 관한 논의를 확장했을 때 우리가 가지게 되는 사유에 해당할 것입니다." 꼭 그것은 아니지만 헤겔에서 나오는 자기외화, 종과 유, 세계에 관한 사유 이런 것들과 본인이 그동안 공부하면서 머릿속에서 떠오른 것들을 정리해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유념해 두기 바란다. 덧붙인 것이라는 것을 미리 말해둔다.

제20강 234 이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다기보다는 그의 실체론에 관한 논의를 확장했을 때 우리가 가지게 되는 사유에 해당할 것입니다.

실체론은 이것과 무엇에 관한 이야기이다. 실체론을 하기에 앞서 19강의 얘기를 보면, S에 P가 우연히 속해있다. S에 P가 본질적으로(자체로서) 속해있다. S에 P가 속해있다는 것은 참/거짓이다. S에 P가 가능적으로/현실적으로 속해있다. 이 네개의 명제 형식에 대해서 설명한 부분이 있다. 네개의 명제형식만 이해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서는 또는 철학에서 다루는 명제들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부분을 미리 설명을 하겠다.

첫째 명제 S에 P가 우연히 속해있다. 이것은 학문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개나리는 노랗다고 말해보자. 그것이 개나리가 노랑임이 속해있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속해있는가. 우연히 속해있는가. 그런 것 간다. 왜냐하면 겨울이 되면 노랗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개나리를 여러번 봐서 봄이 되면 노랗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겨울에는 개나리의 노랑이 가능적으로 속해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노랑은 본질적으로 속해있는가를 물을 수 있다. 따라서 우연히 속해있는 것인지 가능적으로 본질적으로 현실적으로 속해있는 것인지는 학문적으로 탐구를 해봐야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런 것들에 대해서 탐구를 해보는 것이 실체론이다. 그래서 이것이 실체인지 아닌지 따져묻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플라톤에 대해서 침대는 가구다 할 때, 집이다고 할 때 집이라는 형상은 없다, 그냥 말뿐이다 라고 말해버리면 플라톤의 철학은 없다는 박종현 교수의 언명이 있었다. 집이라는 하든 좁이라고 하든 뭐가 있어야 최소한 대화가 된다. 그러면 대화의 규약이라는 것도 학문의 대상이 된다. 우연히 속해 있는 것은 어쩌다보니 그런 것이다. 물론 지금은 우연인 것 같았는데 지내놓고 보니 필연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것을 공부해서 가르치기도 했지만 하면 할 수록 그것이 우연히 속한 것인지 본직적으로 속한 것인지 구별하는 일 자체가 몹시 어렵다는 것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삶이 정말로 그러한 것인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탐구를 했는데도 알아내지 못했다. 학은 세월이 많이 지나도 알아낼 수 있는 것들, 또는 어떤 법칙을 마련해 낼 수 있는 것들인데 인간의 운명은 알 수 없다. 

본질적으로 속해있다. 우리가 본질이라는 것들이 정말 본질이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하고 충족되어야 본질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를 따져 묻는 학문이 실체론이다. 그 다음 가능적으로/현실적으로 속해있다는 말은 본질적인 것이 어떻게 속해있는가, 잠재적으로 있는가 이미 실현되어 있는가. 개나리에게 노랑이라고 하는 것이 잠재적으로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세번째 말한 S에 P가 속해있다는 것은 참/거짓이다는 사실에 부합되는지 말하는 것으로 2차적인 것을 말한다. 이 명제는 S에 P가 우연히 속해있는가, S에 P가 본질적으로 속해있는가, 가능적으로/현실적으로 속해있는가를 알아야만 참이냐 거짓이냐를 판별해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명제는 2차적인 것이다.

20강의 논의는 간단하다.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말할 때, 이 녹음을 하는데 제 방 책상에서 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이것은 책상이다 말한다면, 또는 강유원은 사람이다라고 말한다면, 강유원은 이것이다에 해당하고 사람은 무엇에 해당한다. 일단 이것에 해당하는 것은 범위가 좁다.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강윤원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밑바닥에 놓여 있는, 담기는 그래서 주체, 기체라고 말한다. 강유원은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정확한 표현은 동어반복이다. 강유원은 강유원이다, 이것은 이것이다. A is A. A=A. 세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틀림없는 것은 동어반복이다. 그러데 문제는 그런 동어반복은 일단 형식적으로 보면 지식이 확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거기에 술어를 붙인다. 그러면 강유원은 사람이다라고 할 때 사람이라고 하는 술어를 붙이면 사람이 무엇에 해당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강유원도 실체고, 사람도 실체라고 말한다. 논리학에 해당하는 범주론에서는 '이것'이 제일 실체이고, 형이상학에서는 '무엇'이 첫째 실체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인가. 둘 다 실체이다. 범주론에서는 ‘이것’(tode ti)가 제일 실체이고, ‘무엇’(ti esti)가 제이실체인데, 형이상학에서는 ‘무엇’(ti esti)가 제일실체이고, ‘이것’(tode ti)가 제이실체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일실체, 제이실체라고 말하는 것은, 범주론에서는 ‘이것’(tode ti)가 중요하고, 형이상학에서는 ‘무엇’(ti esti)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왜 더 중요한다. 범주론은 우리 눈 앞에 놓여있는 여러 물건들에 대해서 술어를 갖다붙이는 것을 따져묻는 학문이다. 그런데 형이상학은 사물의 본성을 따져묻는 것이다. 그래서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에 속하는 것을 따져묻는 것이다. 사람, ti esti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범주론은 논리학이니까 우리 눈 앞에 보이는 것을 파악하고, 주술 관계에 따라서 그기다가 술어를 붙이는 방법을 논의한다. 그런데 형이상학은 사물이 어디에 속하는가를 따져묻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시말해서 강유원은 하나의 사람 안에 속하는 하나의 종이다. 그러면 여기서 범주론이나 형이상학에서 제일실체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ti esti)인 것, ‘이것’(tode ti)를 잘 알고 있어서 이것을 연결시킬 줄 알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한 번 논의하고 형이상학에서 한 번 논의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유와 종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고래가 물고기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다시말해서 고래가 포유류에 속하는지 어류에 속하는지 몰랐다. 이 고래, 저 고래는 종이다. 그 상위에 어디에 속하는지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과 무엇이 어떤 것들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것과 무엇의 관계, 즉 종과 유의 관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속담으로 표현하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당장 눈 앞에 있는 이것,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책만 읽어서는 안된다. 이 책과 이 책이 속하는 유를 또 읽어야 한다. 그래서 이 책 바깥으로 나가야한다. 그것이 외화이다. 플라톤에서 말하는 동굴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무엇을 향해 나아갔다가 자기와 다른 것을 만나게 되고, 이렇게 다른 것과 다른 것을 만나서 알게 된 차이를 통해서 독서의 질적인 심화가 이루어질테고, 그럼으로써 과거의 나와 새로운 책을 읽은 나의 비교가 이루어진다. 그러려면 과거에 읽은 책과는 다른 것으로 올라와서 그것을 다른 책의 관점에 서서 과거에 읽은 책을 이렇게 반성적으로 사유해봐야 한다. 

 

지금 아리스토텔레스의 이것과 무엇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재미 삼아서 한 것이 아님을 밝혀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즉 이렇게 이것과 실체를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면서 인간의 앎이라고 하는 것이 확장되다가 최고의 유, 즉 신에게 이르면 모든 것이 보일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책을 나오는 대로 닥치는 대로 읽어서 영원히 사는 듯한 사람이 있어서 다 읽었고 이해했다고 해보겠다. 그런 사람은 최고의 무엇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신적 존재, 신적인 사유에 이른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이것’(tode ti)와 ‘무엇’(ti esti)를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사유를 하라고 촉구하기 위해서 논의되고 있는 부분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를 계속해서 무엇으로 밀고 올라는 것, 이게 바로 학문이다 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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