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18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21강

❧ 운동(변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옮겨가는 것
현실태(energeia), 완전한 현실태(entelecheia)
자기 안에서 다른 것으로 변화하는 것
가능태와 현실태는 연속선상에 있으므로 경계선을 찾아낼 수 없다.

❧ 운동의 원인들
질료와 형상, 작용과 목적
질료는 형상을 성취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러므로 형상은 질료의 목적이다.
목적인 형상은 질료에게 작용한다.
가능태는 현실태를 향해 가며, 이어지는 현실태는 다시 가능태가 되어 현실태를 향해 간다.

❧ 영원한 첫째 원동자
모든 존재하는 것은 영원한 첫째 운동자, 즉 신을 향해 움직여간다.
영원한 첫째 원동자는 모든 존재하는 것에게 “사랑받음으로써”(hōs erōmenon) 존재한다.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18

⟪철학 고전 강의⟫ 제21강 운동론, 가능태와 현실태 오늘 이 부분을 설명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을 하면 ⟪철학 고전 강의⟫를 말그대로 절반을 읽는 셈이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부터 시작해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다룬 사람이 꽤 된다. 헤시오도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면 다섯명, 그리고 나서 데카르트부터 칸트, 헤겔. 고대형이상학과 근대형이상학로 나누어서 이 책을 구성했다. 철학의 역사, 지성사, 사상사 이런 것들과 형이상학의 역사와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기준으로 가르게 된다. 이렇게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들이 오늘 운동론에서 있다. 지금 현재의 내 상태를 다른 상태로 바꾸는 것이 운동이다. 사회운동, 지구의 운동, 운동이라는 말은 굉장히 넓게 포괄적으로 쓴다. 운동이라는 말은 단순히 변화라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은데, 운동이라는 말을 쓰는 것과 변화라는 말을 쓰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 지구의 운동이라는 말을 쓸 때 지구가 어떤 의지를 갖고 움직여가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의 운동과 내가 아침 저녁으로 운동을 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어떤 점이 다른가. 의지가 개입되어 있는가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 운동이라는 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 말에 대해서 조금 구별해서 미리 설명해 두려고 한다. 그래야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과 데카르트가 말하는 운동론, 헤겔의 운동론의 차이를 살펴보는데 도움이 된다. 이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에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다.

지구의 운동과 나의 운동의 차이는 무엇인가.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운동을 하는 것은 건강해지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지구는 왜 운동을 하는가. 지구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 운동이라는 말과 변화라는 말은 다 뭔가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운동 또는 변화라고 말할 때 변화는 그 과정 자체에 집중하는 것 같지만 적어도 운동과 변화를 비슷한 말이라 놓고 그 범위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고 할 때 의지가 개입된 또는 목적이 있는 운동과 그런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또는 목적이 없는 또는 저절로 움직이는, 다시말해 원인이 뭔가 있는데 그 원인이라고 하는 것이 바깥으로부터 개입되어 있어서 움직이게 한다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을 읽을 때는 질적인 변화와 위치의 변화를 구별해서 생각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구대 위에서 공의 위치가 바뀌는 것은 바뀌는 것이기는 한데 진정한 의미에서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한 위치의 변화는 운동이 아니다가 1번이다. 2번은 이전 상태에서 다음 상태가 되었을 때 그 물체의 내부에서 뭔가가 달라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게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이 두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운동이라는 개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물을 바라보는 또는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을 바라보는 그런 관점, 태도, 시각 이것이 단순한 의미에서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만을 따져묻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운동이라는 말이 나오면 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책을 읽었다고 해보자.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신곡강의》 책이 있고, 책상에 가져와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운동이다. 《단테신곡강의》도 책장에서 책상으로 옮겨졌으니 장소가 변화되어 운동이다. 《단테신곡강의》 책이 책상으로 옮겨진 것은 저 안에서 움직여 온 것은 아니다. 이 책을 가져다가 읽었는데 읽으니까 읽기 전과 읽은 후가 다르다. 여전히 세포 구조는 똑같지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을 읽고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태를 그렇게 보지 말라는 것이다. 《단테신곡강의》를 읽고 나서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뭔가 조금이라고 바뀌는 것, 그게 운동이다. 그런데 《단테신곡강의》 책이 책장에 꽂혀 있다가 책상 위에 온 것도 근대적인 운동론의 관점에서 보면 운동이다. 장소가 바뀐 것일 뿐이다. 그것만 운동이라고 따져서 묻자고 하면 근대적인 운동론이 되는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질적인 변화까지 생각하면 고대적 운동론이다. 우리는 지금 근대의 세계에 살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 근대적인 운동론을 가지고 사태를 바라보지는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누적적으로 살아오기 때문에 지금의 나라고 하는 것을 보면 과거의 나의 누적물이다. 

지금 현재의 내가 《단테신곡강의》를 읽어서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두 개의 상태를 놓고보면 다른 사람으로 변해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내 안에서 나온 것이다. 《단테신곡강의》이 나에게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라고 하는 '기체'에 《단테신곡강의》이 담겼다. 다시말해서 《단테신곡강의》을 읽기 전의 강유원은 이러이러했다가 있는데 《단테신곡강의》를 읽은 후의 강유원은 저러저러하다는 두 개의 명제가 성립한다. 강유원이라고 하는 기체(주체)에 담겼다는 말이다. 그러면 애초에 《단테신곡강의》를 읽든 안읽든 강유원이라는 존재에게 《단테신곡강의》가 담기고 그 다음에 그것이 읽은 다음에 다른 사람이 될 가능성이 없으면 담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와 현실태로 구별해서 설명을 한다. 가능태와 현실태의 개념을 딱 정해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제21강 238 가능태는 현실와 딱 잘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지점까지가 가능태이고 어느 지점부터가 현실태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존재는 가능태의 상태에 있는 것이고 동시에 현실태의 상태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질료, 형상, 목적, 작용이 있는데 그 중에서 질료와 형상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된다. 그 형상 안에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목적이 있는 형상이라는 것은 개입되기 때문에 목적론적 운동이다. 인간을 행동을 놓고 생각해보면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놓고 생각해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이 금만 이해가 된다. 선생과 학생이 있다. 둘다 공부라는 운동을 계속한다. 그런데 왜하겠는가. 좀 더 완성된 인간으로 죽고 싶어서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궁극적인 목적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운동들을 다 하나로 모아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싶어했다. 그러니까 제일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이라고 했다. 신은 영원히 있으면서 첫째 자리에 있는 것인데, 원동자, 다른 것을 움직이게는 하는데 나는 움직이지 않는 것. 신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존재가 어떻게 신 아래 있게 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발한 말을 발명한다. “사랑받음으로써”(hōs erōmenon) 이렇게 말을 한다. 

제21장 241 이 과정은 최초의 가능태, 즉 질료(휠레)에서 시작합니다. 이 질료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형상(에이도스)입니다. 형상은 질료가 마지막에 이르러야 할 목적이기도 합니다. 질료를 최후의 목적까지 끌고가는 힘이 있을 것이고, 이 힘은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용도 그 안에 있는 운동 자체만 보면 뭐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목적이나 형상이 바로 작용하는 힘입니다. 작용, 목적, 형상은 다른 측면에서 본 것일 뿐이지 사실상 내용은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 즉 질료, 형상, 작용, 목적, 이 네 가지를 질료와 형상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형상이 목적이기도 하고 작용이기도 하기 때문에 실체의 차원에서 말하면 그 네 개를 구별해서 말하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제21장 242 세상의 모든 존재는 현실태라를 목적을 향해 움직입니다. 이 모든 존재의 목적을 다 모으면 "영원한 첫째 원동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존재의 운동을 추동하는 힘입니다. 그러면 이 첫째 원동자는 어떤 방식으로 모든 존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가능태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부동의 원동자'인 것입니다. 자기는 움직이지 않으며서 어떻게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할까요, "그것은 사랑받음으로써 운동을 낳"(1072b3)습니다. '사랑함으로써'가 아니라 '사랑받음으로써'(hōs erōmenon)입니다. '다른 존재가 부동의 원동자를 사랑함으로써'라는 말입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부동의 원동자를 모든 존재가 욕망하고 사유한다는 것입니다. 부동의 원동자는 욕망의 대상이요, 사랑의 대상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자기를 계속 생성하는 운동을 해야 한다. 사랑을 받으려면 사랑을 받기 위한 뭔가를 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서 사랑받을 수는 없다. 가멸적 존재, 언제가는 소멸할 존재들은 사랑받음으로써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사랑을 받기 위해서 자기 존재를 계속해서 생성해 내야 한다. 그게 바로 소멸하게 될 존재가 가지고 있는 필연이다. 꽃은 인간에게 사랑을 받는다. 그렇게 사랑받기만 해서는 꽃이 존재하지 않는다. 겨울을 이겨내고 그러기 위해서 계속해서 피고지고 해야 한다. 선생이 선생이려면 선생이라는 존재 규정을 계속해서 생성을 해야 한다.

"인간의 유한성을 절실하게 깨달으면서도 신적 사유의 무한성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철학 고전 강의⟫의 부제이다.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유한자는 끊임없이 사유한다. 왜 생각을 하는가. 사유라고 하는 운동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다. 사유를 끊임없이 하면 할수록 내가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마다 신의 무한성을, 신적인 사유는 무한하다는 것을 원하게 된다. 여기서 신이라는 것은 그런 사유로 올라가고 싶은 그런 존재이고 싶은 갈망이다. 그게 바로 존재하는 무한자이다. 그렇게 있고 싶다는 것이다. I want to be, 그러한 존재로 있고 싶다는 말이다.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것이 형이상학에서 운동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가지고 있는 소멸하는 존재로서 근원적인 한계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끊임없이 가능태의 상태에서 현실태의 상태로 옮겨가지만 그 현실태라고 해서 궁극적으로 완전한 목적을 성취해내지는 못한 결국 그것도 또다른 가능태에 불과한 현실태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신적 사유에 까지는 이르지 못하겠지만 그런 무한자로 존재할 수 있는, I am 은 아니지만 I want to be, 최대한 다가간 상태로 죽고 싶다, 유한자인데 가능한한 최대한 무한자를 닮은 상태로 죽고 싶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게 바로 운동론이 함축하는 바이다. 

제21강 250 인간의 유한성을 절실하게 깨달으면서도 신적 사유의 무한성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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