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20
- 강의노트/라티오의 책들 2021-24
- 2021. 9. 29.
라티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팟캐스트 주소: https://ratiopress.podbean.com/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24강, 제25강
❦ 사유방식의 전복과 새로운 세계관의 정립
‘나’에서 시작하여 ‘신의 현존’을 확신하고 ‘대상 세계’를 탐구한다.
1,2성찰: 자립적 자기; 3성찰: 신의 빛; 4,5,6성찰: 물질적 사물과 정신/육체의 차이
3성찰은 나와 신의 접점이면서 신과 대상 세계의 접점
❦ 제1성찰
⟪성찰⟫의 목적: “새로 시작”
‘새로운 시작’의 단계들: 근심에서 벗어나기, 적막 속의 휴식 — 순수한 통찰, 즉 관상의 조건을 확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재정립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을 철저하게 부정함으로써 “난국의 암흑”으로 들어섬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20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근대 형이상학을 읽고 있다. 지난번에 데카르트에 관한 기본적인 요점들을 설명했는데 그것을 설명하면서 주체인 인간의 세계 구축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은 24,25강을 이야기한다. 《성찰》을 다루고 있는 파트 제목이 자기의식의 형이상학이다. 데카르트 형이상학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의식이다. 그래서 《성찰》의 구성과 목적을 다루는 제24강의 첫 문장이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세 과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립적 자기, 즉 자율(Autonomie)을 구축하는 과정입니다." 자립적 자기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르게 데카르트는, 중간에 25강에 아리스토텔레스와의 탐구의 차이에 대해서 나오는데, 데카르트는 저 세계에 대한 어떤 것부터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부터 탐구를 한다. 그런데 사실 데카르트의 탐구 방법을 보면, 또 탐구의 순서를 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탐구의 순서와 다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인간 자신이 나는 누구일까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물학적 인간의 탐구 순서는 그렇지 않다. 바깥에 있는 것부터 본다. 다시말해서 최근에 나온 신경과학의 책을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학습을 하는가에 대한 논의들이 있다. 아이들을 키우는 사람이 이야기를 할 때 아이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해야 정신이 몰려서 습득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학습을 할 때 바깥 세상을 보고 학습을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처럼 자립적 자기를 먼저 확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사실 오늘날 뭔가를 안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방식과는 반대되는 얘기부터 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과는 다른, 즉 원리적으로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고 나서 이대로 내가 해봐야하지 하는 것은 신경과학자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데카르트가 《성찰》에서 하는 얘기는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논의에 비추어 보면 틀린 얘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왜 읽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뭔가를 탐구하는데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전환을 이룰 것인가 하는 하나의 모형을 알기 위해서 읽는다. 다시말해서 데카르트의 《성찰》이 오늘날의 신경과학이나 여러가지 탐구방식에 비추어 보면 틀린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서 이 책을 읽는 이유는 뭔가 자신에게 전환을 이룩하고자 할 때에는 어떤 방식으로 전면적인 재검토를 해야하는가 그것을 생각해보기 위해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즉 데카르트에 의한 근대 형이상학의 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이상학의 철저한 전복을 목표로 한다. 그것을 뒤집어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뭔가를 뒤집고자 할 때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데카르트를 읽는다.
그렇다면 데카르트 《성찰》의 구성과 목적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인간은 뭔가 바깥의 세상부터 먼저 살펴보고 뭔가를 습득해서 자기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즉 대상에 대한 앎이 먼저이고 그런 대상의 앎을 나에게 들여온 다음에 다시 또 나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그제서야 또 바깥으로 향해 나아간다. 바깥에 대한 앎, 대상의식이 먼저이다. 그리고 어느정도 대상의 앎이 되었을 때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자기의식을 구축한다. 대상의식과 자기의식이 결합되어서 일정한 정도로 일종의 자신의 사유가 구축되었을 때 다시 또 바깥을 향한다. 그러면 본래의 자기가 재검토된다. 바깥을 향했다가 다시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방식이다. 데카르트처럼 외부 세계를 완전히 차단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뚜렷하게 안 다음에 바깥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현대의 자연과학이 밝혀낸 탐구의 과정과도 다르다. 데카르트 《성찰》의 구성과 목적은 우리 앎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뚜렷하게 전제한 다음에 이것을 읽어야 한다. 그러면 데카르트 《성찰》의 구성과 목적을 읽는 목적은 형이상학적 전환, 즉 세계관을 바꾸고자 할 때에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이다. 사실 불가능한 목적이다. 세계관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
데카르트는 먼저 내가 어떤 사람인가, 또는 나의 앎은 틀림없는가를 생각해본다. 그런 다음에 이 앎이라는 것이 틀림없는가를 확고하게 밝혀 보이기 위해서 신에 대해서 탐구한다. 그게 두번째 단계이다. 신에 대해서 탐구해보니까 신에 대해서 안다는 확신에 이른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는 이 우주에서 가장 확실한 존재인데 이 신을 아는 나는 틀림없이 확실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자신하고 그제서야 세상에 대한 앎을 향해 나아간다. 오늘날 자연과학에서는 일단 세상으로부터 뭔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다음에 나 자신에 대해서 탐구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간다. 중간에 신이 개입되지 않는다. 따라서 데카르트 형이상학은 인식론도 아니고 그것이 우리에게 세상을 아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세계관을 전환시키고자 할 때 어떤 방식으로 탐구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하나의 샘플이다. 그러면 나와 신이 있고, 세계, 이렇게 세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나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해보면 자립적 자기이고, 신이라고 하는 것은 신의 현존을 말하는 것이고, 세계는 진리의 규칙에 따라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면 데카르트의 《성찰》은 여섯 개의 성찰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립적 자기, 신의 현존, 대상 인식에 할애되어 있다. 자립적 자기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 제1성창, 제2성찰이고, 신의 현존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 제3성찰이다. 그리고 진리의 규칙에 따라서 대상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 제4성찰, 제5성찰, 제6성찰이다. 구체적으로 제1성창, 제2성찰을 나누어보면 제1성창은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다보니 제1성찰에는 의심, 혼란, 그리고 꿈, 심지어 악령까지 동원하는 것이 제1성찰의 내용이다. 그 다음에 제2성찰은 혼란과 의심이 계속된다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던 와중에 계속해서 의심되는데 이 중에서 확실한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그 다음에 제3성찰은 확고한 것 하나를 가지고 신에 대해서 탐색해보는 것이다. 제3성찰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틀림없이 하나 있는 것과 그것을 가지고 신과 나를 맞닿는 지점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신을 나에게 빛을 비추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다음에 제4성찰로 나아가는 접점을 하나 만든다. 따라서 제3성찰은 신이라고 하는 것을 가운데 두고 나하고 신이 창조한 대상세계가 겹쳐져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 구조가 제1성찰, 제2성찰과 제4성찰, 제5성찰, 제6성찰이 양쪽에 있고 가운데 제3성찰이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점을 유념해 두어야 한다.
어쨌든 《성찰》은 내가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에 대해서 불안하게 여기는, 이런 순서로 내가 성찰하다보면 신도 알게 되고 신의 빛의 도움을 받아서 세상도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 이런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성찰》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확실한 진리에 이르는 것, 그런데 유념해 둘 것은 내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가, 불안의 정도가 깊으면 깊을수록 신에 대한 열망이 강한 것이고 또 신을 알 수 있는 힘도 강해진다고 얘기하는 것이 《성찰》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지점이다. 데카르트가 가지고 있는 시대사적인 맥락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지점이 있다.
제25강을 보면 제1성창을 다루고 있다.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을 때는 주어가 '나'로 되어 있다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데카르트가 '나'라고 할 때 그 '나가' 한 사람의 일관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주의하여야 한다. 데카르트의 《성찰》에는 분열된 여러 명의 자아가 등장하고 있다. 내가 얘기하고 있다고 해서 똑같은 자아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감각에서 얻은 것을 의심하는 나가 있고,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는 나, 감각으로부터 얻은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나도 있다. 데카르트 내면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여러 나가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제1성찰은 "유년기에 내가 얼마나 많이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간주했는지, 또 이 것 위에 세워진 것이 얼마나 모두 의심스러운 것인지, 그래서 학문에 있어 확고하고 불변하는 것을 세우려 한다면 일생에 한 번은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전복시켜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몇 해 전에 깨달은 바가 있다." 이렇게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전복시켜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데카르트가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것을 읽을 때는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했다는 것은 빈말이고, 실제로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철학이 이룩한 것을 다시한번 싹 뒤집어 엎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기 개인 얘기를 하는 척하면서 형이상학의 역사 전체를 뒤집어 엎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표자를 뽑아서 뒤집어 엎겠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이다. 따라서 《성찰》의 직접적인 목적은 바로 전복이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전복시킨다. 그러려면 일단 근심에서 벗어난다. 그런 다음에 은은한 적만 속에서 평온한 휴식을 취한다. 일단 근심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고 고요한 관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전복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읽으면 안되고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전복시켜서 새로운 것을 이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의심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만 또 확실한 것에 대해서만 동의를 해야 하는데 기존의 의견이 의존하고 있는 원리들 자체를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1권에서 말한 것들이다. 즉 감각에서 알게 된 것,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 경험이 되고 기술이 되고 인식이 되는 것 이것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것이다. "한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 현명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감각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은 한번이라도 우리는 속인 것일 수 있다. 일단 텍스트 자체만을 읽어보면 그런데 이것에 숨어 있는 뜻은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감각으로부터 시작하고 기억, 경험, 기술, 학문적 인식 이런 단계를 밟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감각으로부터 얻은 것을 의심하는 나가 생긴다. 그리고 이것이 감각으로 얻은 것을 의심하는 나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가 극한에 이르게 되면 결국에는 악령까지 등장하게 된다. 그 악령은 내가 사실은 신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신을 믿는 것처럼 거짓된 것을 나에게 집어넣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제25강 276 유년기에 내가 얼마나 많이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간주했는지, 또 이 것 위에 세워진 것이 얼마나 모두 의심스러운 것인지, 그래서 학문에 있어 확고하고 불변하는 것을 세우려 한다면 일생에 한 번은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전복시켜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몇 해 전에 깨달은 바가 있다. ━ 《성찰》 제1성찰
데카르트가 제1성찰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뭔가 확실한 것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인간 세상에서 확실하다고 여겨져 왔던 모든 것을 총제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를 취해보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글자 그대로 읽어서 데카르트는 스스로 무지의 상태로 들어가겠다, 데카르트를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닌지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면 결국 난국의 암흑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일부러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무너뜨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확실한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 처음 말한 것처럼 우리 인간은 그런 방식으로 뭔가 앎을 얻지는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데카르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올바른 것이라고 여겨져있던 것들을 총체적으로 전복하려는 기획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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