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21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26강

❧ 자립적 자기의식의 성립 과정
감각-지각에 의존하는 나를 의심하는 나의 사유를 밀고 나간 결과 “난국의 암흑”(제1성찰의 결과)에 처하게 되었다. —> “확고한 것은 아무엇도 없다”(nihil esse certi)는 자각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최소한의 것”을 찾아야 한다. —>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ego sum, ego existo)의 확신, 이는 사유하는 존재(res cogitans)이며, “내가 사유하는 동안 있다.”(nempe quandiu cogito)는 것.
제2성찰에서 도달한 것: “정신의 통찰”(mentis inspectio)

❧ 데카르트에서 기본적으로 전제해야 하는 것
‘나’는 계속해서 분열한다는 것
초월자의 입장에 이론적으로 올라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것, 즉 초월론적 사유를 추구한다.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육체와 분리된 정신임을 확신하려는 것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21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고 있다. 오늘은 제2성찰을 읽는다. 제2성찰에서 다루는 내용은 자립적 자기의식의 현존, 정신의 우선성에 관련된 내용이다. 제26강의 내용을 설명한다. 데카르트를 읽을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데카르트는 저쪽 바깥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나르시스트이다. 자기 안에 빠져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는 별로 그럴 일이 없는데 고통스러운 일이 있거나 뭔가 고민스럽거나 깊이 생각하거나 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할 때, 데카르트의 용어를 가지고 말하면 나는 계속해서 분열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분열하는 존재이다. 나의 생각이 계속해서 분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초월론적 사유라는 말이 26강에서 등장하는데 초월론적 사유라는 것은 초월+이론 합성어이다. 이론적으로 초월자가 된다는 말이다. 쉽게말하면 내가 신이라고 가정해본다는 말이다. 그것이 초월론적 사유 또는 초월론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초창기 기독교도들이나 중세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은 내가 도대체 닿을 수 없는 저 먼 곳에 있는 정말 생각지도 못하는 그런 곳에 있는 존재이다. 생각지도 못한다, 즉 이론적으로라도 내가 신이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이론적으로 초월자가 되어본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한 신성모독이다. 데카르트 당시의 《성찰》이나 《철학의 원리》는 처음에는 라틴어로 썼는데 데카르트가 네덜란드에 가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 그랬을까.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데카르트 시대에는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이미 데카르트 시대에는 프로테스탄트가 자기 세력을 한 번 잡았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철저한 가톨릭 국가이고 스콜라 철학이 만연한 동네였는데, 아주 독실한 신자였던 파스칼 마저도 탄압을 받았을 정도 굉장한 나라였다. 그만큼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네덜란드에 갔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는 자유로운 정신의 나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초월론적 사유라고 하는 것을 인간이 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만만치 않았다. 그러면 데카르트가 말하는 개인 한 인간의 사유 안에는 내가 신이라고 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가정해보다는 나도 있고 동시에 내가 하찮은 인간 존재 즉 유한자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나도 있다. 적어도 이 두개가 내 안에서 계속해서 들끓고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데카르트의 초월론적 사유인 것이다. 간단한 비유를 예를 들어서 보면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데 그냥 방구석에만 앉아가지고 자기 혼자 자기 능력되는 대로 하고 안되면 말고 그렇게 산다면 내가 얼마나 못난 놈인지 잘난 놈인지 알아차릴 수 없다. 그런데 학교에 가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진짜 잘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러면 내가 얼마나 못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남을 만날 때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내가 얼마나 하찮은 지 나의 능력이 얼마나 별볼일 없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신을 상대로 하고 있다. 신을 상대로 해서 세상에 완전한 존재인 무한한 신을 상대로 하면 내가 유한하다는 것을 정말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신을 만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 수 없다. 그 얘기는 제3성찰에 나오는데 이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신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얼마나 못난 자인지 내가 얼마나 유한자인지 알면 알수록 그 유한함을 알게 해주는 신이 있다는 증명이다. 어떻게 보면 자기학대적인 증명이다. 26강에서는 아직 그런 얘기는 하지 않는데 그런 사유의 전 과정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해봐야 한다. 

일단 데카르트는 나라고 하는 존재를 물질적으로 있는 몸뚱아리를 제껴두고 생각을 하니까 제1성찰에서 "난국의 암흑"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제2성찰의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한다. "어제 성찰로 인해 나는 엄청난 의심 속에 빠져 있고, 그것을 머리에서 지워버릴 수도 없으며, 또 이 의심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즉 계속해서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가 확신하게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것을 데카르트의 제2성찰에서는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ihil esse certi)고 표현한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 그 순간 내가 나에 대해서 의심하는 구나라는 내가 또 등장한다. 나에게 또는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인데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확실한 것을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다. 계속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저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의심하는 내가 있다. 그런데 의심하는 나를 두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의심하는 내가 있는데 확실한 것을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래도 그것을 의심하고 있는 나는 있잖아 라고 한다. 데카르트는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최소한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지금 내 생각은 계속해서 의심하는 나, 난국의 암흑에 빠져있는 나,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최소한의 나 이런 것들은 나의 생각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종류의 생각들이다. 

이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제1성찰에서는 감각, 지각에 의존하는 나가 있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이것을 끊어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의심하는 나가 있었다. 그렇게 의심하는 나 때문에 난국의 암흑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제1성찰이다. 의심하는 나를 도대체 왜 의심을 하고 있어 라고 생각하는 나가 있다. 그것이 제2성찰에 나오는 이야기있다. 그러면 의심하는 나를 사유하는 나가 있는데, 그렇게 아무리 의심을 해도 적어도 나는 사유는 하고 있구나, 즉 나의 사유는 분명하구나까지 오게 되는 것이 제2성찰이다. 그러면 데카르트에서는 나라고 하는 존재의 핵심적인 요소는, 나와 분리될 수 없는 핵심 요소는 사유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을 사유하는 나 res cogitans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데카르트는 "내가 사유하는 동안 있다."(nempe quandiu cogito) 라고 말한다. 

데카르트는 계속해서 자신의 사유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유와 관련되지 않은 여타의 것을 배제해 나간다. 그래서 데카르트를 읽고 당대의 철학자인 홉스가 당신이 말하는 사유하는 존재 res cogitans라고 하는 것은, 존재라는 말이 라틴어로 res인데 물체 아니냐. 사유하는 물체 아니냐, 그러니까 당신은 벌써 사유는 사유이고 물체는 물체라고 말을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그것에 대해서 res는 물체라기 보다는 그것 thing, that, '것'이 물체를 가리키도 하지만 그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데카르트는 '그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홉스와 데카르트가 주고받은 논박을 보면 홉스의 지적이 타당해 보이는 지점이 있다. 데카르트가 궁지에 몰려서 억지를 부리는 지점들이 있다.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어보면 사유라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물질적인 것들을 배척해 나아간다. 다시말해서 《성찰》은 일종의 사유실험이다. 

제2성찰에서는 그렇게 의심하는 사유를 계속해서 밀고 나아가서 점점 더 그것들을 추리고 추려서 데카르트는 마지막에 뭐라고 하는가. "정신의 통찰"(mentis inspectio)이라고 하는 말을 끄집어 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정신이 나자신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제2성찰에서 도찰해내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 살고 있을 때 이것 저것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그런 것은 감각, 지각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져서 정리 정돈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즉 역사적 세계에서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앎이 성립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그것을 끊어 낸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서 그런 것을 배척한다. 그래서 의심하는 나를 말하고, 그리고 의심하는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나를 또 이야기하고 그리고 그러다 보니 나에게는 순수한 사유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리고 순수하게 사유할 때에만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확신한 다음에 순순한 사유를 할 때에만 내가 있다, 이것을 가지고 나의 본질은 순수 사유다, 즉 나는 정신 자체다 라고 하는 명제에 이른다. 

사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나면서부터 역사적인 경험 세계에서 살아간다. 방금 데카르트가 이른 결론처럼 선험적인 자립적 자기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왜 도대체 이것을 왜 이렇게 확보하려고 애쓰는가. 그것은 바로 확실하게 자기가 신을 통한 인식을 갖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역사적 세계에서의 앎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진리가 아니다. 죽기 전에 완전한 진리에 이르렀다고 자신하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우리는 역사적 세계 속에 살기 때문에 우리의 앎과 경험은 끝없이 수정되고 고쳐야 하고 또 반론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알고 있는 한 완전한 앎을 가진 존재는 신이다. 그래서 내가 신에게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앎을 얻고자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완전한 앎의 원천이라고 여겨지는 이 감각적인 앎부터 끊어내야겠구나. 그런 다음에 순수한 자기의식이라고 하는 것을 확보한 다음에 그 순수한 자기의식을 가지고 신과 접촉을 해봐야겠구나 생각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면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 괴인처럼 여겨지지만 이 시기의 데카르트는 좀 그럴싸한 생각을 했었다고 봐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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