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역사 고전 강의 — 21 / 제15강(2)
- 강의노트/라티오의 책들 2021-24
- 2021. 10. 4.
라티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팟캐스트 주소: https://ratiopress.podbean.com/
⟪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제15강(2)
❧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신국론⟫의 상응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메타노이아 이후에 개인은 신에게 귀의하고 국가는 신국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 완전성으로의 진보를 목적으로하는 역사신학
perfectio: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한 곳으로 가면 완전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profectus: “지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러한 완전상태로 가는 것입니다.”
“고난과 열정을 겪으면서 역사의 목적을 이루려는 생각을 ‘진보적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 미래를 장악하는 새로운 힘
“근대 국민국가는 ‘인민’people의 미래를 설계하고 국가의 틀 안에서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이 국가의 손아귀에 장악된 것입니다.”
2021.10.02 역사 고전 강의 — 21
오늘은 ⟪역사 고전 강의⟫ 제15강 두번째 시간이다. 오늘하는 이야기는 중요하다. 일종의 암기사항이다. 아주 기본적인 개념들을 설명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부분들은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이것과 관련된 다른 책들이 나올 때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세가지를 이야기할 것인데 먼저 첫째 194페이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자신의 삶을 축약해서 서술한 《고백록》을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번에 얘기할 때 세속의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를, 레그눔regnum과 사케르도티움sacerdotium을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sacerdotium을 강조하고 regnum을 가볍게 여기는 사유의 뼈대를 제시했다고 말하였다. 「강유원의 북리스트」에서 《햄릿이냐 헤쿠바냐》를 소개했었다. 신의 권위와 이성의 권위가 있는데 신의 귄위에 기대는 입장이 계시종교와 철학의 관계, 현실적으로 정치철학의 관계을 다루게 되겠다. 그런데 한가지가 더 있다. 그게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사케르도티움이 신의 권위이고, 레그눔이 현실의 지상의 왕국이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상의 왕국을 가볍게 여기고 사케르도티움만이 중요하다고 말한 사람이다. 따라서 이것이 또 하나의 입장인 것이다. 즉 신의 권위를 가지고 지상의 나라를 정당화하는 것이 칼 슈미트와 같은 사람들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예 지상의 나라를 무시하고 신의 권위에 세워지는 하느님의 도성만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의 권위를 가지고 지상의 나라를 정당화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성국가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이성국가론의 출발점은 대체로 근대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제15강 194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사케르도티움을 강조하고 레그눔을 가볍게 여기는 사유의 뼈대를 제시했다.
제15강 194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자신의 삶을 축약해서 서술한 《고백록》을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구에서 정치적 권위의 정당성을 정초하는 방식은 신의 귄위에 의존하는 방식이 있고, 이성의 귄위에 의존하는 방식이 있는데, 신의 귄위에 의존하는 방식은 기독교적인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적인 것에는 또 하나의 입장이 있는데 그게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상에서 정치적 권위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태도이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읽어야 할 첫번째 중요한 요소이다.
두번째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자신의 삶을 축약해서 서술한 《고백록》을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장이 있다. 즉 개인의 삶과 세계의 구조를 일치시켜서 또는 상응시켜서 이해하는 입장이 있다. 그게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과 《고백록》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즉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오늘날 우리가 평전이라고 부르는 것, 개인의 삶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뜻 또는 의지를 서술해 놓은 책이다. 따라서 《고백록》의 구조와 ⟪신국론⟫의 구조가 서로 상응한다. 개인의 삶과 하느님 나라의 삶이 상응한다, 그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이다.
지상의 나라에서의 정당성의 근거를 신에게서 찾으려는 태도가 있는데 대체로 기독교, 기독교의 신격신을 얘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뭔가 초월적인 것, 인간이 도대체 가 닿을 수 없는 뭔가로부터 권위를 찾으려는 시도는 벌써 플라톤의 《국가》에 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라고 말하는데 이상국가론이라는 말은 적어도 이 해설을 듣는 분들은 이 말은 안쓰는 것이 좋다. 어쨌든 초월적인 권위에 의해서 지상의 나라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플라톤이다. 그리고 그 초월적 권위의 자리에 인격신을 올려놓은 것이 바로 기독교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지상의 나라를 정당화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냥 지상의 나라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힘만 가지고 지상의 나라를 꾸려가도 된다고 말한 사람이 토마스 홉스이다. 따라서 정치사상에 있어서 정치적 권위의 정당성이라는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기본적인 저작들이 딱 목록이 나온다. 플라톤의 《국가·정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그래서 정치사상의 고전이다라고 하면 바로 이런 책들이다. 그 다음에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그리고 하나가 더 있는데 헤겔의 《법철학》이다. 헤겔의 《법철학》은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짬뽕 저작이다. 《신국론》 같은 측면도 있고, 《국가·정체》의 측면도 《리바이어던》의 측면도 있다.
정치사상에서 플라톤의 《국가·정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헤겔의 《법철학》이 가장 중요하다. 역사철학에서 가장 책은 《신국론》과 헤겔의 《역사철학》이다.
세번째가 《신국론》이라는 것이 제시한 것이 무엇인가. 《신국론》을 읽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본받아서 지상에서 실현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면 칼빈이 제네바에서 도덕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했던 것은 마음 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느님의 나라를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다. 칼빈이나 루터나 모두 아주 투철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였다. 따라서 플라톤의 《국가·정체》도 하늘에 바쳐져 있는 파라다이그마, 본을 본받아서 지상의 나라를 세워야겠다고 하는데, 그런 것들이 우리가 성취해야 할 목적이다. 플라톤은 역사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지만, 역사에 관한 얘기가 사실 《정치가》에 있다. 신화처럼 서술이 되어 있는데 먼 옛날에는 신이 다스리던 시대가 있었고, 신이 다스리다가 우주의 운행을 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했을 때 그 다음에 어떻게 있었고 그런 것들이 신화적인 형태로 서술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일종의 역사철학적인 뼈대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은 아주 분명하게 역사철학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다. 그 역사철학적인 구도라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수선하고 괴롭다. 그런데 계속해서 하느님이 제시해준 완전한 나라라고 하는 목적을 향해 가다보면 결국 완성에 이를 것이다, 즉 미래에 놓여있는 목적을 향해가다보면 완성에 이른다. 그게 바로 진보사상이다. 그러니까 플라톤에서는 역사라는 것이 개입되어 있지 않지만 플로탄의 《국가·정체》와 《정치가》를 혼합해서 읽으면 일종의 역사철학처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읽으면 아주 뚜렷하게 미래에 이루어질 아주 선한 목적을 향해서 오늘의 고난을 참고 나아간다고 하는 후대 사람들이 진보사관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아주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진보사관을 집약해서 제시한 것이 바로 헤겔의 《역사철학강의》이다. 그리고 그런 진보사관의 뼈대 위에서 현실 역사를 변혁시켜야 한다고 아주 강력하게 주장하고 그것을 바꾸는 힘이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인가, 경제적 것들의 물질적인 삶의 구조를 바꿈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마르크스이다. 그게 바로 진보사관이다. 그러면 진보사관의 뿌리라는 것이 먼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의 세번째 내용이다. 즉 목적론적 역사철학 또는 진보를 목적으로 하는 역사철학의 뼈대를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우고 있다. 그리고 이 15장은 그런 점에서 《역사철학강의》 내용이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15장은 기초적이면서도 기초적인, 기본 중에 기본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에서 인용된 부분을 읽으면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자기의 과거의 고난과 잘못이, 메타노이아, 즉 회심의 이전의 것들이 회심 이후의 삶을 이후 삶을 위한 예비적인 것이다. 그러면 과거의 고난과 잘못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 그것도 미래에 이루어질 내 삶의, 밝은 미래의 원료가 되는 것이다. 그때 거기서 반성하고 고쳐 나아가고 신에 귀의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메타노이아 이후에 개인은 신에게 귀의하고 국가는 신국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메타노이아 이후에는 신의 온전한 사랑 속에 자신을 맡깁니다. 이것을 나라의 차원에서 보면 전혀 다른 종류의 나라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 문장이 《고백록》과 《신국론》의 상응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일단 이렇게 되면 인간이 겪는 또는 나라가 겪는 모든 고난이 다 의미가 있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 있다. 여기서 뜻은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면 그 하느님의 뜻이 한국 역사에 개입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국인이 겪은 모든 고난이 결국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소재들이었다는 것을 그 책에서 이야기한다. 요즘에는 안읽는데 예전 80년내에는 필독서 중 하나였다. 지금은 읽지 않는다. 지금은 《고백록》과 《신국론》, 《역사고전강의》와 같은 좋은 책들이 있다. "《신국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세계 속으로 개입해 들어와 탐욕에 가득 찬 지상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신국을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제15강 197 그런 까닭에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메타노이아 이후에 개인은 신에게 귀의하고 국가는 신국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메타노이아 이후에는 신의 온전한 사랑 속에 자신을 맡깁니다. 이것을 나라의 차원에서 보면 전혀 다른 종류의 나라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제15강 197 《신국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세계 속으로 개입해 들어와 탐욕에 가득 찬 지상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신국을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197페이지를 보면 라틴어로 '페르펙티오perfectio'라는 말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진정한 진보(프로펙투스profectus)란 지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러한 완전상태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목적론적 역사 신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페르펙티오 또는 프로펙투스라는 말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가 쓴 책들을 보면 이런 용어들이 스며들어가 있다. 다시 말해서 18세기 계몽주의가 가지고 있는 진보적인 역사관들이 모두 다 일종의 세속화된 신학 또는 세속화된 목적론적 신학, 세속화된 역사신학으로 작용한다. 재미있는 것은 루소를 존경했던 철학자가 있다. 그게 칸트이다. 비록 그가 기독교에 대한 열광적이지 않았지만 칸트는 그런 페르펙티오 또는 프로펙투스, 즉 완정성, 진보를 루소로부터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는 인간이, 이성이 그런 완전함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생각을 세계사에 적용하여 세계사는 하느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난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세계사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처럼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한 고난과 열정을 겪으면서 역사의 목적을 이루려는 생각을 ‘진보적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임박한 종말을 이야기하면서 시작한 종교인데 중세에 들어서면서 종말을 말할 수 있는 교회만이 가지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30년전쟁을 치르면서 미래에 대한 예언을 장악하는 종교의 힘이 약해지고, 그 자리에 이른바 '근대 국민국가modern nation state'가 들어섰습니다. 그 이후로 근대 국민국가는 '인민people'의 미래에 설계하고 국가의 틀 안에서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이 국가의 손아귀에 장악된 것입니다." 이제는 근대 국민국가 이후에는 국민의 삶을 종교가 아닌 국가가 쥐고 있으니까 그야말로 국가가 국민의 미래이다. 그게 바로 세속화된 목적론적 역사 신학을 국가에 적용시키게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제15강 197 그러나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한 곳으로 가면 완전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상태를 라틴 어로 '페르펙티오perfectio'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진정한 진보(프로펙투스profectus)란 지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러한 완전상태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목적론적 역사 신학이라고 합니다.
제15강 198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생각을 세계사에 적용하여 세계사는 하느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난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제15강 198 그러한 고난과 열정을 겪으면서 역사의 목적을 이루려는 생각을 ‘진보적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제15강 199 그런데 30년전쟁을 치르면서 미래에 대한 예언을 장악하는 종교의 힘이 약해지고, 그 자리에 이른바 '근대 국민국가modern nation state'가 들어섰습니다. 그 이후로 근대 국민국가는 '인민people'의 미래에 설계하고 국가의 틀 안에서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이 국가의 손아귀에 장악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섭리providence라는 것이 희랍어로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이다. 여기서 경제를 가리키는 이코노미가 나왔다. 그런데 이 말은 경제할 때의 경과 세계의 세, 경세라는 말로도 쓰인다. 경세론적이다라는 말이다. 지난번에 《난파선과 구경꾼》에서 이코노미칼이라는 단어를 경제적인이라고 번역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앞뒤 맥락을 보면 경세론적 또는 신의 섭리적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부분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땅 위에 존재하는 현실의 교회나 국가와 하느님의 나라가 동일하지 않다고 얘기했는데, 그것을 동일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정치적 아우구스티누스주의라고 말한다. 그것이 발전하면 정치적 가톨릭주의가 될테고 그런 정치적 가톨릭주의를 근간으로 해서 자기의 정치신학을 제시하는 사람이 칼 슈미트이다. 파고들면 해야 할 것이 많다. 어쨌든 오늘 15강에서 얘기한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암기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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